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발할라의 땅 (1)
그 시각.
카앙!
시엔과 라힘에 이어, 그 자리에서 맞부딪치는 가문의 그림자가 있었다.
월광검의 시린 서슬을 빛내며,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린 《웃는 남자》 요한.
칠흑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태도의 여검사, 《밴시》 린 나이트워커.
검에 있어 가문 제일의 검사라 불리는 린과, 가문의 하이마스터 중 순수하게 최강의 전력으로 분류되는 요한.
“집중해, 티아.”
어느덧 그들을 지켜보는 티아의 곁에서, 호흡을 추스르며 시엔이 말했다.
“저게 우리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의 힘이니까.”
이제 막 하이마스터가 된 시엔과 다르다. 오래전부터 하이마스터의 이름을 갖고 가족과 가문, 나라를 지탱해온 최강의 전력.
“설마 네 쪽에서 내게 대결을 걸어올 줄이야, 우리 린도 많이 컸네.”
“…….”
웃는 남자 요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스릉.
그저 손에 들린 태도가, 햇살에 비치며 금빛 서슬을 내뿜을 따름이다.
해가 쨍쨍 내리쬐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무덤가를 거니는 것처럼 오싹한 냉기가 감돌았다.
그저 서로가 마주하고 검을 쥐는 것으로도 이 정도의 기백.
깨닫고 보니 어느덧 두 사람의 X자로 교차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전조도 기척도─ 심지어 부딪치는 소리조차 없이.
‘망령의 자세.’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문의 1식, 망령의 자세는 모든 자세의 밑바탕이자 기초다. 그리고 그들 정도의 강자가 구사하는 망령의 자세는, 어지간한 가족들의 그것과 비교를 불허하는 것이었다.
카앙!
요한의 손에 들린 《월광검》의 창백한 서슬이 휘몰아쳤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공식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신기급 아티팩트.
그에 맞서 린의 태도가 교차했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아직도 너무 정직하구나, 린.”
“그러는 대부님은 여전히 교활하네.”
린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린의 대부, 요한 나이트워커. 그리고 요한의 대녀, 밴시 린 나이트워커.
나란히 가문 제일의 전력이 되어 활약하는 두 부녀.
끝없이 두 암살자의 칼끝이 격돌하는 와중에도 세계는 더없는 적막에 휩싸여 있다. 아니, 있던 소리마저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완벽한 무음(無音)의 세계.
그 속에서 맞부딪치는 린과 요한의 칼날에, 티아가 놀란 듯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소리가…….”
“잘 봐둬, 티아.”
당황하는 티아에게 시엔이 속삭였다.
“린 누님이 내린 ‘정답의 형태’를.”
린의 움직임이 멎는다.
그 상태에서 나지막이 읊조렸다.
“코퀴토스(Cocytus)─.”
린 나이트워커가 하이마스터에 이른 3식 명경지수의 자세, 그 속에서 그녀가 ‘정답’이라 생각하고 손에 넣은 형태.
지옥의 밑바닥에 있는 얼음의 호수, 배신지옥(背信地獄) 코퀴토스.
업화로 불타는 시엔의 호수와 대조적으로, 사무칠 정도로 시린 냉기가 휘몰아치며 그녀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우리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는 타 검식들과 달리 명확하게 ‘구체화된 형태의 오의’가 존재하지 않지.”
얼어붙은 호수 위에서 지키는 절대 평정의 자세.
린의 오의에 맞서 요한 역시 월광검을 고쳐 잡고 태세를 가다듬었다.
“「달그림자의 자세」─.”
4식 갈까마귀의 자세와 더불어 요한 나이트워커에게 《웃는 남자》의 이름을 준 제8의 검식.
웃는 남자. 직관적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하이마스터들의 진명과 달리 그 이름은 얼핏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보는 모든 자들은, 좋든 싫든 어째서 그가 ‘웃는 남자’라 불리는지 깨닫게 된다.
남자의 입가에는 여전히 부드러운 미소가 초승달처럼 걸려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월광검은, 어느새 린 나이트워커의 목젖을 겨누고 있었다.
달그림자의 자세 ─ 《섬월(纖月)》.
깨닫고 보니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그리고 끝났다는 결과부터 모든 것이 거꾸로 재생되듯, 뒤늦게 소리가 울려 퍼졌고 일섬이 휘몰아치며, 린이 쌓아 올린 얼음의 호수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자랑하는 최속(最速)의 검식.
‘빠르다……!’
지금의 시엔조차 그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없었다.
“아직 수련이 부족하구나, 린.”
“…….”
“말했듯이 너는 좀 더 교활해질 필요가 있단다.”
가문 제일의 검사이자 가문 제일의 도박사라 불리는 린의 앞에서, 검으로도 도박으로도 몇 수 위의 경지를 갖고 내려다보듯이.
“여전히 네 눈은 너무 많은 것들을 보고 있어.”
어느덧 월광검을 거둔 요한 앞에서 린이 나지막이 고개를 숙였다.
너무나도 압도적이며 허무할 정도로 맥없는, 도무지 같은 하이마스터끼리의 싸움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승부였다.
“명심할게, 대부님.”
* * *
그로부터 얼마 후.
라힘이 가문의 3식 ‘명경지수의 자세’를 배우겠다고 말했을 때는, 가문의 이들 모두가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다. 심지어 가주 라일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시엔 형님께서 새겨주신 이 뜨거운 불꽃! 절대로 잊지 않겠소!”
그리고 라힘에게 있어 시엔은 여전히 형님이었다.
“형님의 불타는 열정을 오늘도 이 졸자의 가슴에 깊숙이 새겨주시오!”
“…….”
“자, 형님! 오늘도 어서 대련을 부탁드리오!”
“…….”
“오오, 티아 아닌가! 오늘도 함께 명경지수의 수행에 힘쓰자꾸나!”
“네, 네에, 라힘 삼촌…….”
“수련, 또 수련이다! 마음이 요동칠 정도의 불꽃을 손에 넣을 때까지! 으하하하!”
“…….”
졸지에 조금 많이 귀찮은 아우가 생겨버린 시엔이었다.
* * *
일찍이 시엔의 칼날에 검이 부러지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졌던 소년.
그 후 죽음의 성모에게 대자로 거두어졌던 오스카가 그란델 대공령으로 돌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가 되어서.
좀 더 정확히는,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라 믿는 백치가 되어서.
미치광이가 된 아들의 모습에 더 이상 그가 알고 있는 오스카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의 이름도, 아버지의 얼굴도, 가족의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하는 오스카는 그저 당당하게 소리칠 뿐이다.
“나, 세상에서 가장 고결하고 위대한 기사가 실례를 무릅쓰고 부탁하나니! 귀인(貴人)이여, 부디 하룻밤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아도 되겠소?!”
“나,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냐…….”
애걸하는 듯한 검마 오스왈드의 말에, 오스카 그란델이 당당하게 소리쳤다.
“그란델 대공! 이 나라에서 가장 명예로운 기사의 귀감이라 들었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라 착각하는 오스카는, 검을 쥐기는커녕 뼈가 앙상히 말라붙어 거동조차 어려운 불구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가, 이 나라 제일의 기사에게 정중히 요청하노니! 부디 이 몸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허락해줄 수 있겠소?”
오스카가 다시금 소리쳤다. 시커멓게 때가 타고 누더기를 걸친 몰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 아아…….”
가문이 전부다(Familie ist alles).
가족은 가문을 이루는 톱니바퀴 하나에 불과하며, 그 톱니바퀴는 오롯이 그란델 대공 가문의 존속을 위해 존재할 의무가 있다.
동시에 깨달았다.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지켜야 할 가문을 이루는 것은 결국 ‘가족’이란 사실을.
검마 오스왈드가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가문의 하이마스터들이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고, 오직 시엔이 티아와 라힘의 ‘특별 수련’을 위해 남아 가족들을 가르쳐주는 사이.
시엔의 형 비고가 임무를 수행하던 도중, 급보를 갖고 돌아와 가주를 독대했다.
“신성 제국이 스카디 제도의 오크 부족들을 향해 성전(聖戰)을 포고했다고 합니다.”
“성전이라고?”
성스러운 전쟁. 세상에 명분 없는 전쟁은 없다. 그럼에도 신성 제국이 직접적으로 ‘신의 이름’을 명분으로 내거는 것은 결코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다. 그 말에 라일라가 의외란 듯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포교를 위해 스카디 제도에 향했던 신성 제국의 선교사 집단이 처형되자마자, 제국 국교회 측이 강력하게 성전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칠왕국 군도를 비롯해 대륙의 인간들은 하나의 유일신을 섬기는 제국 국교회를 신앙하고 있다.
그러나 저 멀리 아나톨리아 지역, 술탄 살라딘(Selahaddin)이 지배하는 사막 엘프들의 ‘사라센 제국’은 별개의 신을 신앙하며, 스카디 제도의 오크 부족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이교도들 앞에서 제국 국교회가 취하는 태도는 하나다.
개종이냐 죽음이냐.
물론 사라센 제국은 사막 엘프뿐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이종족으로 이루어져 있고,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물론 국력 자체도 결코 제국에 뒤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이 대륙의 그 어느 국가보다 강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스카디 제도의 오크 부족들은 그렇지 않다.
마음먹으면 제국의 힘으로 충분히 쓸어버릴 수 있는, 미개하기 짝이 없는 이교도 부족 집단.
“아울러 성전의 지휘는 교회군 총사령관이자 《피의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가 맡았다는 듯합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이는구나.”
그 말에 라일라가 가볍게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들이 우리 공화국에게 함대를 빌려달라고 요구를 했니?”
“아뇨, 공화국의 힘은 일절 빌리지 않겠다는 방침입니다.”
비고가 대답했다.
곁에서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엔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 어머니?”
“너는 어떻게 하고 싶니?”
라일라가 되물었다. 여느 때처럼 아들의 지혜를 시험하듯이.
“스카디 제도의 ‘인간들’은 다수의 부족으로 나뉘어 있어 결속이 그리 강하지 않지.”
“그래도 제국 정도로 강력한 외적의 침공 앞에서는 단결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혹은 마지막까지 뭉치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시엔이 기억하는 미래의 결과는 후자였다. 헤아릴 수 없는 부족들이 난립하며 칠왕국 이상으로 사분오열된 오크 부족들은, 처음부터 하나로 똘똘 뭉친 신성 제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그들 부족은 부정한 신을 믿는 이교도란 이유 아래 역사 속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계획적 종족 말살, 제노사이드(Genocide)에 의해서.
“우리 손으로 그들을 규합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기에 시엔이 말했다.
“네가 스카디 제도의 야를(Jarl, 부족장)들을 규합할 방법이 있다는 거니?”
“저에게는 없죠.”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오크라 불리는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외부에 적대적이다.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대륙의 이들을 ‘흰둥이’라 부르며 조롱하고 업신여기니까.
“그나저나 마침, 그들을 설득할 정도로 가슴이 뜨거운 남자를 알거든요.”
이어지는 시엔의 말에 라일라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 * *
그로부터 얼마 후.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타고 있는 공화국의 고속 갤리선 하나가 바다 위로 출항했다.
신성 제국의 성전에 앞서 오크들의 고향, 스카디 제도의 부족들을 하나로 규합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정열을 가진 남자, 라힘.
라힘과 함께 명경지수의 자세를 수련한 티아.
어느덧 가문의 어엿한 마스터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형 비고.
그리고 그들을 지킬 의무가 있는 가문의 최고 전력이자 어엿한 하이마스터, 시엔을 합친 네 명의 가족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