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94화 (94/200)

94화. 발할라의 땅 (3)

밤의 어둠이 내려앉기 전, 천둥망치 클랜이 정착한 마을 역시 일대에 목제 바리케이드를 쌓고 횃불을 밝히며 구울의 습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해자를 파고 창날 함정을 깔고,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해진 것처럼 표정들이 담담하다. 심지어 무장하고 있는 것은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수성을 돕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뭘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보지? 낯선 이방자여.”

방패를 등에 짊어진 채 쌍날 도끼를 찬 여성 오크가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올라프가 네놈들을 들였다고 해서, 동족들 모두가 신뢰할 거라 착각하지 마라.”

“딱히 지금 믿어주실 필요는 없어요.”

차갑게 내뱉는 오크 여전사, 일명 방패의 처녀(Shield Maden)를 향해 티아가 끼어들었다.

“결국 믿게 될 테니까요.”

티아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오크 여전사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손에 물 하나 묻혀본 적 없는 비실비실한 계집은 들어가 있어라. 방해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죠, 아름다운 전사님.”

여전사의 말에 티아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시엔조차 무심코 흠칫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였다.

“아무래도 썩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네.”

바로 그때였다.

“저, 저기, 이거…… 드세요.”

함께 모여 때를 기다리고 있는 시엔 일행을 향해, 몇 명의 어린아이들이 감자와 식은 죽을 가지고 왔다. 대륙에서 온 시엔 일행의 모습이 신기한 듯 흘끗흘끗 엿보며.

‘영양 상태가 썩 좋지 않네.’

척 봐도 비쩍 말라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습격에 맞서 함께 싸워줄 시엔 일행을 위해 없는 식량을 쪼개준 것이다.

“배고프지? 좀 더 먹어둬.”

시엔의 말에 아이들의 눈동자에 가벼운 망설임이 깃든다.

“우린 오기 전에 많이 먹어둬서 괜찮아.”

그러나 티아와 비고, 라힘이 잇달아 걱정할 것 없다며 아이들의 손에 음식을 돌려주자, 이내 걸신들린 것처럼 감자와 죽을 해치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해가 완전히 서녘 하늘 밑으로 떨어질 무렵.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둥, 둥, 둥.

전투를 알리는 소리였다.

부족 단위의 마을이라고 해도 하나의 클랜이 거점으로 삼는 영지 내의 여러 마을 중 하나다. 사실상 마을 전체가 하나의 수비 요새나 다름없다.

어느덧 어린아이는 대피를 마쳤고, 그곳에는 오로지 싸울 수 있는 전사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남자와 여자는 물론 심지어 노약자들조차 충분히 싸울 수 있는 ‘전사’다.

“태세를 갖춰라! 전열을 이탈하지 마라!”

마을 곳곳에 세워진 비좁은 구조물 사이에서 오크 전사들이 모여 태세를 갖춘다.

좁은 골목에서 각종 엄폐물을 이용해 전선(前線)을 최소화하는 전법.

어느덧 굳게 닫혀 있는 마을 입구와 바리케이드가 무너지고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발할라에 가지 못하고 구천을 헤매는 동족들.

─ 그어어어어!

같은 오크였다. 그저 살이 썩어 문드러지는 와중에도 두 눈이 시뻘겋게 출혈돼서,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려도 멈추지 않는 괴물이 된.

구울(Ghoul).

그들 앞에서는 높다랗게 쌓아 올린 마을의 방벽도 해자도 의미가 없었다. 목책을 타다 떨어져도, 설령 떨어지며 해자 위의 창에 꽂혀도 멈추지 않는다. 심지어 좀비처럼 아둔하지도 않았다.

어느덧 하나둘씩 마을에 침입한 오크 구울이, 좁은 골목에서 전열을 갖추고 기다리는 먹잇감을 찾는다.

“방패 벽!”

외침과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원형 방패가 밑에서 위로 겹겹이 쌓아 올려진다.

1열에서 방패를 쌓아 올린 이들 중에는 앞서 마주친 방패의 처녀도 포함되어 있었다.

쿠웅!

방패 벽과 구울들의 육탄이 격돌했다.

철과 살이 부딪치고, 창날이 살을 꿰뚫고, 굶주린 아가리가 방패와 창대를 물어뜯는다. 그 와중에도 전사들은 결코 대형을 무너뜨리지 않고,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방패 벽을 세워 올리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하게 빛나는 ‘인간찬가의 의지’를 뿜어내며.

콰아앙!

“오러의 공진(共振)…….”

지붕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시엔이 나직이 읊조렸다.

오직 인간밖에 쓸 수 없는 인간찬가의 의지. 그 의지가 함께 모여서 공명할 때, 오러의 위력은 배가 된다.

바로 옆에, 등 뒤에, 지켜야 할 동료들이 있다. 지켜야 할 아이들이 있다. 그렇기에 절대로 지나가게 놔둘 수 없다. 쓰러질 수 없다.

필사의 각오와 함께 의지가 결속되며 벌어지는 진짜 인간의 찬가─.

「원 포 올(One for All)」이라 불리는 오러의 대규모 증폭 및 결속 현상.

충분히 숙련된 정예 부대는 ‘원 포 올’이라 불리는 현상을 필요할 때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지금 시엔 앞에 있는 그들처럼.

아무리 이 세계의 저울추를 유지하는 것이 ‘소수의 강자’라 해도, 결코 보병과 머릿수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는 가장 커다란 이유.

콰직!

최전열의 방패를 담당하는 멧돼지 전사(Svinfylking)의 전신이 타오를 것 같은 오러로 빛났고,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오딘이시여!!”

“발할라!!”

“발할라! 발할라! 발할라!”

의지와 열정을 넘어 어느덧 광기에 가까운 외침이 울려 퍼졌다.

“방황하는 동족들을 모두 발할라로 보내줘라!”

끝없이 쇄도하는 구울의 군세 앞에서 도끼가 휘둘러졌다. 창이 내리꽂혔다. 끝없이 쏟아지는 구울의 무리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방패 벽과 함께.

수세로 보였던 싸움은 어느덧 일방적으로 역전된 채다. 얼핏 보기에 오크 전사들의 표정에는 승리를 직감하는 것 같은 기색마저 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엔 나이트워커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은 결코 의지 하나로 헤쳐 나갈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나, 시종 이스라펠(Israfil)이 하느님의 나팔을 불며 고하나니─.”

바로 그때, 지축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역적들아, 고개를 들어서 너희들의 죄를 너희가 알고 부끄러워할지어다.”

천사의 아리아.

신의 뜻과 의지를 대행하는 성스러운 힘을 품은 신언의 목소리.

“하느님 아버지의 앞에 서서 너희의 부끄러운 알몸을 돌아보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생생한 음성, 그것은 방패 벽을 세우고 구울들과 맞서고 있던 오크 전사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신 앞에 선 단독자(The Single Individual)의 아리아」─.

그 이름처럼 인간이 갖는 의지 그 자체를 무력화할 수 있는 저주와 부정의 아리아.

“!”

직전까지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던 그들의 오러가, 인간찬가의 의지가 덧없이 사라졌다.

마치 신의 전능함 앞에서 인간의 의지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아, 아아……!”

그 목소리의 의미를 깨닫자마자 오크 전사 하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노, 놈들이다! 놈들이 왔다!”

그들이 보여준 강철 같았던 의지가 거짓말이었다는 듯, 신 앞에서 나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비가(悲歌)가 울려 퍼졌다.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방패 벽이 무너지고 절망과 좌절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 이 겁쟁이들아!”

제1열을 지키던 방패의 처녀가 동료를 향해 소리쳤다.

“당장 방패를 들어! 방진을 무너뜨리지 마! 이대로 저 이교도 놈들 앞에서 우리의 긍지를 저버릴 셈이냐!”

아무리 소리쳐도 달라지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의지 하나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넘쳐나고 있으니까.

그리고 나약한 인간이 믿고 기댈 곳은 오직 하나다.

절망 속에서 제1열의 방패를 세워야 할 오크 하나가 무릎을 꿇고 중얼거렸다.

“회, 회개하겠나이다…….”

마치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신의 전능함에 압도되듯이.

“우,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옵소서…….”

바로 그때였다.

무릎 꿇은 오크를 향해 쇄도하려던 구울들의 무리가, 그 자리에서 갈가리 찢겼다.

마치 보이지 않는 죽음의 실에 걸려 토막 나듯이.

쩌적, 쩍!

시린 냉기가 내달리며 구울 무리를 얼린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너, 너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절망하던 방패의 처녀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말씀드렸죠?”

일찍이 손에 물 하나 묻혀본 적 없는 비실비실한 계집이라 조롱했던 소녀, 티아 나이트워커가 그곳에 있었다.

“결국 우리를 믿게 될 거라고.”

평생을 동토에서 살아온 그들조차 소름이 끼칠 정도로 터무니없는 냉기의 마력과 함께.

“으하하하!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는가!”

뒤이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호탕한 웃음이 들려왔다.

“전투를 보는 내내 얼마나 좀이 쑤셔 참을 수 없었는지!”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신의 전능함을 앞두고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고하는 아리아 앞에서 조금도 주눅 드는 일 없이.

“「끓는 피의 자세」!”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게 피가 끓어오르는 남자가 있었다.

구울이 된 동족들에게, 즉석에서 발할라로 보내주는 직행 티켓을 끊어주며.

죽음의 거미줄과 냉기, 누구보다 뜨거운 정열을 가진 세 명의 암살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역설적으로 신의 전능함 앞에서 절망하는 그들에게,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인간찬가의 불씨…… 희망을 지피며.

* * *

천둥망치 클랜의 마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그곳에 숨어 있는 제국의 쥐새끼를 향해 호수의 암살자가 말했다.

“상품의 3품, 좌품천사 이스라펠.”

제국 국교회가 자랑하는 최고 전력 중 하나, 사도.

“너는 여기서 죽는다.”

일찍이 그가 그곳에 있는 인간들을 향해 의지의 무력함을 조롱했듯이.

“네 신은 너를 구해주지 못할 테니까.”

“아, 아아…….”

그의 믿음과 신앙을 조롱하는 암살자가 있었다.

이스라펠 역시, 직전까지 마을 일대에 광역으로 퍼뜨리던 무력의 아리아를 ‘단일 대상’에게 응축해 시엔 앞에서 읊조렸다.

“신 앞에 선 단독자여, 네 위태로운 실존을 들여다보라!”

인간찬가의 의지를 빼앗고 전의를 상실하게 하는 것이 다가 아니다. 지금껏 쌓아 올린 믿음과 신념을 뿌리부터 부정하고 자신의 존재를 부정케 하는 절망의 아리아.

아무리 강철 같은 인간의 정신이라도 저것을 직격으로 맞는 이상, 말 그대로 자아가 무너져 내려도 이상하지 않다.

지금의 시엔조차 저 앞에서는 쉽사리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으니까.

동시에 그마저 시엔이 짊어지고 있는 마음의 불꽃을 꺼트릴 수는 없었다.

명경지화의 자세.

시엔이 손에 넣은 3식의 오의, 그 이글거리는 지옥의 업화와 함께 시엔이 쇄도했다.

“……나는 나다.”

신을 마주하는 듯한 끝없는 고독과 무게 앞에서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의지로 나아갈 길을 정하며.

“그리고 내 존재는, 네놈들의 신 따위가 정의하는 게 아니다.”

촤아악!

“■■■■■─!”

칠흑의 서슬이 마그마처럼 적색을 머금고 휘둘러졌다.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는 천사를 사냥하고 도륙해온 암살자의 칼날.

전투의 끝을 알리는 최후의 일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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