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광전사 라힘 (2)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지 않은 가족들이 지켜보는 와중,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럼 나부터 가겠소, 시엔 형님!”
광전사 라힘이 자신의 두 주먹을 힘껏 맞부딪치며 말했다.
“「끓는 피의 자세(Blood Boil Stance)」!”
활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은 열기가 라힘의 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깨닫고 보니 어느덧 거리가 좁혀져 있었다.
하이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시엔조차 충분히 ‘빠르다’고 느낄 정도의 움직임.
심지어 그의 손에는 날붙이도 무엇도 들려 있지 않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는 그의 주먹에, 이글거리는 불꽃 형태의 오러가 휘감기며 시엔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것이 바로 라힘 나이트워커란 이름의 남자가 걷는 길이었다.
암살자의 길도 아니고 기사의 길도 아니며, 심지어 마법사의 길조차 아니다.
무도(武道).
눈앞에서 내리꽂히는 주먹을 베기는커녕, 검을 쥐고 있는 시엔이 정작 거리를 벌리며 물러나야 할 정도의 파괴력.
오러의 힘으로 육체 능력을 강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자 그대로 흉기의 경지까지 끌어올리는 라힘 고유의 기술.
‘검을 튕겨낼 수 있는 경도(Hardness)는 손목까지.’
애초에 몸에 오러를 둘렀다고 해서 칼날을 튕겨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럼 애초에 오러를 쓰는 기사가 갑옷 따위를 입을 필요 자체가 없을 테니까.
라힘의 고유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저 주먹이 오러가 실린 검을 튕겨낼 수 있는 까닭은 오직 하나였다.
주먹이 ‘칼날을 튕겨내는 무기’가 될 정도로 무식하게 오러를 쏟아붓는 것이다.
무식하고 비효율적이란 말조차 부족하다. 저 정도의 터무니없는 오러를 오직 두 주먹에 쏟아붓다니, 우둔함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 우둔함이 지금, 나이트워커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를 수세에 몰아넣고 있다.
그것이 바로 광전사 라힘의 진짜 무서움이었다.
같은 인간에게 ‘오크’라 멸시받는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다룰 수 있는 오러의 절대량이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라힘이란 오크가 가진 오러의 양은 같은 오크들 사이에서도 비교를 불허하는 규격 외의 양이었다.
오러의 사랑을 받는 남자.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파상공세에 조금씩 걸음이 뒤로 밀린다.
쾅, 쾅, 쾅!
두 주먹이 뱀처럼 미끄러지며 사방에서 덮치듯 내리꽂혔고, 그 주먹 하나하나에 실린 위력에 지축이 요동쳤다.
‘이대로는 계속해서 수세에 몰릴 뿐이다.’
상대의 무기는 고작 두 개의 주먹이다.
그런데 고작 두 개의 주먹을, 마치 수백 명의 쇠뇌 사수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기는 것처럼 끝없이 내리꽂히고 있다. 수십, 수백 발, 마치 재장전조차 없이 빗발치는 쇠뇌 화살처럼.
그렇기에 틈이 없었다.
당장 눈앞에서 수백 발의 화살이 쏘아지는데 거기서 ‘역습’을 가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이게 바로 라힘의 무서움이었다.
검이 아니라 주먹.
흔히 검사들은 ‘검을 자기 몸의 일부처럼’ 다루는 것, 소위 신검합일(身劍合一)을 이상의 경지로 삼는다.
그런데 주먹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몸의 일부니까.
시엔의 검보다 라힘의 주먹이 빠르다. 심지어 라힘의 주먹은 두 개. 얼핏 사소해 보이는 그 차이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처럼 터무니없는 격차를 벌리고 있다.
콰직!
깨닫고 보니 라힘의 주먹이 어느새 시엔의 복부를 향해 강타하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허리를 굽히고 쇄도하는 더킹 대시에 이어, 몸을 숙이고 아래서 45도 각도로 올려 치는 일격.
「바디 블로우(간장치기)」.
─그 순간, 시엔의 갈비뼈를 찢고 칼날의 뼈가 사출된다.
가문의 5식, 가시나무의 자세.
촤아악!
오러를 담아 사출된 합금의 뼈 위로 라힘의 주먹이 격돌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
콰직!
눈앞에서 튀어나오는 칼날의 뼈를 보고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멈추지 않고 주먹이 내리꽂혔다.
라힘의 주먹에 시엔의 ‘가시나무’가 부러진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커헉!”
애초에 가시나무의 자세로 역습을 가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 저 상태에서 복부의 급소(간장)를 정통으로 맞지 않으려고 어쩔 수 없이 칼날의 뼈를 사출했을 뿐이니까.
가까스로 치명상을 피한 시엔이 입술을 깨물며 왕 시해자를 휘둘렀다.
휘둘러지는 왕 시해자 앞에서 라힘은 물러서지 않았다. 심지어 주먹으로 맞받아친 것도 아니다.
그저 그 자리에서 상체를 뒤로 젖히며 일격을 피해냈다.
「스웨이(Sway)」.
시엔의 왕 시해자가 아슬아슬하게 코앞의 허공을 갈랐고, 그 틈을 놓칠 라힘이 아니었다.
어느덧 라힘의 주먹이 아래서 위로 어퍼컷을 내리꽂고 있었다. 시엔의 턱을 밑에서 후려치기 위해.
“?!”
그럼에도 직격으로 턱에 내리꽂혀야 할 주먹에, 아무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수월!’
1식과 3식에 통달한 하이마스터, 호수의 암살자가 펼치는 망령의 자세.
그러나 깨닫지도 못한 사이 거리를 벌린 시엔이 역습을 가하는 일은 없었다.
“제법이네요, 라힘 삼촌.”
입술에서 흐르는 피를 삼키며 시엔이 말했다.
“그러는 시엔 형님이야말로, 역시 ‘형님’이 맞소.”
라힘 역시 주먹을 쥐었다 펴며 웃었다.
알 수 있었다.
방금 시엔이 보여준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지를 시험하기 위한 탐색전에 불과했다는 것을.
저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의 무게다.
그것도 19살 나이에 하이마스터가 된 가문 제일의 천재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계승할 후계자.
“부디 이 아우의 주먹에 가르침을 주실 수 있겠소?”
“……가르침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에요.”
시엔이 미소 지으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직후, 공기가 일전했다.
“「명경지수의 자세」─.”
시엔의 칼끝에 청아하고 투명하기 그지없는 울림이 깃든다. 어느새 시엔이 딛고 있는 발밑이, 마치 새파란 호수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 착각마저 들었다.
지금의 시엔을 하이마스터로 있게 해준 또 하나의 검식이자 《호수의 암살자》란 이름을 준 검식.
“호오, 진심으로 3식을 펼쳐 맞설 생각이구려!”
그 자세를 보자마자 라힘이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참지 못하는 전사처럼.
“잘 보렴, 티아.”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밴시 린이 속삭였다. 시엔과 린처럼 3식의 마스터를 목표로 하는 가문의 어린 암살자, 티아를 향해.
“너의 대부가 펼치는 명경지수의 ‘해답’을.”
“알겠어요, 린 언니.”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고, 시엔이 말했다.
맑은 거울과 멈춘 물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그 말을.
“《업화(業火)》─.”
불꽃.
“……!”
투명하고 새파란 호수 위에 발을 딛고 있는 듯했던 시엔의 일대가, 휘몰아치는 불꽃에 휩싸여 타올랐다.
“이게 무슨……!”
필시 더없이 투명하고 청아한 자세를 구사할 거라 짐작했던 라힘의 표정에 당혹이 어린다.
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린 언니, 저것은…….”
“세상에 ‘정답의 형태’는 하나가 아니란다, 티아.”
그럼에도 그 모든 것을 꿰뚫는 것처럼, 흑색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린이 속삭였다.
“잘 보렴, 저게 바로 너의 대부이자 《호수의 암살자》 시엔이 내린 답이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눈앞에서 잃고 빼앗겨도 흔들리지 않고 동요하는 지수(止水)의 마음 따위, 필요 없다.
전신을 휘감고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눈동자 하나 깜빡하지 않는 완벽한 명경의 경지가 그곳에 있었다.
명경지화.
마음속의 이야기나 비유 따위가 아니었다.
어느덧 시엔의 육체, 손에 쥐고 있는 ‘왕 시해자’의 검고 어두운 서슬조차 불길에 휘감겨 타올랐다.
“갑니다, 라힘 삼촌.”
카앙!
“!”
이글거리는 불꽃을 휘감고 시엔이 쇄도했다. 라힘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뜨겁다!’
저 불꽃과 열기는 허상이 아니다. 하물며 저 불길에 휩싸여 있는 시엔이 느낄 고통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시엔의 육체는 불타지 않는다. 아무것도 불사르지 않고 그저 끝없이 타오를 뿐이다.
설령 저것이 ‘멈춘 불’이라 할지라도, 고통 자체는 절대로 거짓이 아니다.
‘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생살이 타오르고 눈동자가 불타고 있다. 그럼에도 시엔은 눈동자 하나 깜박하지 않고 또렷이 눈앞의 상대를 응시하고 있다.
“대부님……!”
티아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저게 시엔이 손에 넣은 명경지수…….’
대놓고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으나, 칠흑의 붕대로 눈을 가린 린 역시 시엔이 펼친 자세에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곳에 있는 하이마스터조차 놀람과 걱정을 감출 수 없는 경이. 그것이 바로 호수의 암살자, 시엔이 펼치고 있는 명경지수의 자세였다.
‘저것이 시엔 형님께서 짊어진 업(業)의 무게!’
그 모습을 보고 라힘의 피 역시 끓어올랐다.
“형님의 불꽃! 이 졸자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소!”
마찬가지로 가슴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타오르는 호승심에 이끌려, 라힘 역시 쇄도했다.
카앙!
아까처럼 라힘이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공세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압도하는 것은 시엔 쪽이었다.
‘뜨겁다!’
질식할 것 같은 열기 속에서 휘몰아치는 업화의 칼날.
정열에 있어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라힘이, 바로 그 열기에서 밀리고 있었다.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서로가 타오르는 불꽃이라고 비유했을 때, 압도적으로 밀리는 것은 라힘의 화력이었다.
그 누구보다 뜨겁다고 자부했던 그의 정열마저 압도하는 지옥의 업화.
그 업화를 전신에 휘감고도 눈동자 하나 깜박이지 않는 호수의 암살자.
그것이 바로 ‘시엔 나이트워커’가 짊어진 열정이자 신념이었다.
‘설마 형님께서 이렇게나 뜨거운 열정을 짊어지셨을 줄이야!’
아니, 이것은 뜨겁고 어쩌고의 수준조차 아니다.
말 그대로 자기 몸을, 존재 자체를 불사르는 것조차 주저하지 않는 광기다.
콰직!
라힘의 주먹이 시엔의 칼날과 맞부딪쳤다. 그리고 라힘의 주먹이 비로소 꺾이고 뒤틀렸다.
기교도 무엇도 아니다. 순수하게 힘 대 힘에서, 열정 대 열정의 싸움에서 밀린 것이다.
쿠웅!
비로소 라힘의 거구가 무너지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어느덧 시엔을 휘감고 있던 업화의 불꽃 역시 거짓말처럼 스러진다.
그제야 비로소 눈동자 하나 꿈쩍하지 않던 시엔의 호흡이 흐트러지고 지친 기색이 역력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역시 대단하오, 형님……!”
무릎 꿇은 라힘이 경이를 감추지 않고 말했다.
“시엔 형님 앞에서는 이 졸자의 열정조차, 꺼질 듯이 위태롭게 타오르는 촛불에 불과하구려!”
“그럼 배워야죠.”
라힘의 말에 시엔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우리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는 그냥 호수와 거울이 아니에요.”
지금 시엔이 보여준 것처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뜨거운 열정과 업화를 휘감는 자세.
“우리 가문에 이토록 뜨겁게 타오르는 식이 있었다니─!”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은 라힘이 추구하는 정열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게다가 검을 쥘 필요도 없죠.”
“……!”
시엔의 말에 라힘이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지금, 시엔이 보여준 불꽃은 가주 라일라조차 꺾지 못했던 라힘의 고집을 꺾기에 충분했다.
장작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을 막을 수 없듯이, 이제는 시엔이 보여준 불꽃에 매혹된 라힘의 고집을 누구도 꺾지 못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