89화. 결혼식 (3)
결혼을 마치고 버진로드를 빠져나온 두 사람에게, 알기 쉽고 사치스러운 신혼의 첫날밤 같은 것은 없었다.
“푸하!”
사방이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망망대해 위.
마린의 손에 이끌려 미끄러지듯 헤엄친 그곳에서, 간신히 숨을 들이마시며 시엔이 심호흡했다.
그야말로 물에 젖은 생쥐 차림이 돼서.
“아니, 대체 사람을 어디까지 끌…….”
말하려다 말고 시엔이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어느덧 그녀가 입고 있던 새하얀 웨딩드레스를 벗어던진 채, 은빛의 꼬리지느러미와 아름다운 상체를 과시하는 마린이 있었으니까.
“뭐, 못 볼 거라도 봤어?”
“아니, 그 드레스가 얼마짜린데…….”
어디서 벗었는지도 모르고 바다 위를 표류할 드레스를 생각하니, 시엔이 어이가 없어 중얼거렸다.
“걱정 마. 우리 ‘결혼의 증표’는 확실히 갖고 있으니까.”
그녀의 양쪽 귀에 매달린 푸른 수레국화 사파이어 귀걸이.
끝으로 서로의 손가락에 끼워진, 다이아몬드보다 100배나 더 희귀하다 일컬어지는 보석 타파이트(Taaffeite)까지.
“뭐, 이걸 끼고 다니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섭섭하네.”
“그러는 너도 이 보석들을 줄줄이 끼고 다닐 거야?”
“그럴 리가.”
마린의 말에 시엔 역시 어깨를 으쓱였다. 두 사람 모두, 피차 값비싼 보석을 치장하며 돌아다닐 정도로 할 짓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내일 아침까지는, 우리끼리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그들의 몸에 두른 결혼의 증표와 함께.
“이런 식으로 ‘신혼 첫날’을 맞게 될 줄은 몰랐어.”
어느덧 가까운 암초 위에 시엔과 함께 걸터앉으며 마린이 말했다. 물에 젖어 축축해진 신랑 예복을 벗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시엔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할 말이지.”
신혼 첫날밤이라 해도 사치스럽고 값비싼 저택이나 성의 침실이 아니다. 심지어 육지 위조차 아니었다.
그저 끝없는 파도가 출렁이는 바다 위, 비릿한 해조류와 소금 냄새가 아스라한 암초 위였다.
“나는 지금도 인간이 싫어.”
암초 위에 누운 채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마린이 말했다.
“세상에 인간처럼 밉상스러운 동물이 많지는 않지.”
시엔 역시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부정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니 인간의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고, 이대로 인간이 될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
그 결의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아, 시엔.”
그리고 이어지는 말에 시엔이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뭐라고?”
“귀먹었어?”
마린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나는 널 좋아해.”
눈부신 햇살을 등진 채 그녀의 꼬리지느러미가 빛났다.
“아니 뭐, 우리 사이가 새삼 나쁘지는 않지…….”
시엔이 멋쩍은 듯 애써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그냥 나쁘지 않은 정도야?”
“꽤 많이 좋지.”
남 일처럼 머리를 긁적거리는 시엔을 향해 마린이 웃음을 터뜨렸다.
“땅 위에서 봤을 때랑 아주 딴사람이네.”
“내가 할 말이네.”
시엔의 말에 마린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는 물 위에서 유능하거든.”
“아니 뭐, 나도 딱히 무능하지는 않은데.”
그 말에 마린이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꼬리지느러미로 가벼운 물장구를 치며.
그리고 그때였다.
시엔이 축축하게 젖어 거치적거리는 정장의 상의를 벗는 순간, 마린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뭐하기는, 축축해서 나도 좀 벗자.”
시엔이 어처구니가 없어서 대답했다.
“자기 혼자 벗어놓고 나는 입고 있으라고?”
물론 다 벗을 수는 없다. 그저 거추장스러운 상의를 벗고 여전히 바지는 남겨둔 채다. 이 옷은 그냥 옷이 아니라 여차할 때 무기로도 쓸 수 있는 거미 허물이니까.
게다가 정장 하의의 허벅지 밑에 고정해둔 시엔의 애검 ‘왕 시해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휴, 난 또 뭐라고…….”
당황 끝에 그녀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는 마린.
“왜, 혹시 이상한 기대라도 했냐?”
시엔이 짓궂게 묻자 마린 역시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네가 지금 어디 있는지 잊어버린 모양이네.”
첨벙!
그대로 시엔의 팔을 낚아채며 함께 함께 물속으로 빠져든다.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여성의 힘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완력과 함께. 졸지에 물속에 빠져든 시엔이 그 상태로 눈을 감고 숨을 참았으나, 바로 그때였다.
─ 괜찮아, 시엔.
물속에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눈을 뜨고 숨을 들이마셔.
“!”
동시에 시엔을 익사시킬 것처럼 쏟아지는 바닷물의 격랑이 사라졌다.
“너, 물속에서는 진짜 겁쟁이구나.”
즐거운 듯한 마린의 키득거림이 들린다.
“의외로 귀여운 구석이 있네.”
“…….”
수중에서, 마치 땅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들리는 목소리.
어느덧 손을 마주 잡은 시엔과 마린 주위에, 공기가 가득 들어찬 투명하고 커다란 기포(氣泡)가 덧씌워져 있었다.
“봐, 여기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야.”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시엔이 조용히 숨을 삼켰다.
쏟아지는 햇살이 바닷속 구석구석까지 깊게 스며들어 비추는 그곳은, 말 그대로 푸른색 위에 총천연색의 빛이 춤추는 이상향이었다.
해저에 숲처럼 무성하게 자란 오색의 산호초들과 너울거리는 해조류, 헤엄치는 물고기 떼, 심지어 노란 줄무늬에 흑백, 보랏빛 등지느러미 등 온갖 색조들이 하나의 비늘 위에 섞여 있는 물고기도 있었다.
어느새 마린의 꼬리지느러미가 미끄러지듯 시엔을 잡아끌며 바닷속을 헤엄쳤다.
‘인간은 평생 이런 곳에서 자유롭게 헤엄칠 수 없겠지.’
그녀가 어째서 인간이 되기를 그토록 끔찍이 싫어하는지, 인간이 되느니 차라리 물거품이 되는 게 낫다고 했던 말이 비로소 이해되었다.
어느덧 수백, 수천 마리의 작은 물고기 떼가 시엔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고마워, 마린.”
바닷속의 풍경을 뒤로하고 시엔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네가 사는 세계를 알려줘서.”
“이곳의 풍경을 본 인간은 너뿐이야.”
마린이 즐거운 듯 말했다.
“여기는 우리 가문의 해역이라 아무나 들어올 수 없거든. 그중에서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고.”
“그것참 영광이네.”
공식적으로 육지에 나와 있는 시실리아 섬은 어디까지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그들 서펀트 가문이 다스리는 진짜 영지는 바로 그 밑에 있으니까.
“나는 이것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거야.”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처럼,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있다.
사람들은 그 가치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것은 시엔의 적들조차 마찬가지다. 동시에 양보할 수 없는 가치가 격돌할 때, 누군가는 결국 그 가치를 포기하고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
‘이제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시엔이 그의 전부를 제국의 손에 빼앗겼던 것처럼, 이제는 시엔이 그들의 전부를 빼앗을 차례였다.
“함께 싸우자.”
시엔이 마린의 손을 맞잡았고, 마린 역시 시엔의 손을 맞잡는다.
“물론이지, 시엔.”
이 나라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 그 일각을 짊어지게 될 가문의 두 미래가.
* * *
그 시각.
두 부부가 자리를 비운 수정성 나디아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대다수 하객이 물로 된 바닥 위를 걸으며 수정성 나디아의 경이로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이, 그 와중에도 평정을 잃지 않는 강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그녀를 앞에 두고 있는 대륙의 최강자들과 더불어, 또 하나의 얼굴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다들 이곳에 계셨네요.”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도무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추레하기 짝이 없는 누더기 꼴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인사하렴, 루카.”
루카라 불린 남자아이가 고개를 숙였다.
“운명이 이끌어준 저의 새로운 대자랍니다.”
그 모습에 라일라가 차가운 눈동자로 되물었다.
“오스카 공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네요.”
“─.”
그 말에 휘하의 철십자 기사단과 함께 기싸움을 펼치고 있던 검마 오스왈드가 눈썹을 찡그렸다.
“아퀴나스 추기경. 나의 아들─ 아니, 그대의 대자(代子) 오스카는 지금 어디에 있지?”
“그란델 대공 각하에게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서 무척 유감이랍니다.”
“……뭐라고?”
빌헬미나의 말에 검마 오스왈드의 손가락이 허리춤의 칼자루 위로 옮겨갔다. 당장이라도 칼을 뽑아 휘두를 것 같은 살기를 담아서.
제국과 공화국 사이의 알기 쉬운 기 싸움이 아니다. 같은 황제를 섬기는 신성 제국, 바로 그 제국의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립이었다.
“오스카 공자님께서는, 마지막까지 오만의 죄악을 버리지 못하고 끝내 죄인의 길을 택하셨지요.”
스릉.
검마 오스왈드의 검이 빌헬미나의 목덜미를 향해 겨누어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사탄의 자세(Satan Stance)」.”
동시에 오스왈드 그란델을 대륙 제일의 강자들 중 하나이자 ‘검마’라 불리게 해준 자세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촤아악!
문자 그대로 악마의 날개를 활짝 펼친 검의 악마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부터 대답을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이다.”
사탄.
7대 죄악 중 분노를 상징하는 악마이자, 제국 국교회의 해석에 따라서는 일곱 대악마 수준에서 그치지 않고 ‘이 세상의 악 그 자체’라고 불리는 하는 악의 화신.
“내 아들 오스카는, 지금 어디에 있지?”
아서와 롤랑, 라일라 외에 이들이 당황하며 거리를 벌린다. 동시에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리듯 콜로세움처럼 일대를 휩싸며 그들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이 불과 싸움 구경이니까.
“저 역시 오스카의 죄와 악을 씻어내기 위해 노력했답니다.”
빌헬미나가 슬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럼에도 그 아이를 죄의 늪에서 구원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슬플 따름이지요.”
그 말을 끝으로 검마의 검이 휘둘러졌다.
아니, 휘둘러지려고 했다.
카앙!
칠흑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밴시」 린이 어느새 나타나 그의 일검을 가로막았다.
마찬가지로 월광검의 서슬을 빛내며 「웃는 남자」가 칼끝을 겨누었고, 「마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 역시 검마의 곁에서 단검을 겨누었다.
“아, 아, 아으…… 싸, 싸움은 나빠……. 펴, 평화롭게 대화로 해결을…….”
유일하게 당황하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대량학살장치」 앨리스를 제외하고.
그들의 영토에서 이 이상의 소란은 결코 허락할 수 없다는 듯.
“……마지막으로 묻겠다.”
그러나 사방에서 겨누어진 하이마스터들의 칼날에 아랑곳하지 않고, 검마 오스왈드가 물었다.
“내 아들…… 오스카를 어떻게 했지?”
스릉.
동시에 검마를 보좌하고 있던 신성 제국 최강의 기사 조직, 철십자 기사단의 이들 역시 검을 뽑았다.
당장이라도 불꽃이 터질 것 같은 일촉즉발의 대치.
“걱정하실 것 없답니다. 딱히 공자님의 신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 속에서 빌헬미나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지금쯤 오스카 공자님께서는, 그란델 대공령으로 무사히 돌아가셨을 거랍니다.”
“…….”
그 말에 비로소 검마 오스왈드가 자세를 거두고, 칼을 집어넣는다.
“그 말이 맞기를 하느님에게 기도해야 할 거다, 빌헬미나 추기경.”
“물론이랍니다, 대공 각하.”
빌헬미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 * *
“예쁘다.”
암초 위에서 시린 달빛이 쏟아지는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마린이 말했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밤바다 속에서, 숨길 수 없는 은빛의 비늘과 아름다운 상체를 드러내며.
그녀와 함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득 생각했다.
‘처음에는 다들 그런 식이지.’
처음. 지금은 그녀가 말하는 처음으로부터 얼마나 흘렀을까?
알 수 없었다.
여전히 시엔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란 걸 잊지 말아 주렴.’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란 사실도.’
‘가족 말고 달리 우리에게 뭐가 남아 있는데?’
‘제 아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습니다, 돈 시엔.’
‘잊어버리면 아, 안 돼. 우, 우리에게는…….’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고,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생각했다.
지금 시엔의 눈앞에 있는 그녀 마린은, 시엔에게 있어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