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96화 (96/200)

96화. 두 개의 눈동자 (2)

“……그대 공화국에 국민으로 고용된들, 무슨 수로 우리에게 타국의 공작령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냐?”

시엔의 말에 천둥망치 클랜의 수장, 토르비욘이 되물었다.

오크 역시 바보가 아니다.

이 세계는 명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명분 없이 땅의 지배자를 자청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하물며 그들이라고 해서 대륙의 정세에 일자무식도 아니다.

“우리 공화국과 그대들 사이에 맺는 계약은 어디까지나 일급 기밀입니다.”

그렇기에 시엔이 대답했다.

“공식적으로 그대들은 우리 공화국이 아니라, 칠왕국 연방의 용병으로 고용되어 대륙을 정벌할 테니까요.”

“…….”

“칠왕국 역시 대륙 진출을 위해 오크 클랜의 전력을 바랄 것이고, 우리가 그 거래를 중재할 겁니다. ─이미 이야기는 되어 있죠.”

“칠왕국의 용병이 되어 활약하는 게, 우리 부족이 샤를마뉴 왕국의 공작령을 손에 넣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용병은 이익에 따라 얼마든지 등을 돌릴 수 있거든요.”

시엔이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칠왕국 연방에 용병으로 고용된 당신들이 노르망디 공작령을 점령하는 시점에서, 우리 가문이 샤를마뉴 왕국에게 「또 하나의 거래」를 제의할 겁니다.”

“설마…….”

“그대들이 칠왕국 연방을 배신하고 샤를마뉴 왕국의 노르망디 공작령에 정착하는 대신, 공식적으로 샤를마뉴 왕국과 왕가를 섬기는 신하가 되는 거죠.”

일개 용병 따위가 아니라, 말 그대로 공작령과 공작의 작위를 하사받은 샤를마뉴 왕국의 진짜 귀족이 되어서.

물론 그 후에는 샤를마뉴 왕국의 신하가 되어 거꾸로 칠왕국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 치르는 가망 없는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희망과 승산이 넘치는 싸움이지요.”

“……샤를마뉴 왕국에 충성하는 동시에 「진짜 충성」을 바치는 것은 너희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란 뜻이군.”

“그렇습니다.”

샤를마뉴 왕국의 봉신을 자처하며 당당하게 공작령을 지배하고, 실질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것은 배후의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다.

“그럼 그때가 됐을 때, 우리가 그대들을 배신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시엔이 담담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가문과의 ‘약속을 깨트린 자’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는, 야를께서도 익히 아실 테니까 말이죠.”

그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 별과 단검의 이름에 걸린 신뢰의 무게다.

“그러나 그대들이 약속을 이행하는 이상, 우리 역시 거래를 이행할 겁니다.”

시엔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어디까지나 ‘천둥망치 클랜’의 이름으로, 야를께서 스카디 제도의 클랜 전부를 규합하고 그대가 직접 대륙의 노르망디 공작이 되는 거죠.”

오크 역시 인간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명예를 부르짖고 신을 찾아도, 결국 인간은 인간에 불과하다.

“거래를 받아들일 경우, 우리 가문은 때가 될 때까지 제국의 손에서 이 땅을 수호할 겁니다.”

“받아들이지 않았을 때는?”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제국의 전력을 암살하고, 패색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짙어질 즈음에는 배를 타고 떠나겠죠.”

“…….”

그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다.

“설령 제의를 수락했다 쳐도,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을 때는 어쩔 셈이지?”

“모험에는 늘 위험이 따르는 법이죠.”

시엔이 짐짓 무심하게 대답했다.

“결정은 야를의 몫입니다.”

알고 있었다.

“저는 그저 거래를 제의했을 따름이고요.”

그들에게 이것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란 것을.

* * *

그로부터 얼마 후.

스카디 제도에 머물며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던 《피의 추기경》 체사레에게 뜻밖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스카디 제도의 ‘천둥망치 클랜’이 태도를 바꿔서 제국 국교회로 개종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한 것이다.

개종 자체는 놀랄 게 없었다. 문제는 그들이 개종을 표하기에 앞서─ 공화국의 ‘밤을 걷는 자들’과 수상쩍은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 또 개종과 더불어 제국이 아니라 공화국과 칠왕국 측과 접촉하며 ‘외부’로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얼어붙은 동토의 바다를 내려다보며, 천년을 살아온 뱀파이어가 싸늘하게 생각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개종은 거짓이다. 그저 자신들의 눈을 속이는 위장에 불과하다.

문제는 그 속임수를 누가 생각했느냐 하는 것이다.

‘누구의 지혜지?’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저 멍청이들이 스스로 저런 지혜를 짜냈을 리가 없다.

‘라일라 나이트워커, 그 여자가……?’

아니다. 그녀는 지혜롭고 위협적이나 기본적으로는 보신주의의 성향이 강하다. 이렇게까지 제국과 충돌하며 스카디 제도의 오크들을 상대로 흉계를 꾸미는 리스크를 굳이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다.

미래의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는 시엔과 달리, 체사레는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천년의 세월을 통해 쌓아 올린 지혜가 있었다.

이 대륙에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나라와 왕들이 나타나고 스러지는 흥망성쇠를 두 눈으로 보아온 역사의 목격자.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눈」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공화국의 ‘누군가’는 체사레의 통찰력에 뒤지지 않는,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는 지혜의 눈을 가지고 미래를 엿보고 있다.

그리고 이곳 스카디 제도에서 활약하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중 하나가 특정되었을 때, 체사레 보르자는 그 눈동자의 정체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이다.’

《호수의 암살자》 시엔 나이트워커.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성장해 제국의 위협이 될 줄이야.’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성장해 제국의 위협으로 거듭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생각 끝에 체사레가 고개를 돌렸다. 그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직함, 제국 교회군 총사령관의 이름으로.

“군의 상륙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령관의 곁을 보좌하는 부관이 대답했다.

“제5신성군단(The 3rd Divine Corps) 예하 3개 「천사병(Angeltrooper) 사단」이 카테가트 해협 부근에 무사히 상륙했습니다.”

“딱 맞춰 왔네요.”

체사레가 흡족스러운 듯 고개를 돌린다.

5대 클랜 중 하나 미드소마 클랜의 야를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중소 클랜의 야를들이 체사레의 발밑에서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어리석은 물고기가 좀 더 많이 그물에 걸리길 기대했는데…….”

명예도 무엇도 찾아볼 수 없이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는 그들을 향해, 체사레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래도 이쯤에서 슬슬 그물을 끌어 올려야겠네요.”

“예, 예……?”

“그, 그게 무슨…….”

당황하는 야를의 동요에 아랑곳하지 않고, 체사레가 곁을 지키는 제국 공안에게 명령했다.

“오크들을 모두 죽이십시오. 그리고 카테가트 해협에 상륙한 교회군에게도 같은 명령을 내리십시오.”

이 땅에 사는 오크들의 씨를 말려라.

“약속이 다르지 않소!”

“우, 우리는 개종을 하지 않았습니까!”

미드소마 클랜의 야를이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 말에 체사레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글쎄, 당신들이 정말 개종을 했는지 그저 개종하는 척을 했을지, 우리가 무슨 수로 알겠습니까?”

“그, 그럼…….”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답을 알고 계실 테지요.”

체사레가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께 판단을 맡깁시다.”

그 말에 제국 공안 역시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니까.

“전부 죽여라(Caedite eos).”

“……!”

“주님께서 그의 백성을 가려낼 것이니(Novit enim Dominus qui sunt eius).”

야를과 휘하의 오크들이 당황할 틈도 없이, 체사레가 손가락을 튕겼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고, 마찬가지로 지상 역시 피바다로 물들었다.

뒤늦게 오크들이 저항을 시작했으나 아무 의미도 없었다.

곳곳에서 신의 자비를 부르짖거나, 뒤늦게 오딘과 발할라를 부르짖는 오크들의 죽음을 뒤로하고 체사레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다.

애초에 제국 국교회는 이 땅의 오크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으니까.

계획적 종족 말살, 제노사이드.

‘수고스럽게 됐군.’

개종은 그저 그들을 손쉽게 몰아넣고 일망타진하기 위해 풀어놓은 그물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그물이 지금 막 시엔의 손에 찢어졌다.

‘그 애송이는 위험하다.’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싹을 틔우고 직접적으로 제국에 타격을 입혀올 줄이야.

‘아니, 아직 싹을 자르기에 늦지 않았다.’

오히려 대륙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 얼어붙은 땅이야말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눈과 귀로부터 가장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절호의 장소니까.

훗날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 비로소 《천년공(千年公)》 체사레가 직접 움직일 때였다.

* * *

시엔 나이트워커와 체사레 보르자.

잘못된 미래를 아는 눈과 천년의 과거를 통해 미래를 보는 눈.

두 개의 눈동자가 서로를 향해 각자의 수를 펼치고 나서, 얼마 후.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이 있는 막사.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카테가트 해협에 상륙한 제국군이 눈에 띄는 오크 클랜 모두를 몰살하며 움직이고 있습니다.”

“…….”

“개종이나 신앙의 여부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심지어 아이와 노약자를 가리지 않고 일족들을 모두 학살하고 있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시엔조차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

제국이 설마 이렇게나 빨리, 과격하게 움직일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역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나.”

옥좌에 앉은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 토르비욘 라그나르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자책할 필요 없네. 어차피 놈들은 처음부터 우리를 살려둘 생각이 없었을 테니까.”

“…….”

“늦든 이르든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지.”

토르비욘의 말에 시엔이 나지막이 입술을 깨물었다.

“모처럼 그대 가문이 준 제의도 아무 의미가 없는 공론(空論)이 되어버렸군.”

그들에게 대륙의 새로운 터전을 주겠다는 약속.

시엔 역시 부정하지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애초에 시엔의 계획은 오크 부족을 규합해 유의미할 정도의 전력이 모일 때 이야기다. 지금처럼 제국이 눈에 보이는 오크를 모조리 쓸어버리는 시점에서는 계획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제국의 ‘누군가’가 시엔의 노림수를 정확히 읽고 선수를 친 것이다.

“카테가트 해협에 상륙한 제국군이 이곳 스카게라크 해협 쪽까지 이동하는 데는 시일이 걸릴 겁니다.”

그렇기에 시엔이 말했다.

“남아 있는 오크 부족들을 규합해 전투 태세를 갖추십시오.”

신성 제국이 이빨을 드러내고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는 시점에서, 남아 있는 오크 클랜을 규합하는 일 자체는 어렵지 않다.

문제는 지금처럼 제국이 일방적으로 무차별 학살을 자행하는 이상, 그렇게 규합하고 긁어모은 전력이 시엔이나 공화국 측에서도 그렇게 의미가 있지 않을 거란 점.

“그다음에는─.”

그렇기에 시엔이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최적의 수를 짜내는 와중, 침묵하고 있던 야를이 입을 열었다.

“자네들은 충분히 많은 것을 해주었네.”

시엔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토르비욘이 말했다.

“그대들이 우리에게 제의해준 내용이 결코 공짜가 아니라 해도, 그것은 충분히 명예와 존중을 아는 자의 거래였지. 설령 그것이 결과적으로 비극을 앞당기는 계기가 됐을지라도 말이야.”

“─.”

그 누구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긍지 높은 오크들의 수장이 말했다.

“자네들이 보여준 호의에 깊은 감사를 표하지.”

“그래도…….”

“이 싸움은 이제 우리의 싸움이라네.”

천둥망치 클랜의 수장, 토르비욘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부족의 명예가 걸린 싸움에 외부자에 지나지 않는 자네들이 개입할 여지는 없다네.”

“…….”

“더 늦기 전에 배를 타고 돌아가게나.”

토르비욘이 말했다. 그 말에 시엔이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말이 옳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더 이상 공화국과 그들 가문이 손에 넣을 이득은 없다. 그리고 세상을 이득과 손해로밖에 보지 않는 그들로서는, 지금이 물러나야 할 적기다.

“……그것이 그대들의 결정입니까?”

“그렇다네.”

야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있는 오크 전사들 역시 다르지 않다. 아마 천둥망치 클랜 모두가 같은 생각이겠지.

“알겠습니다.”

시엔 역시 달리 결정의 여지가 없었다.

“우리는 배를 타고 돌아갈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시엔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아니다.

“부족들을 규합하고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싸우십시오. 우리 역시 함께 싸울 겁니다. 그사이에 장거리 항해를 할 수 있는 함대를 모으고─.”

시엔이 말을 잇는다.

“아이들을 태우십시오.”

어른에게는 자기 의지로 미래를 결정할 능력이 있다. 그 결정은 존중해야 마땅하다. 아이들은 아니다.

“아직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결정할 수 없는 이들을.”

그 의미를 헤아린 토르비욘과 오크들이 나직이 숨을 삼켰다.

“그 아이들이 훗날 자라나서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결정할 때가 되었을 때, 저는 기꺼이 그들의 결정을 존중할 겁니다.”

그들 부족의 미래와 희망을 짊어질 아이들을 방주(方舟)에 태운다.

“어머니와 아이를 무사히 공화국으로 망명시켜, 그들이 살 수 있는 터전과 미래를 약속하지요.”

시엔이 말했다.

당초 오크 클랜을 규합해 노르망디 공작령을 손에 넣겠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숫자가 너무나도 적어진 까닭에, 아무리 비좁은 공화국의 영토라 해도 그들을 수용하기에 충분할 테니까.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우리가 그대 일족의 미래가 되어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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