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광전사 라힘 (1)
푸른 수평선 너머로 동틀녘 어스름의 끄트머리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이고, 허리야…….’
여명의 빛을 등진 채 시엔이 쑤시는 허리를 두들기며 몸을 일으켰다. 딱히 그런 의미가 아니라, 울퉁불퉁한 암초 위에서 하루를 보내기는 쉽지 않았던 까닭에.
첨벙!
바로 그때, 암초 앞의 바닷속에서 마린이 물고기처럼 바다 위로 뛰어올랐다. 아직 완전히 가시지 않은 보랏빛 어둠과 여명이 뒤섞여 있는 수평선 위로 보란 듯 은빛의 비늘을 과시하며.
“일어났어, 시엔?”
“응.”
“돌아가자.”
암초 위에 앉은 시엔을 향해 마린이 손을 내밀었다.
꿈같았던 하룻밤이 끝나고, 서로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갈 때였다.
* * *
딱히 마린과 결혼하고 부부 사이가 됐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녀에게는 그녀가 싸워야 할 전장이 있었고, 시엔 역시 싸워야 할 전장이 있었으니까.
그 시각, 나이트워커 공작령의 저택.
“이야, 이렇게나 많은 가족이 모이다니.”
은으로 된 촛대에 촛불을 밝히고, 온갖 사치스러운 요리들이 세팅된 다이닝 테이블 위에서 미하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동감이구나, 미하일.”
마찬가지로 《웃는 남자》 요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요한의 미소에 여느 때처럼 능청스러운 미하일이 그답지 않게 시선을 돌렸다.
“티아! 많이많이 먹어! 어릴 때니까 왕창 먹어둬야지!”
커다란 티본스테이크, 뼈째로 구운 양고기, 통돼지 삼겹살, 다이닝 테이블 위의 온갖 육류란 육류를 모조리 티아 쪽으로 밀어 넘기며 그레텔이 활짝 웃었다.
“네, 네에…….”
“어릴 때는 고기야! 고기를 많이 먹어야 돼! 자자, 먹어! 내가 썰어서 입에 넣어줄까?! 응? 헤헤.”
자기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는 어린 소녀 그레텔의 말에, 곁에 앉은 티아가 부담스러운 듯 미소 짓는다.
“고, 고마워요, 그레텔 이모…….”
“이모가 뭐야, 이모가! 언니라고 불러!”
“네, 그레텔 언니─.”
“야, 이 멍청이 돌대가리 그레텔! 티아가 부담스러워하잖아! 작작 좀 해!”
그레텔의 천진난만한 애정 공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티아를 감싸며 헨젤이 소리쳤다.
도무지 품위나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화국 제일의 귀족 가문에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운 식사.
테이블 끝자락의 상석에 앉은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식사 대신 접시 위에 플레이팅된 하드 치즈나 생햄 따위를 손가락으로 집어 먹으며.
“다들 즐거워 보여서 다행이네요.”
“이렇게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가 흔치는 않으니까 말이지, 라일라.”
《웃는 남자》 요한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금처럼 티격태격하는 그 소란조차 그들 가문에게는 황금보다 귀하고 값진 시간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공작 가문의 시시한 격식이나 귀족의 예절 따위는 잊고, 이 순간을 즐기고 음미하며 기억에 새겨두는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가족들이 다시 이 자리에 똑같이 모일 거란 확신이 없었으니까.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모여 웃고 떠드는 가족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하나둘씩 줄어든다. 그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밤을 걷는 자들의 숙명이니까.
시엔이 나지막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시는 그렇게 놔두지 않겠다.’
이곳에 있는 시엔의 전부를, 다시는 적들의 손에 빼앗기게 놔두지 않겠다. 그러기 위해 손에 넣은 강함이고 깨달음이다.
바로 그때였다.
쾅!
느닷없이 다이닝 룸의 문짝을 난폭하게 걷어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늦어서 죄송하오! 친애하는 형님 누님들! 그리고 아우들!”
호탕하기 이를 데 없는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어서 오렴, 라힘(Raheem).”
“라일라 누님,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뵙소!”
라힘 나이트워커.
척 봐도 이 미터를 가볍게 뛰어넘는 거구에 폭발할 것처럼 꿈틀거리는 근육과 강골(强骨). 그러나 시엔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녹색과 구릿빛에 가까운 그의 피부색. 오직 인간밖에 쓸 수 없는 인간찬가의 의지 ‘오러’를 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괴물이라 손가락질받는 같은 인간……. 오크였다.
“집사장, 라힘을 위해 따로 술과 고기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공작 각하.”
라힘을 보자마자 라일라가 가볍게 귓속말을 속삭였고, 집사장 역시 당황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야, 라힘!”
이윽고 거구의 오크 앞에서 그레텔이 스스럼없이 미소 지었다.
“오오, 그레텔 누님 아니오!”
“헤헤, 우리 라힘도 못 본 사이에 더 커진 것 같네!”
“하하, 유감스럽게도 키는 커지지 않았소!”
그레텔의 말에 라힘이 호탕하게 가슴을 두들기며 말했다.
“그러나 이 라힘,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더더욱 이 주먹을 굳세게 갈고닦았다오! 이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도 마찬가지지!”
듣는 사람이 부끄러워질 대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라힘의 말에 라일라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늘 믿음직하구나.”
라힘 나이트워커. 라일라의 말처럼 가문 내에서도 가장 믿을 수 있는 전력 중 하나.
그러나 동시에 그는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는커녕, 마스터조차 아니었다.
“여전히 우리 가문의 검을 배울 생각은 없는 거니?”
딱히 라힘이 약하고 미숙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허허, 경애하는 라일라 누님! 아시지 않소!”
라힘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을 잇는다.
“우리 가문의 검은 이 소생에게 ‘맞지 않는 옷’이란 걸!”
“글쎄, 나는 네 손에서 펼쳐질 가문의 검이 오히려 기대되는데 말이야.”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웃었다.
그 말처럼 눈앞에 있는 라힘 나이트워커는 가문의 하이마스터도 마스터도 아니다. 그저 간신히 가문의 9가지 검식을 흉내 낼 수 있는 어린아이, 메이드맨의 직함을 가졌을 뿐이니까.
그럼에도 눈앞의 가족, 라힘은 보통의 메이드맨과 달랐다.
「버서커(Berserker)」 라힘 나이트워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들 가문의 아홉 가지 검식 중 무엇 하나 통달하지 못한 오크 전사.
그러나 통달하지 못한 게 아니다. 통달하지 않은 것뿐이다.
그가 갈고닦는 것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되기 전이나 후나 오직 하나, 그의 두 주먹이었으니까.
“하오나 라일라 누님! 가족을 지키기 위한 이 몸의 주먹은 어느 때보다도 강해졌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소!”
“새로운 깨달음이라도 얻은 거니?”
“물론이오!”
라힘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으며 대답했다. 동시에 그의 주먹을 따라 일렁이는 기류를,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 누구도 놓치지 않는다.
물론 여기서 그가 주먹을 휘둘렀다가는, 그냥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정도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라힘도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바로 그때였다.
“오오, 시엔 형님 아니오!”
라일라의 곁에 앉은 시엔을 보자마자, 라힘이 주먹을 거두고 재차 소리를 높였다. 그 호칭에 시엔이 당황해서 말을 잇는다.
“아니, 형님이라뇨……. 오히려 제가 그렇게 불러야죠, 라힘 삼촌.”
“하하!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이오, 시엔 형님!”
시엔의 말이 라힘이 당치도 않다는 듯 가슴을 내리쳤다.
“그 나이에 벌써 성품성사를 치르고 가문의 하이마스터가 되지 않았소! 하이마스터는커녕 마스터도 되지 못한 이 못난 아우에게는 그저 하늘처럼 높은 형님일 뿐이라오, 시엔 형님!”
“어, 아니, 그…….”
“체념해, 시엔. 저 바보 고집은 가주님도 못 꺾으니까.”
“…….”
헨젤이 어깨를 으쓱였고 시엔 역시 쓴웃음을 지으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라힘이란 인간이자 가족이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암살자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
아니, 그와 어울리지 않는 것은 암살자뿐이 아니다.
어느덧 집사들이 라힘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요리들을 가지고 왔다.
아무런 향신료도 뿌리지 않고 요리조차 되지 않은, 그저 통째로 구워 핏물과 육즙이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가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부댓자루에 담겨 있는 말젖 술, 마유주(馬乳酒)와 함께.
라힘은 집사가 가져온 음식과 술을 탁자도 아니고, 다이닝 룸의 바닥에 주저앉아 게걸스럽게 해치우기 시작했다.
“이야, 진짜 복스럽게도 먹는구나.”
“그러게나 말이야.”
요한의 말에 조용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밴시 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녀의 눈을 가린 칠흑의 붕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의 허브샐러드를 입에 가져다 넣으며.
“도대체 저 술을 무슨 맛으로 먹는지 나는 아직도 모르겠다니까.”
“모든 술은 저마다의 정취가 있는 법이지요, 돈나 린.”
기품 넘치는 노신사가 린의 말을 받아 대답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완벽한 귀족의 테이블 매너를 지키며.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 나이트워커.
늙었다는 말은 얼핏 듣기에 썩 좋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에게 있어 ‘무사히 늙었다’라는 것은, 그 자체로 그들 가문이 표할 수 있는 최대의 찬사 중 하나였다.
젊었을 적 하이마스터 서품을 받을 당시에는 「침묵의 그림자(Silent Shadow)」라 불렸고, 지금에 와서는 가문의 하이마스터 중 유일하게 ‘제2의 진명’을 하사받은 강자.
“할아범은 저 술, 먹어본 적 있어?”
“……솔직히 떠올리고 싶은 기억은 아니군요.”
“그럴 줄 알았지.”
린이 기품 있는 칼질로 송아지 고기를 썰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와구와구!
그에 비해 식기조차 쓰지 않고, 홀로 바닥에 앉아 손으로 고깃덩어리를 쥐고 집어삼키는 라힘의 모습은 실로 이질적이었다. 심지어 부댓자루에 가득 채워진 술을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켜고 거하게 트림을 내뱉는 기행까지─.
“꺼윽!”
“우웩, 더러워.”
그레텔이 차마 못 볼 광경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어느덧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고깃덩어리를 모조리 해치우고, 라힘이 흡족한 듯 배를 두들겼다.
“가족이 있고 술과 고기가 있으니, 이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게 없구려! 그렇지 않소, 시엔 형님!”
“어, 음, 그, 그렇네요……. 라힘 삼촌.”
시엔이 멋쩍은 듯 대답했다.
“동감이란다.”
라일라 역시 은접시 위의 하드 치즈를 집어 먹으며 웃었다. 그사이에도 헨젤과 그레텔은 저마다의 이유로 티격태격하고 있고, 티아는 그런 가족들의 식사가 익숙하지 않은지 다소 움츠러든 채다.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가족들의 식사였다.
* * *
저녁 식사를 마치자 창밖은 어느덧 완연한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서녘 하늘에는 미처 다 저물지 못한 태양 끄트머리가 밤의 어둠과 뒤섞여 보랏빛 어스름을 자아냈다.
“배불리 밥도 먹었겠다, 슬슬 몸이 달아오르는구려!”
묵시록의 기마상이 세워진 공작 저택의 광장. 모처럼 가족들이 함께 모여 저택을 거닐던 중, 라힘이 어깨의 관절 꺾는 소리를 내며 말했다.
“확실히, 우리가 이렇게 모일 일이 흔치는 않지.”
밴시 린의 말에 루치아노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 그 가문의 최고 전력이 무려 여섯 명이나 모여 있는 자리.
“어떻소, 시엔 형님!”
그리고 순수한 전력으로는 결코 그들에 뒤지지 않는 가문 내 최강의 자기류(自己流) 구사자, 라힘이 말했다.
“이 못난 아우의 주먹에 형님의 검으로 가르침을 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호전성을 드러내며 라힘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형님이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라힘 삼촌.”
시엔이 짐짓 겸손을 떨며 말했다.
스릉.
어느 틈에 소맷자락 밑에 숨겨둔 ‘왕 시해자’를 꺼내 역수로 고쳐 잡으며.
“오히려 제가 배워야죠.”
이 세상에서 가장 암살자와 어울리지 않는 남자.
광전사 라힘 앞에서 《호수의 암살자》가 칼자루를 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