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두 개의 눈동자 (1)
전투는 끝이 났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이었다.
“벌써 제국 측에서 사도가 움직일 줄이야.”
“우리가 움직일 걸 어느 정도 예상했겠지.”
쓰러진 사도의 시체를 뒤로하고 시엔이 대답했다. 기척도 없이 등 뒤에 있는 그의 형, 비고를 뒤로하고.
신성 제국 측에서도 어느 정도 예상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설마 가문의 하이마스터 급 강자가 움직일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겠지.
그래서 당했다.
제국의 기준에서도 사도 급의 전력은 함부로 낭비할 수 없는 중요 전력이다. 물론 그들의 기준에서 소수라고 해도 실질 사도의 수는 수십 명 남짓.
─공화국의 기준에서는 그조차 터무니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당해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막 시엔의 손에 사도가 쓰러지고 승리했다고 해서 좋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대단하네, 시엔.”
“뭐가?”
어디까지나 시엔의 기준에서 그렇다는 말이었다.
“벌써 사도를 두 명이나 쓰러뜨렸잖아.”
틀린 말은 아니다. 사도라고 다 같은 사도가 아니었다.
“불완전한 사도니까.”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직 상품천사의 완전체 강림을 쓰러뜨리진 못했다.’
수십 명 남짓의 사도 중에서도, 상품천사의 완전체 강림이 가능한 이들의 수는 손에 꼽는다. 그들이야말로 시엔이 쓰러뜨려야 할 진짜 사도였다.
그게 바로 제국이 가진 힘이었다.
“형도 알잖아. 천사의 완전체 강림과 불완전 강림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자신에게 늘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구나, 시엔.”
비고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말대로 가문의 어엿한 마스터가 된 비고 역시, 사도 레벨은 아닐지라도 제국의 헤아릴 수 없는 제국 공안을 쓰러뜨렸다. 그렇기에 모를 리 없었다.
완전한 천사와 불완전한 천사, 하물며 그것이 상품의 천사일 경우에는 하늘과 땅 수준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그래도 네 덕분에 승리했어, 시엔.”
“가족 모두의 덕분이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동생의 겸손에 형 비고가 능청스레 대답했다.
“그럼 다 같이 모여서 승리의 기쁨을 나눠야겠네.”
* * *
그 시각.
미드소마(Midsommar) 클랜의 수장, 야를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우, 우리 미드소마 클랜은 지금까지 믿어온 거짓된 신을 버릴 것을 맹세합니다.”
남자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입맞춤하며, 부족들을 대표해 말을 잇는다.
“오직 유일한 하느님 아버지를 신앙할 것을, 성부와 성자의 이름으로 맹세하나이다!”
“우리는 ‘신의 아들’께서 우리의 원죄(原罪)를 대속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음을 엄숙히 받아들입니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발할라도, 오딘도 없었다.
“자애로운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형제자매님들.”
발등 위에 야를의 입맞춤을 받으며 《피의 추기경》 체사레가 차가운 목소리로 웃었다.
‘신의 아들이라.’
천년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일컬어지는 하느님의 독생자. 이 대륙의 인간들이 찬미하는 메시아.
그러나 천년의 괴물, 체사레 보르자는 알고 있었다.
일찍이 그가 고대 제국의 황제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불리던 시절. 카이사르는 그 남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었고, 그 남자가 죽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애초에 그에게 사형을 내린 당사자가 바로 당시의 황제였던 카이사르 자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체사레(Cesare)가 기억하는 그 남자는 결코 신의 아들도, 완전무결한 인류의 구세주(메시아)도 아니었다.
그저 이웃을 사랑하고 가엾은 자를 동정했던, 한없이 인간적인 ‘인간’일 뿐이었다.
* * *
약속대로 구울이 된 동족을 무사히 발할라로 보내준 뒤.
시엔 일행은 약속대로 오크들의 배 롱쉽(Longship)을 타고 스카게라크 해협 너머에 있는 천둥망치 클랜의 본거지로 향했다.
그곳에 있는 클랜의 수장, 야를과 대화하기 위해서.
어느덧 시엔 일행이 야를이 있는 막사에 들어서자마자, 그곳에는 예상치 못한 선객이 와 있었다.
“흠, 이것 참.”
마치 처음부터 시엔 일행이 올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이.
“뜻밖의 손님이 오셨네요.”
매끄러운 가죽 재질의 검정 트렌치코트 위로, 핏빛 바탕에 흑색의 갈고리 십자가를 완장으로 찬 제복 차림의 무리였다.
보란 듯이 칠흑의 제복을 차려입고 자신들의 존재를 과시하는 제국 공안.
“설마 이런 누추한 곳에 공화국의 ‘밤을 걷는 자들’께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그러는 제국 측이야말로, 아직 성전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볼일이 많으신 듯하네요.”
“우리는 평화를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에 왔답니다.”
제국 공안, 이단심문관(인퀴지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느님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피를 보는 것보다 평화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서 말이지요.”
“……우리의 신을 저버리고, 네놈들 이교도의 발밑에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평화’란 것이냐.”
바로 그때, 옥좌에 앉아 침묵하고 있던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제국 공안이 대답했다.
“당신들의 신은 가짜입니다.”
“네놈……!”
노골적으로 적의를 감추지 않는 천둥망치 클랜의 오크들 사이에서, 제국 공안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오딘이니 토르니, 아직도 그깟 하찮은 미신 따위를 믿는 겁니까?”
“…….”
“정말로 이 세상에 내리치는 천둥 벼락이 ‘토르’란 신의 작품이라고 믿는 겁니까? 죽은 전사가 정말 ‘발할라’란 곳에 들어가 영원한 싸움을 계속하리라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지옥 같은 곳이네요.”
마치 그들의 유치한 미신을 조롱하듯이.
“뭐, 설령 그쪽의 말이 옳다고 칩시다.”
핏빛 완장 위로 새겨진 칠흑의 십자가를 과시하며 제국 국교회의 인간들이 말을 잇는다.
“그럼 전승대로 라그나로크(신들의 황혼)를 통해 파멸할 운명을 가진 ‘약해빠진 신들’을 무슨 이유로 믿는 겁니까?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해가 되지 않네요.”
그 말에 시엔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 세상 누구보다 광신(狂信)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역설적으로 이성과 합리를 호소하는 모습이 우스워서.
“이제부터는 하고 싶은 말을 잘 골라야 할 것이다, 제국의 이교도여.”
공안의 조롱에 옥좌에 앉은 야를이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왔느냐.”
“개종하십시오.”
제국의 공안 역시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곳에 있는 시엔 일행 앞에서 보란 듯이.
“이미 5대 클랜 중 하나, 미드소마 클랜과 9개의 군소 클랜들이 기쁘게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
“그리고 하느님의 복음에 화답하지 않은 클랜들이 무슨 결말을 맞았는지는, 야를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중에는 미드소마 클랜, 천둥망치 클랜과 마찬가지로 ‘5대 클랜’에 속하는 핏빛 독수리 클랜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다섯 클랜 중 하나가 굴복했고, 그렇지 않은 하나가 멸족했다. 나머지 역시 어떤 형태로든지 결정을 내려야 할 것이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기 있는 이교도 놈들의 피를 오딘께 바쳐라.”
정적 끝에 5대 클랜 중 하나, 천둥망치 부족의 수장이 입을 열었다.
“…….”
“그리고 가서 네놈들의 신에게 전해라.”
스릉.
어느덧 야를의 막사에 있는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신들의 황혼(라그나로크)이 찾아오고 우리의 신들이 모두 파멸할지언정, 네놈들의 신 앞에서 자비를 구걸하는 일 따위는 없을 거라고.”
“확실히 들었습니다.”
그곳에 있는 제국 공안의 숫자는 많지 않다. 그렇다고 적지도 않았다. 충분히 최후의 저항이나 발악을 펼쳐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함께 기도합시다, 형제님들.”
그저 순순히 무릎 꿇고 서로의 손을 잡으며 함께 읊조릴 따름이다.
“거룩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가난한 이웃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병들고 아픈 이웃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촤아악!
평온하게 울려 퍼지는 기도의 소리와 함께, 오크들의 손에 들린 일제히 대검이 휘둘러졌다.
잘린 목이 바닥을 나뒹굴었고, 피가 분수처럼 솟았다.
* * *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을 뵙습니다.”
“공화국의 나이트워커 가문…….”
사태가 종료된 후, 제국 공안들의 시체로 피바다가 된 실내에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우리 클랜의 마을을 지켜내는 데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고 들었다.”
“그런 약속이었으니까요.”
“우리 클랜을 도와준 것, 그리고 핏빛 독수리 클랜의 더럽혀진 명예를 씻겨준 것에 대신해서 감사를 표하지. 그러나…….”
천둥망치 클랜을 이끄는 늙은 야를(부족장), 토르비욘 라그나르손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공화국의 흰둥이들은 절대 공짜로 무엇을 해주는 법이 없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까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 시엔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신과 인간, 어느 쪽이 더 중요합니까?”
“뭐라고?”
뜻밖의 물음에 토르비욘이 의심스러운 듯 되물었다.
“신성 제국은 이곳 스카디 제도에서 당신들 부족의 씨를 모조리 말려버릴 겁니다. 싸워서 어쩔 수 있는 수준이 아니지요.”
“…….”
“그걸 알고도 부족의 미래와 아이들 모두를 포기하며, 그대들의 신과 함께 멸족의 길을 걸을 겁니까?”
“놈들처럼 우리에게 개종을 강요할 셈이냐.”
제국의 공안들과 똑같은 말. 그 말에 다시금 시퍼런 냉기와 살기가 일대를 집어삼켰다.
“딱히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저는 귀하 클랜의 결정을 존중할 겁니다.”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어른에게는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결정할 능력이 있으니까요.”
“─.”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 역시 그 결정에 따라야 합니까?”
시엔이 말했다.
“당신들이 신앙을 고집하는 이상, 제국은 당신들을 절대 명예롭게 ‘발할라’로 보내주지 않을 겁니다.”
그 말에 장내에서 가벼운 동요와 술렁임이 일었다. 당장 5대 클랜 중 하나, 핏빛 독수리 클랜이 무슨 꼴을 당했는지 모를 리도 없다. 그렇기에 당장 5대 클랜 중 하나 미드소마가 고개를 조아렸고, 나머지 역시 비슷할 것이다.
“남자, 여자, 노약자, 어린아이, 모두 가리지 않고 구울로 되살려 평생을 이 동토에서 방황하겠지요. 그럴 각오가 되고 결정을 내린 전사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그렇지 않은 이들이 무슨 잘못이 있어 함께 고통을 짊어져야 합니까?”
“앞으로는 말을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이다, 이교도여.”
토르비욘이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일찍이 제국 공안들 앞에서 그렇게 말했던 것처럼.
“저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로 ‘개종’을 바랍니다.”
그 말에 일찍이 토르비욘을 지키는 고위 오크 전사들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이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 앞에서 쉽게 밀리지 않을 정도의 기백.
어느새 시엔의 곁을 지키는 티아와 비고, 라힘 역시 각자의 전투 태세를 갖춘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공기가 감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정확히는 ‘개종하는 척’을 바라고 있지요.”
“거짓으로 개종을 하란 말이냐.”
“그 대가로 그대들에게 이주할 새로운 땅을 드리죠.”
시엔이 입을 열었다.
“이곳의 얼어붙은 동토가 아니라, 세상의 그 무엇보다 비옥하고 풍요로운 봄볕의 대륙으로.”
딱히 그들을 동정하거나 불쌍히 여겨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우리 가문과 계약을 맺고 개종하는 대가로, 당신들에게 샤를마뉴 왕국의 노르망디(Normandie) 공작령을 손에 넣게 해드릴 겁니다.”
시엔이 말했다.
“그대들 천둥망치 클랜을 비롯해 스카디 제도의 생명 모두를, 우리 공화국의 국민으로 고용해서 말이지요.”
고용된 국민.
그저 이 세상을 손해와 이득, 두 가지 관점으로밖에 보지 않는 공화국 인간의 제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