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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97화 (97/200)

97화. 마지막 황혼의 전투 (1)

그날 새벽.

“대체 무슨 생각이야, 시엔?”

스카디 제도의 시린 냉기 속에서 형 비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답지 않아.”

“뭐가?”

“이 이상 여기 있어 봐야 우리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어.”

“글쎄.”

“얼마 되지도 않는 오크 부족의 여자와 아이들을 받는다고 해서, 우리 가문과 공화국에 의미 있는 이득이 되리라 생각해?”

얼어붙은 빙하 절벽 아래 펼쳐진 밤바다를 내려다보며 시엔이 침묵했다. 그 침묵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비고가 말을 잇는다.

“설령 있다고 쳐도 이 정도까지 리스크를 감수할 정도는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신성군단과 ‘천사병 사단’을 상대하는 이상, 제국과 교회 놈들에게 꼬투리를 잡힐 빌미밖에 주지 않겠지.”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그랬어?”

바다를 내려다보는 시엔의 뒤에서 형 비고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었다.

“저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시엔.”

누구보다도 어엿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으로서 내뱉는 차가운 목소리.

“그래, 아무것도 아니지.”

시엔 역시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째서 저들을 위해 싸우려는 거야?”

“약속했으니까.”

시엔이 말했다. 시시한 감상이나 감정에 젖은 목소리가 아니라, 마찬가지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자 그들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로서.

“신뢰는 우리 가문이 쌓아 올린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이야, 형.”

“그 정도는 나도 알아, 시엔.”

비고의 차가운 대답에 시엔이 말을 잇는다.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다고 해서 순순히 포기하고 물러나는 것은 우리 가문의 신뢰를 잃는 짓이지.”

“누구에게 잃는데?”

비고가 되물었다.

“신성 제국은 이 땅의 오크를 남김없이 쓸어버릴 거고, 우리가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과 대화를 나눴던 사실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어.”

“보는 눈이 없다고 해서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그들은 이미 약속을 지킬 능력을 잃었어.”

비고가 대답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파기했다고 해서 무너질 정도로 우리 가문의 ‘신뢰’는 허술하지 않아.”

“그렇겠지.”

비고의 말에 시엔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이미 5대 클랜 중 핏빛 독수리, 미드소마 클랜이 멸망했다. 나머지 군소 부족도 마찬가지고, 카테가트 해협에 상륙한 교회군을 비롯해 체사레 역시 남은 오크들이 규합하는 것을 순순히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욱 지킬 필요가 있는 거야.”

“뭐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엔이 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가문은 신뢰를 지키고 약속을 깨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보여줄 테니까.”

“누구에게?”

“이 땅의 생존자들에게.”

시엔이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의 적들에게.”

* * *

“교회군이 카테가트 해협 일대의 요충지를 점령하고 부족들의 피난과 합류를 막는 동시에, 주력 사단이 스카게라크 해협을 지나 빠르게 북진하고 있습니다.”

흑색 로브로 전신을 가린 채, 적진에서 가장 위험한 정찰을 마치고 돌아온 병사가 말했다.

“사실상 스카디 제도의 이곳 북서부 일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국의 손에 들어가 있는 셈이에요.”

병사가 후드를 벗자, 그 밑으로 수정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수고했어, 티아.”

“대부님의 명령이니까요.”

시엔의 대녀이자 나이트워커 가문의 어린 암살자. 그녀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지켜져야 할 가족이 아니었다.

“게다가 죽은 오크들을 구울로 되살려, 숨어 있거나 잔존해 있는 이들 하나까지 남김없이 색출해서 절멸하는 방침을 취하고 있고요.”

“야를이여, 지금 상황에서 합류를 마친 부족의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티아의 말을 듣고 시엔이 천둥망치 클랜의 수장에게 물었다.

“보다시피 5대 클랜 중 「새벽 어스름」 클랜이 무사히 합류했고, 그 외에 합친 군소 부족들의 수를 모두 합쳐도 몇만 명 정도네. 거기에 방주에 태울 여자와 아이 및 최소한의 전사들을 제할 경우, 실제로 싸울 전력은 3할도 채 남지 않겠지.”

옥좌에 앉은 천둥망치 클랜의 수장, 토르비욘 라그나르손이 대답했다.

“우리 말고는 이 이상 합류할 동족들도 없다는 뜻인가.”

마찬가지로 그와 뜻을 합치고 합류한 5대 클랜 새벽 어스름의 수장과 함께.

“……신들보다 먼저 우리의 황혼을 맞이할 줄이야.”

새벽 어스름의 야를이자 노장, 나아가 황혼 문지기의 이명을 가진 스벤이 쓴웃음을 지었다.

“토르비욘, 자네가 보기에는 이 계획이 성공할 것 같나?”

“알 수 없네.”

옛 친구를 대하는 것 같은 말투에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신에게 기도할 뿐이지.”

그들의 신에게.

“여자와 아이들을 가득 태우고 북해를 넘어 장거리 항해라니.”

게다가 배는 그냥 저절로 움직이는 게 아니다. 설령 아무리 바람의 힘을 빌려 물 위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롱쉽이라 해도 숙련된 노잡이는 필요하니까.

도중에 공화국 함대와 접촉해 보급받는 것을 전제로 고려해도 절대 쉬운 항해는 아니다.

“배에 태울 남자 중에서는 늙고 경험 많은 자들과 가장 젊고 혈기 넘치는 전사들을 꾸려 배에 태울 것이네.”

늙고 경험 많은 자들은 배 위에서 나아갈 길을 알려주고, 땅 위에 정착한 뒤에도 그들 부족의 지혜와 전통을 계승해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차피 남아봐야 제대로 된 전력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젊고 혈기 넘치는 전사들은 여자와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미래를 위해 지켜야 할 희망이다.

“그 외에는 모두가 싸우겠지.”

그래서 그들을 태우고 그 이외에는 태우지 않는다.

방주에 타지 못하는 나머지는, 그들이 항해의 준비를 마치고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남아 죽음을 각오하고 싸울 것이다.

“우리는 이 땅의 마지막 어스름이 될 것이네.”

천둥망치 클랜의 수장, 토르비욘 라그나르손이 말했다.

“그리고 황혼과 함께 우리들의 빛이 스러질 때, 새로운 여명이 떠오르겠지.”

“늙은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듯 말인가?”

“그렇다네.”

“하!”

그 대답에 ‘새벽 어스름 클랜’의 야를이자 황혼 문지기란 이명을 가진 스벤이 소리 내어 웃었다.

“황혼은 지기 전에 가장 붉게 빛나는 법이지.”

늙고 초라하며 힘없어 보이는 노구에 어울리지 않는 서슬 퍼런 미소를 지으며.

“우리의 신들께서 내려주신 이 땅에, 적들의 피로 마지막 축배를 들어야겠군.”

“세상에서 가장 붉은 황혼의 축배가 되겠군.”

「마지막 황혼의 전투」.

신들의 황혼이 아니다. 그저 동녘 하늘 너머의 새로운 여명을 위해 싸우는, 늙은 전사들의 황혼이었다.

* * *

그 후 몇 개의 해가 서녘 하늘 너머로 저물고, 비로소 최후의 황혼이 찾아왔다.

결전의 날.

전투 당일.

일족의 미래와 최후의 전투를 위해 힘을 합친 오크 클랜이 결집해 진을 친 발퀴리아(Valkyrja) 협곡.

오크 전사가 죽을 때 그의 영혼(Einheri)을 발할라로 데려다준다는 전쟁의 처녀, 발키리의 이름으로 불리는 협곡. 이 협곡은 천혜의 요새 이상의 명성을 자랑하는 난공불락의 지역이었다.

동쪽에는 90도에 가까운 경사의 깎아지를 듯한 산맥, 서쪽에는 북해의 바다, 심지어 협곡 내부를 향해서 이어지는 평지의 전선(戰線)은 고작 수백 미터 넓이에 불과하며, 그마저 깊이 들어갈수록 높아지는 구릉 형태의 고저 차이를 갖는다.

그렇기에 그곳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오크를 보며 교회군 총사령관, 체사레 보르자가 생각했다.

‘낭패로군.’

교회군 입장에서도 이 지역 외에 달리 통과할 지역이 없고, 동시에 다수 사단이 스카디 제도에 머무는 이상 보급 문제로 함대를 우회하거나 뒤를 칠 여유도 없다.

무엇보다 신성 로마누스 제국에게는 이 스카디 제도 일대의 빙하와 암초 사이를 미끄러져 뒤쪽으로 대규모 병력을 우회할 정도의 항해술이 없었다.

‘그물을 너무 빨리 거두었나?’

개종을 미끼로 가짜 평화를 강요하던 체사레가 시엔의 노림수를 읽고 그물을 올리자마자, 제도 전역의 오크들이 결사 항전의 태세로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다고 오크들을 이대로 살려둘 수도 없었다. 이미 시엔 나이트워커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그에게는 이미 천둥망치 클랜, 나아가 스카디 제도의 오크 전부를 규합할 ‘카드’가 있었으니까.

오히려 이 상태로 놔뒀다가는 그물 속에 걸려 있는 물고기마저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죽였다. 달라질 것은 없다.

“때가 되었습니다, 형제님들.”

대형과 전선을 갖추고 협곡 앞에 진을 친 오크에 맞서, 그들이 쌓은 저지선(沮止線)을 뚫기 위해 교회군 총사령관 체사레가 입을 열었다.

제5신성군단 예하 3개 사단 중 하나이자 5신성군단의 최고 전력으로 손꼽히는 「제66 천사병 사단(The 66th Angeltrooper Division)」에게.

천사병.

그들에게는 복잡한 명령이나 작전도 무엇도 필요하지 않았다.

교회군의 핵심이라 불리는 천사병에게 내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딱 하나의 말이었다.

“전군, 강림(降臨).”

그 명령을 내린 뒤에는, 천사가 된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조차 없을 테니까.

* * *

전날 밤.

마지막 황혼의 전투를 앞두고 오크 부족들이 집결해 있는 발퀴리아 협곡의 야영지.

인간은 나약하다. 오크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애초에 그들도 인간이니까.

아무리 죽고 나서 발할라에 들어가니 뭐니 떠들어도, 아무리 광신에 차 있어도, 인간이 가지는 나약함과 죽음의 공포 자체를 오롯이 극복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최후의 전투를 앞둔 전야제(前夜祭).

아무리 패색이 짙은 전투라 해도 활기를 띠고 술잔을 나눠야 할 오크들 사이에서는, 그저 얼어붙은 침묵과 정적이 감돌 따름이었다.

천둥망치 클랜의 전사이자 최전선에서 방패 벽을 담당하는 명예로운 맷돼지 전사 ‘군힐드’의 손도 희미하게 떨렸다.

“두려운가?”

“!”

바로 그때,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곳에서 방진을 지켜야 할 전사 모두를 향해 천둥 벼락처럼 울려 퍼지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천둥망치 클랜의 수장, 뇌광(雷光)의 토르비욘 라그나르손.

“두려울 것이다.”

바로 그 남자가 말했다.

“제국의 이교도 놈들은 우리가 죽은 뒤에 명예롭게 ‘발할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해주지 않고, 구울로 되살려 이 동토를 방황하게 할 테지.”

세상에 죽음을 겁내지 않는 자는 없다. 그러나 그들이 죽음을 겁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확신이 있는 까닭이다.

“발할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두려운가?”

자신이 명예롭게 죽어 저 하늘 위 오딘의 궁전(발할라)에 갈 수 있다는 확신.

“두, 두렵습니다.”

겁쟁이 하나가 공포를 참지 못하고 대답했다.

“그렇다. 내일, 우리는 그 누구도 발할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토르비욘이 달리 부정하지 않고 말했다.

설마 하는 걱정이 현실이 되는 그때, 형용할 수 없는 절망에 군힐드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 * *

이튿날, 서녘 하늘 너머로 스러지는 황혼과 함께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 누구도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절망의 전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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