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99화 (99/200)

99화. 마지막 황혼의 전투 (3)

거머리처럼 쭉 늘어난 환형동물의 대가리 사이, 수천 겹의 이빨이 줄지어 침을 질질 떨어뜨리는 아가리를 가진 ‘천사’들이 진격하고 있는 와중.

그들 속에서 순백의 모피를 걸친 귀공자가 담담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의 존재를 보자마자, 앞에서 방패 벽을 세워 올리고 있던 오크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얼어붙었다.

“아, 이래서 ‘인간’ 따위는 질색이라니까.”

오직 인간밖에 가질 수 없는 강철의 의지, 심지어 사도급 천사의 아리아 앞에서조차 결코 무너지지 않은 불굴의 의지를 눈앞에 두고.

신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왔고, 시조 카산과 그의 암살자 교단이 공화국에 고용되는 역사적 순간을 지켜봤고, 헤아릴 수 없는 나라와 지배자의 흥망성쇠를 보아온 역사의 목격자.

《천년공》 체사레가 나지막이 팔을 뻗었다.

그가 평생에 걸쳐 손에 넣으려 발버둥 쳤고, 그때마다 ‘운명의 장난’처럼 공교롭게 그의 손끝을 빠져나온 바로 그 신기의 힘을.

운명의 창.

창이라는 이름과 다르게 이 아티팩트는 알기 쉬운 무기가 아니다.

「운명을 바꾸는 힘」을 가진 부적이다.

패색이 너무나 짙어 도무지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의 운명, 일류 암살자의 표적이 되어서 꼼짝없이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할 운명.

심지어 ‘불사의 존재는 인간처럼 성장할 수 없다’는 저주 같은 운명도 극복할 수 있는 신기의 편린.

“너희는…… 운명을 극복할 수 없다.”

중얼거림과 동시에, 체사레가 딛고 있는 발밑을 중심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이형의 기류가 휘몰아쳤다.

제66 천사병 사단에 맞서 방패 벽을 세운 오크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과 진동에 몸서리쳤다.

쿵.

쿵, 쿵, 쿵.

오크들이 지키고 있는 최후의 저지선, 90도에 가까운 경사의 깎아지를 듯한 빙하 산맥과 바다로 지켜지는 천혜의 요새, 발퀴리아 협곡.

쿵!

바로 그 요새가 무너지는 소리였다.

“아, 아아……!”

그들을 지켜줘야 할 산맥의 빙하가 무너져 내리고, 눈과 얼음 등 급사면(急斜面)의 퇴적물이 모조리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빙하 산맥이 무너지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어도, 아무리 인간의 찬가를 부르짖어도, 이 세상은 의지 하나로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호락호락하지 않다.

화산 폭발, 천둥, 지진, 해일, 당장 자연이 내리는 분노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벌벌 떨며 그것들을 신이라 숭배하고 고개를 조아리는 게 인간이다.

쿠구궁, 쿵!

가파르게 무너지며 쏟아지는 눈과 빙하들이 오크들의 방진 위를 집어삼켰다. 그 앞에서는 제아무리 오러의 공명이니 방패 벽이니, 모두 하찮고 덧없는 발버둥에 불과하다.

“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마치 천사들의 군세 사이에서, 마치 신과 같은 전능함을 행사하는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오지만디아스(Ozymandias).”

바로 그때였다.

태산을 무너뜨리고 빙하를 붕괴시키던 신의 전능함이 일순 멈춘다.

“흠, 이것 참.”

“그 시의 다음 구절을 알고 있나, 체사레?”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네(Nothing beside remains).”

체사레가 담담히 말을 잇는다.

“무너져 닳아버린 거대한 조각의 곁에는, 황량하고 외로운 모래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Round the decay

Of that colossal wreck, boundless and bare

The lone and level sands stretch far away.

굶주림과 허기를 채우기 위해 끝없이 쇄도하는 천사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체사레를 마주하고 있는 실루엣이 있었다.

칠흑의 후드 밑으로 1위계 그림자 마법 「섀도우 페이스」로 얼굴을 가렸으나, 그 정체를 못 알아볼 리가 없다.

“이렇게 보게 돼서 기쁘네요, 시엔 나이트워커.”

호수의 암살자, 시엔 나이트워커가 그곳에 있었다.

동시에 끝없는 굶주림과 기아에 시달리는 천사들 중 누구도, 그곳에 있는 시엔의 존재를 신경 쓰지 않는다.

마치 그곳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 * *

쿠궁, 쿵!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오크들의 방진을 무너뜨린 것은 의지의 나약함도 천사의 군세도 아니었다.

부서진 빙하와 눈이 무너져 내려 오크와 천사들을 가리지 않고 집어삼켰고, 방어선의 끄트머리가 그대로 붕괴했다. 이윽고 방패 벽과 대형이 무너지고 동요가 휘몰아치는 순간, 그들을 결속하고 있던 오러의 결속도 희미해진다.

─ 키이이이익!

굶주린 천사들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전열을 교체해라! 물러나서 방어 대형을 재정비하라!”

전선의 지휘관이 목청이 터질 것처럼 소리를 높였고, 휘몰아치는 눈사태와 무너져 내린 빙벽에 가로막혀 우왕좌왕하는 사이.

“당황하지 마라, 전우들이여!”

콰앙!

남자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그들 앞을 가로막는 커다란 빙벽을 일격에 깨부수고, 심지어 부서진 빙벽 조각들이 휘몰아치며 쇄도하는 천사들을 향해 내리꽂혔다.

“전우들의 뜨거운 하트, 이 졸자의 가슴에 확실하게 새겨졌으니!”

「버서커」 라힘 나이트워커가 광분하듯 소리쳤다.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해 물러나는 전사들을 등지고, 그 사이 누구도 지나가게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하트가 요동치고 주먹이 울부짖는다!”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주먹이 내리꽂혔다. 그때마다 천사의 몸이 마치 내부에서 폭발하듯 산산조각이 나며 터지고, 육편(肉片)이 사방에 흩어졌다.

스릉.

그 순간, 라힘의 불타는 심장마저 얼어붙을 것 같은 시린 냉기가 쇄도했다.

카앙!

천사들의 무리가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천사병과 같은 알기 쉬운 괴물의 몰골이 아니다.

철가면을 쓰고, 갑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는 강철의 천사였다.

손에는 찬란한 휘광을 흩뿌리는 빛의 검이 들려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해 저것은 무장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날갯죽지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전신에 쇠사슬과 강철판을 덧씌우고 살갗 위에 강철못을 박아서 고정하고 있었으니까.

마치 육체를 가둔 강철의 감옥처럼.

천사의 전신을 덧씌운 강철판 밑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철로 뒤덮여 있는 날개, 팔, 얼굴, 철가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얼굴 전체를 가린 철가면은 눈동자가 있어야 할 곳과 귓구멍, 심지어 관자놀이에서 머리뼈의 내부로 강철의 대못을 박아 고정해둔 채였다.

하품의 8품, 대천사(大天使)─.

* * *

그 시각, 또 하나의 전선.

시린 냉기가 내달리며 티아가 땅을 박찼고, 그녀의 주위에서 시린 죽음의 거미줄이 춤을 춘다.

촤아악!

죽음의 거미줄에 천사들의 육체가 갈가리 찢어졌고, 피와 살점이 후두둑 떨어지기 무섭게 새로운 천사들의 군세가 쇄도했다.

라힘과 마찬가지로 강철판으로 못을 박아 감옥처럼 전신을 덧씌운 철가면의 천사였다.

“대천사야. 상대법은 알고 있지?”

“물론이지, 비고 오빠.”

티아가 미소를 지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오히려 잘 됐지.”

“뭐가?”

“라힘 삼촌이 귀찮게 굴어준 덕분에, 밤낮으로 수련한 3식의 극의를 제대로 펼칠 기회가 됐으니까.”

시엔의 불꽃, 린의 얼음 호수.

명경지수는 그 자체로 구체화된 기술이나 오의가 없다. 그저 마음 그 자체다.

그렇기에 티아의 마음 역시, 귀찮을 정도로 뜨겁게 달라붙는 바보 삼촌 덕분에 그 나름의 답을 찾은 뒤였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야.”

티아가 속삭였다.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더없이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서.

“그리고 그 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훗날의 티아에게 《흑조(Black Swan)》란 이명을 내려줄 3식의 극의.

“가족을 위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

감히 밑바닥을 알 수 없는, 검고 어두운 심연(深淵)의 마음을 가진 티아가 속삭였다.

“설령 그 어떤 죄와 악을 범하게 될지라도, 기꺼이.”

비고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의 감정 없는 목소리로.

* * *

일방적으로 오크들의 우세로 보였던 전장은, 남자가 펼친 신의 전능함 속에 어느덧 교회군의 우세로 접어들고 있었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체사레가 즐거운 듯이 말을 잇는다.

“인간의 찬가가,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속에 무너지는 모습이.”

“글쎄, 내 알 바는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

시엔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흠, 그런 것치고는 꽤나 저 인간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체사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직후 그의 송곳이 차가운 서슬을 흩뿌렸고, 그 자리에 있던 신형(身形)이 사라졌다.

8식 달그림자의 자세를 구사하는 어지간한 가문의 마스터조차 압도하는 신속.

깨닫고 보니 시엔의 등 뒤에서 체사레의 날카로운 손톱이 휘둘러졌다.

일전에 싸웠던 어중이떠중이 뱀파이어들의 혈조가 아니다.

대륙 전체 통틀어 그 수가 손가락 하나에 꼽히는 최고위 뱀파이어, 엘더 원(Elder One)─.

카앙!

휘둘러지는 핏빛의 서슬 앞에서 시엔이 왕 시해자로 맞받아친 순간, 딛고 있는 발밑이 움푹 꺼질 정도의 터무니없는 무게가 엄습했다.

그에 맞서 시엔이 전신의 오러를 폭발하듯 끌어내며 힘겨루기를 지속하자, 체사레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저 역시, 인간이었던 시절이 있었지요.”

천년 전, 신의 아들이 죽는 순간 몰락했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제국의 마지막 황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그런데 이제는 도무지 ‘인간’이란 존재를 이해할 수가 없네요.”

바로 그 남자가 되물었다.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저 인간들은 대체 뭐기에 저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싸우는 걸까요?”

역설적으로 교회의 인간들이 오크라 부르며 멸시하고 손가락질하는 그들을, 눈앞의 남자는 ‘인간’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이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괴물 놈들의 군세 앞에서 도대체 뭘 지키기 위해 저렇게 싸우는 거죠?”

동시에 교회에서 주장하는 천사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괴물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았다.

“가족을 위해서.”

“아, 가족이라.”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저에게는 가족이 없어서 말이지요.”

여유롭게 거리를 벌린 체사레가 웃는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당신이 그렇게 싫지 않습니다, 시엔.”

동시에 그의 얼굴에 깃든 웃음기가 사라진다.

“그런데 좋은 친구가 되기에─, 네놈은 이미 내게서 너무 많은 것들을 앗아갔지.”

후우웅!

시엔의 품에 깃든 운명의 창이, 그 어느 때와 비할 바 없이 요동치고 있다. 아마 체사레의 품에 깃든 운명의 창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운명의 창은 체사레 쪽의 지분(持分)이 압도적으로 높다.’

그리고 그 창의 지분 100%를 완성하기 위해 눈앞의 뱀파이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마치 탐욕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처럼─.

“엉엉 울며 엄마를 부르짖어도 소용없는 짓이란다, 아이야.”

체사레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여기는 너를 지켜줄 엄마도 형제자매들도 없으니까 말이지.”

촤아악!

어느덧 그의 어깨뼈를 찢고 튀어나온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시엔 나이트워커.”

도무지 교회의 추기경에 어울리지 않는, 검고 어두운 악마의 날개였다.

그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핏빛의 기류가, 어느덧 핏빛의 검으로 거듭나 남자의 손에 들린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마치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입에 담아야 마땅할, 저주와 같은 언령(言靈)을 입에 담으며.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시엔의 존재를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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