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93화 (93/200)

93화. 발할라의 땅 (2)

오크들의 땅, 스카디 제도의 스카게라크 해협.

칠왕국 군도와 마찬가지로 수십 개의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얼어붙은 땅. 척박하기로는 베네토 공화국의 석호조차 비교가 되지 않는 냉기의 대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며, 그마저 제대로 된 농작물을 기를 수조차 없다. 그나마 키울 수 있는 작물이라고는 감자나 호밀, 귀리 따위.

심지어 곳곳에는 아직도 녹지 않은 태고의 빙하가 여전히 얼어붙은 채다.

“어으, 추워.”

북해를 거쳐 스카디 제도의 어느 섬에 정착하고, 비로소 닻을 내린 형 비고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로브 차림으로 배에서 내린 시엔, 티아, 라힘과 함께.

하나로 통일된 왕국조차 없이 수많은 군소 부족들이 난립하는 오크들의 고향.

대륙의 인간들, 그중에서도 특히 신성 제국은 그들을 교화해야 할 미개한 종족 이상으로도 이하로도 취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꼭 그렇지는 않았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오직 ‘이익과 손해’ 두 가지의 관점으로밖에 보지 않는 수전노─ 베네토 공화국의 인간들로서는 더더욱.

“시엔, 여기가 핏빛 독수리(Blood Eagle) 클랜의 영토가 맞지?”

비고의 물음에 시엔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아마 그럴 거야.”

“아마……?”

“이 동네의 세력 지도는 하루가 멀다고 바뀌니까, 여전히 여기가 그들 영역일 거란 확신이 없지.”

쓴웃음을 지으며 배를 정박하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뭍으로 내린 바로 그때.

시엔의 말이 맞았다.

“당장 로브를 벗고 얼굴을 드러내라!”

하나같이 로브를 쓰고 후드로 얼굴을 가린 가문의 가족들 앞에서, 부둣가의 경비를 서고 있던 오크 무리가 다가와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오크의 몸에 새겨져 있는 문신(文身), 그것이 시엔이 알고 있는 핏빛 독수리 클랜이 아니란 것을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게 어느 클랜을 상징하는지 역시도.

“아, 망했네.”

시엔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천둥망치(Thunder Hammer) 클랜」.

스카디 제도의 오크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일 정도의 호전성과 적대적 성향을 자랑하는 부족.

“형님! 여기서는 제가…….”

그렇기에 후드를 벗고 라힘이 오크로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려는 찰나였다.

시엔이 말없이 팔을 뻗어 그를 제지하고, 대신해서 후드를 벗는다.

“……흰둥이 놈.”

그 모습을 보자마자 천둥망치 클랜의 오크들이 적의를 숨기지 않는다.

“제국의 개냐.”

“우리는 핏빛 독수리 클랜에게 받은 ‘우호의 메달’을 갖고 있습니다.”

“─.”

시엔이 품속에서 룬 문자가 새겨진 메달을 내밀었다. 스카디 제도의 오크 클랜들이 몇몇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에게 주는 신뢰와 증표.

“핏빛 독수리 클랜이라고?”

“그렇습니다. 우리는 공화국의 장사꾼들이고, 그대들과의 무역을 위해 이곳에 왔지요. 마침 상품도 가지고 왔습니다. 보다시피 은과 비단, 향신료와 포도주도 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미리 꺼내둔 포도주 하나를 눈앞의 오크에게 넘겼다.

설령 클랜이 다르다고 해도 우호의 메달은 오크의 명예로 내려지는 가교의 상징이다. 이것을 소지하고 있는 이상 아무리 그들이라 해도 섣불리 행동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귀하 클랜의 야를(Jarl)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

짧은 정적.

“아무리 그대가 우호의 메달을 가졌다 하나, 정체도 모를 놈을 외부자를 야를 앞에 들일 수는 없다. 특히 지금 같은 시기에는 더더욱.”

“그럼 혹시 ‘핏빛 독수리 클랜’이 있는 곳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핏빛 독수리는 없다.”

천둥망치 클랜의 오크가 차갑게 대답했다.

“모두 죽었지.”

모두 죽었다. 설마 눈앞에 있는 천둥망치 부족의 손에 죽었다는 것일까.

“그마저 발할라(Valhalla)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긍지와 명예마저 더럽혀진 채 이승을 방황하는 처지다.”

“……클랜끼리의 다툼으로 죽은 게 아닙니까?”

“클랜의 다툼이라고?”

시엔의 말에 오크가 차가운 살기를 내뿜으며 대답했다.

“우리는 전사의 명예를 존중하는 법을 알고 있다, 대륙의 인간이여.”

“그럼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죠?”

시엔이 물었다.

“구울.”

이어지는 오크의 대답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신성 제국에서 《피의 추기경》이란 놈이 나타나, 클랜을 몰살시키고 동족 모두를 구울로 되살렸다.”

“…….”

경악스러운 것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피의 추기경. 그 이름 앞에서는 시엔조차 쉽게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그들 클랜이 신성 제국의 선교사들을 처형한 보복이었지.”

“……핏빛 독수리 클랜은 비교적 대륙에 우호적이고 개방적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공화국과의 무역 규모도 적지 않았고요.”

시엔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들이 굳이 제국의 선교사를 처형했던 이유가 뭡니까?”

“놈들이 우리의 신, 오딘을 모욕했으니까.”

오크가 대답했다.

“술에 취해서 자기네 신을 믿지 않는 핏빛 독수리 클랜의 동족들을 향해 지옥에 떨어질 거라며 소란을 피웠다. 오딘과 토르의 토템 앞에서 오줌을 싸고 침을 뱉고, 자신들을 ‘메시아’라 칭하며 무례하게 일족의 여성을 겁탈하려 들었지.”

“…….”

이어지는 말에 시엔이 나직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놈들이 신성 제국의 사절단 자격으로 보호받고 있다고는 하나, 놈들의 횡포는 도를 넘었다.”

신성 제국은 강대국이다. 이곳 스카디 제도의 오크들 역시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부린 패악질은 도를 넘어버렸다.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그들이, 이렇게 자신들의 명예와 긍지를 짓밟히고 침묵할 리도 없다.

제국의 선교사들 역시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이런 짓을 저지르고 무사히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거란 사실을. 동시에 그것을 알고도 남의 신을 향해 침을 뱉고 모욕하는 행위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숭고하기 이를 데 없는 순교(殉敎)였다.

그들의 ‘희생’이 결과적으로 신성 제국이 이곳 스카디 제도에 하느님의 복음을 가져오는 계기가 될 테니까.

“그래서 죽였습니까?”

“그래, 그래서 죽였다.”

힘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느니, 차라리 싸우다 명예롭게 죽는 것을 택할 테니까.

“그리고 놈이 나타났지.”

“…….”

피의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

“놈의 손에 쓰러진 동족이 발할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구울로 되살아난 것을 보고, 일부 클랜들이 겁을 먹고 놈에게 고개를 조아리기 시작했지.”

오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명예로운 죽음을.

명예롭지 못한 죽음, 미래가 보장되지 못하는 죽음은 별개의 이야기였다.

“우리에게 이렇게 자세하게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가 뭡니까?”

눈앞의 오크가 해주는 이야기는, 일개 장사꾼 따위에게 해주는 이야기치고 지나치게 친절하며 자세했다. 특히 외부자에게 배타적 성향을 띠는 천둥망치 클랜으로서는 더더욱.

“나야말로 묻겠다. 왜 배를 물리고 돌아가지 않지?”

오히려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것은 오크 쪽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배를 물리지 않고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렇다고 장사의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아니지. 무엇보다도…….”

오크가 시엔 일행을 향해 담담히 말을 잇는다.

“그대들에게서 전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같은 인간에게 오크라 멸시받는 그들 인간은 결코 어리석지도 미개하지도 않다. 그저 믿는 신이 다르고 피부색과 체격이 조금 다를 뿐이다. 역설적으로 세상을 ‘이익과 손해’ 두 가지로밖에 보지 않는 공화국의 인간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알아봐 주니 다행이네요.”

“물론 그대들을 신뢰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지.”

“형제여, 그럼 어떻게 해야 신뢰를 얻을 수 있겠소!”

바로 그때, 침묵하고 있던 라힘이 후드를 벗으며 소리쳤다.

“증거가 필요하다.”

같은 동족의 모습을 보고도 개의치 않고 대장급의 오크가 대답했다.

“그대가 우리의 적이 아니란 증거, 그리고 우리가 그대를 신뢰할 수 있는 증거.”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호오, 말해봐라.”

그 말에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는 마음먹을 경우, 이곳에 있는 당신들 일족을 남김없이 쓸어버릴 수 있습니다.”

“……!”

불에 기름을 붓는 것 같은 시엔의 말에,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오크들이 살의와 함께 각자의 자세를 갖춘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글거리는 살기와 오러 앞에서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게 첫 번째 증거입니다.”

“그럼 그대 말이 ‘허세’가 아니란 것은 무슨 수로 증명할 셈이지?”

“비고 형.”

“알았어, 시엔.”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형의 이름을 불렀다.

촤아악!

어느덧 그곳 일대에, 시린 서슬이 빛을 흩뿌린다.

“……!”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어느덧 그곳 일대에 있는 오크들을, 말 그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에워싼 죽음의 거미줄이 있었으니까. 그것도 일부러 눈앞의 오크들이 보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춰 노골적으로 눈에 띄는 죽음의 거미줄을 흩뿌린 채.

나이트워커 가문의 7식─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

그것도 어엿한 7식의 마스터가 된 비고가 펼친 죽음의 거미줄이다.

“이걸로 두 번째 증명이 되었네요.”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고, 비고 역시 일대에 흩뿌린 죽음의 거미줄을 거두었다.

“…….”

부정할 수가 없었다. 당장 비고가 죽일 마음으로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였을 경우, 이곳에 있는 오크들은 깨닫기도 전에 모조리 목과 팔다리가 잘린 채 살해당했을 것이다.

“고, 공화국의 사신(死神)…….”

그 모습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최후의 증명은 당신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시엔이 말했다.

“그 대신, 증명을 마치는 시점에서 우리는 당신들 부족의 ‘야를’과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그 말을 듣고 깨달았다. 그들이 정말 그럴 마음을 먹었을 경우, 이곳에 있는 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야를(클랜 마스터)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공화국의 사신들은 그 무엇보다도 신뢰를 중요시하니까.

“…….”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늘 밤, 습격이 있을 예정이오.”

“습격?”

“구울이 된 붉은 독수리 클랜의 동족들이 ‘놈’의 명령에 따라 일대 클랜을 무차별적으로 습격하고 있소. 이곳 역시 예외가 아니지.”

그곳을 지키는 오크 수비대장이 담담히 말했다.

“우리와 함께 죽은 동족들의 명예를 지켜주시오. 그것이 그대들에게 요구하는 마지막 증명이오.”

그들이 무사히 죽고 평온을 얻어 ‘발할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부족의 명예에 걸고 약속하지.”

“알겠습니다.”

시엔이 대답했다. 그곳에 있는 나머지 가족들 역시, 후드를 벗으며 각자의 모습을 드러냈다.

대륙 제일의 암살자 가문에서 그치지 않고 이곳 오크들의 동토(凍土)까지 그 명성을 알리는 존재들이.

“이걸로 거래는 성립됐습니다.”

깨닫고 보니 어느덧 서녘 하늘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타오르는 저녁노을이 힘없이 스러지고, 어느덧 어둠이 빠르게 일대를 집어삼켰다.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곳에 있는 네 명의 ‘밤을 걷는 자들’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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