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00화 (100/200)

100화. 신기의 주인들 (1)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체사레의 말과 함께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시엔의 존재를 집어삼켰다.

이게 바로 ‘운명의 창’이 가진 힘이다.

온 세상이 자신의 죽음을 바라고, 이 세계가 시엔의 죽음을 기도하는 것 같은 위화감. 그저 재수가 없고 불길하고 운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이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 그의 죽음을 바라고 있었다.

시엔이 차갑게 웃었다.

‘그때도 그랬지.’

시엔이 운명의 창의 파편 하나 손에 넣지 못했던 시절, 심지어 지금 체사레가 보유하고 있는 지분 그 이상으로 ‘완전에 가까운 운명의 창’을 가졌던 당시, 그 시절의 시엔을 휘감는 절망과 비슷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내 운명은 네놈이나 신기 따위가 결정 짓는 게 아니다, 체사레.”

어느새 시엔의 존재를 집어삼킬 것 같은 업화(業火)가 타올랐다.

그저 열정이니 뜨거운 가슴이니, 그런 말로 형용할 수 있는 영역조차 아니었다.

말 그대로 시엔의 존재를 잿더미로 불사르는 듯한 지옥의 불꽃 그 자체였다.

그에 맞서 검고 어두운 악마의 날개를 펼친 체사레가 팔을 뻗었다.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지요.”

손끝에서 휘몰아치는 피와 어둠을 뒤로하고, 체사레가 대답했다.

“내 운명은 네놈이나 세계 따위가 결정 짓는 게 아니다, 어리석은 필멸자야.”

타앙!

손톱 사이에서 튀어나온 핏방울 하나가 쇄도했다.

볼트 마법이나 쇠뇌 화살 따위와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력과 속도.

심지어 미래의 지식을 가진 시엔이 훗날 목격하게 될 최신 병기이자 전장식 화기─ 머스킷 라이플의 ‘흑색 화약’으로 이뤄진 탄환보다 빠르고 강력했다.

가까스로 피하며 시엔의 뺨에 핏줄기를 긋고, 거기서 그치지 않고 시엔의 등 뒤에 펼쳐진 전선 일대의 무엇도 놈이 쏜 ‘피의 총알’을 가로막지 못했다.

“블러드 볼트(Blood Bolt)…….”

저것은 엄청나게 터무니없는 기교를 요구하는 최고위 마법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혈마법의 기본이라 부를 수 있는 최하급 마법, 블러드 볼트에 불과하다.

“불사의 역설에 가로막혀 지옥 같은 천년의 삶을 살아오는 와중에도, 배우는 것이 아주 없지는 않더라고요.”

체사레가 차가운 목소리로 웃었다.

“아무리 거창한 기교나 기술을 갈고닦아도, 결국에 승리하는 것은 기본이란 사실이죠.”

물론 천년을 살아온 체사레 정도의 최고위 뱀파이어가 초위계 마법이나 최고급 기술을 쓰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러나 굳이 그러지 않는다. 그게 천년의 삶 속에서 손에 넣은 지혜였으니까.

아무리 힘 있고 강대하다 일컬어지는 당대 제일의 최강자도, 잠든 사이 암살자의 칼날에 목이 그어지거나 독을 마시고 죽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끝없이 보아왔다.

그게 인간이다.

“인간을 죽이는 데는, 평범히 칼을 찌르거나 볼트 마법을 처박는 것으로 지나치게 충분하니까 말이죠.”

타앗!

칠흑의 날개를 펼치고 쇄도하며 체사레의 손에 들린 혈검이 휘둘러졌다.

‘!’

특별할 것도 무엇도 없다. 그저 힘과 속도, 전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일체의 ‘기본기’에서 압도할 뿐이다.

‘……!’

그렇기에 끝없이 흩뿌려지는 핏빛의 탄환, 날개를 펼치며 진짜로 날아올라 쇄도하는 움직임, 휘둘러지는 혈검와 무게, 그 앞에서 압도된 시엔이 깨달았다.

‘그때와 다르다.’

훗날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된 시엔과 맞섰을 때의 체사레와 다르다.

시엔이 기억하는 체사레는 펼칠 수 있는 초위계 마법과 온갖 비기를 과시하며 압도하는 ‘괴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체사레는 그렇지 않다. 그가 자랑하는 온갖 비기들을 드러내지 않고, 심지어 거기에 의존조차 하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검 하나으로 싸우고 있다.

무심코, 대륙의 최강자로 손꼽히는 두 강자가 겹친다.

「왕의 자세」를 구사하며 철저하게 힘과 폭력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칠왕국의 최강자, 아서왕.

「순수의 자세」를 구사하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정확도와 기교를 펼치는 샤를마뉴 왕국의 최강자, 롤랑 경.

그들 최강자가 구사하는 검의 묘리를 하나로 합쳐 펼치고 있는 체사레의 검.

─압도적이었다.

지금의 시엔조차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없다. 믿음이고 나발이고 공격을 거듭할 때마다 상처를 입고 피해가 누적되는 것은 시엔 쪽이다.

촤아악!

휘둘러질 때마다 어깻죽지가 찢어지고, 허벅지가 찢어져 피를 흘렸다.

그의 말마따나, 시엔 나이트워커가 정말로 여기서 죽게 될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없이 맞부딪치는 혈투 속에서 시엔의 몸에 상처가 깊어지고 쏘아지는 피의 총알에 구멍이 뚫린다.

“커헉!”

깨달을 수 있었다.

‘운명이…… 달라졌다.’

불사의 역설 앞에 가로막혀 정체돼야 할 체사레가, 교회가 가진 운명의 창의 지분을 손에 넣고 나서 훨씬 더 일찍 역설을 극복했음을.

어떻게 해야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는 인간처럼 강해질 수 있는지.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눈앞의 저 괴물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 가까운 존재였다.

피의 검이 휘둘러지고 핏빛의 탄환이 쏟아질 때마다 시엔의 상처가 깊어졌다.

깨닫고 보니 발밑에는 어느덧 혈해가 흐르고 있었다.

‘…….’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저 존재는 더 이상 불사의 역설에 가로막혀 정체된 괴물이 아니라, 지금 시엔과 마찬가지로 하루가 멀다고 성장하는 ‘인간’이란 사실을.

“그나저나, 요즘 대륙에는 재미있는 놀이가 유행하는 듯하더군요.”

시엔을 압도하며 체사레가 느긋하게 말을 잇는다.

“저도 그래서 그 유행에 좀 따라보기로 했죠.”

손에 쥐고 있는 혈검의 칼자루를 고쳐 잡으며.

“「불멸자의 자세(Immortal Stance)─.」”

“!”

나지막이 읊조리기 무섭게, 일대의 공기가 뒤틀린다. 이내 깨달았다.

시엔 나이트워커는 이 자리에서 죽는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시엔의 존재를 사슬처럼 옭아매고 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저 괴물을 상대로는, 시엔이 가진 능력 전부를 끌어내도 결코 승리할 수 없다.

뇌안과 함께 제비반전술을 써도 시엔의 움직임은 훗날 전성기 시절의 7할에 불과하다. 그마저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움직임뿐.

그 정도로는 이길 수 없다.

물론 그것이 시엔이 가진 최후의 카드는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숨기려 했던 비장의 카드. 훗날의 자신이 갖게 될 힘을 드러낼 수 있는 일수(一手)가 있었으니까.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

훗날 당대의 ‘최강자’라 불리는 이들 모두를 자기 손으로 쓰러뜨린 암살자.

제국의 가장 위대한 영웅들을 굴복시킬 정도로 강했으나, 정작 제국 그 자체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지 못했던 미래의 자신.

바로 그 ‘암살자의 아버지’를 불러올 수 있는 기술.

그럼에도 그 카드는 꺼내는 시점에서 사라지고, 평생 되찾을 수 없다. 그렇기에 꺼낼 때를 신중히 골라야 했다.

그래서 꺼내지 않았다. 아무리 위험에 처하고 죽음이 가까워져도 참고 또 참았다.

시엔이 기억하는 미래 속, 시엔이 그 시절의 자신을 뛰어넘기 전에 앞서 시엔의 가족을 덮치게 될 적들을 알고 있었으니까.

제국의 진짜 지배자들.

무심코 베네토 도둑 길드의 마스터 모니카 써틴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아무리 진흙탕을 굴러도 이승에서 구르는 게 낫다.

‘지금밖에 없다.’

그렇기에 시엔이 각오를 다졌다.

훗날의 시엔조차 쓰러뜨리지 못했던 제국 그 자체였던 남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밤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

수백 년 전, 최초의 밤을 걷는 자로서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조이자 고대 암살자 교단을 이끌었던 그 남자.

그 남자는 여전히 살아 있었다.

심지어 영겁의 삶을 사는 불사자가 되어도 【불사의 역설】에 가로막히지 않고, 카산 나이트워커는 수백 년의 세월을 인간처럼 성장하고 강해지고 있다.

지금 바로 이 순간에도.

그게 바로 시엔이 쓰러뜨리지 못했던 제국의 정체였다.

이 시대에는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황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이라 불리는 남자.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위를 손에 넣기 전에 루트비히, 카를 4세, 지기스문트, 프리드리히의 이름을 가지고 불린 남자.

훗날의 미래에는 막시밀리안 2세란 이름으로 불리며 여전히 제국 그 자체가 된 남자.

제국의 황제는 모두 인간이었다. 동시에 그들이 인간으로 태어나 죽는 와중, 그들의 영혼과 정신에 깃들어 있는 것은 오직 하나의 존재였다.

밤의 아버지, 전생자(轉生者) 카산 나이트워커.

불사의 역설을 극복하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성장하고 있는 인간.

정작 나이트워커 가문을 있게 한 주제에,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뿌리를 멸망시키기 위해 수백 년의 세월에 걸쳐 암약해온 적.

그 남자가 바로 제국이었다.

훗날의 시엔조차 결코 제국 그 자체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다.

그것이 시엔의 유일한 죄였다.

어차피 그 남자는 시엔의 전력을 끌어내도 이길 수 없다. 그럼 차라리 지금 그 카드를 써서 버리고, 그보다 더 강해지는 길을 모색하는 게 낫다.

어떻게든 이 자리에서 살아남아 그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여기서는…….’

불멸자의 자세를 펼친 체사레가 시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고 계십니까?”

“……널 어떻게 혼내줄지 생각 좀 하고 있었지.”

“아, 그것참 무서운 이야기네요.”

절대로 도망칠 수 없는 죽음의 신이 거리를 좁히는 것 같은 착각.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상태로는, 저 일검(一劍)을 맞받아치는 시점에서 확실하게 죽는다.

그렇기에 꺼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추하고 비참해도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아직 아니다, 젊고 어린 전사여.”

─그리고 그때였다.

꽈르릉!

시엔과 체사레의 사이를 가로막듯,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쳤다.

뇌광(雷光).

“그대 같은 젊고 어린 코흘리개 애송이가 발할라에 들어가 봐야, 신들의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겠지!”

스러지는 황혼이 불타듯 일렁이며 또 하나의 어스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돌아가라, 명예를 아는 젊고 어린 전사여.”

어느덧 시엔의 앞을 가로막는 두 명의 노장(老將)이 그곳에 있었다.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 뇌강의 토르비욘 라그나르손.

새벽 어스름 클랜의 야를, 황혼의 문지기 스벤.

“여기부터는 우리가 네놈의 상대다.”

그들이 시엔의 앞을 가로막은 채 말했다. 이 이상의 싸움은 시엔의 몫이 아니란 듯이.

“출항의 준비가 끝났다. 너와 너의 가족을 데리고, 우리의 미래를 네게 맡기마.”

“늙은 해는 지고 새로운 해는 떠오르는 법이지.”

황혼 문지기, 스벤이 말했다.

“이곳에서 지기에 그대는 지나치게 찬란한 여명이다, 젊은 애송아.”

“…….”

전황이 시시각각 바뀌고 위협에 처하는 순간까지, 오크 부족의 수장이자 최강의 전사라 일컬어지는 두 명의 야를이 어째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나.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대에게 우리 부족의 미래를 맡기겠네.”

세월의 풍파 속에서 늙고 노쇠하고,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노구의 전사들이 말했다.

“…….”

순간, 그들의 합류를 보며 시엔이 냉정하게 생각했다.

‘카드’를 꺼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싸워 눈앞의 체사레를 쓰러뜨릴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시엔이 무사히 이곳을 벗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동시에 지금 이 땅 위에 있는 인간 모두를 통틀어,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인간은 딱 두 명밖에 없다.

지금 시엔 앞에 있는 두 명의 전사들이다.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약속은 이루어질 겁니다.”

그렇기에 시엔이 그가 표할 수 있는 최대의 존중을 담아 말했다.

“저와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당신들 부족의 미래와 희망을 지켜드릴 것을.”

“하하, 그럼 당장 꼬리를 말고 도망쳐라, 애송아!”

황혼 문지기 스벤이 그의 양날 도끼를 들고 호탕하게 웃었다.

“겁쟁이처럼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도망쳐서 훗날을 기다려라! 네가 떠오르게 될 여명의 때를!”

“그러나 우리는 오늘, 불타는 황혼이 되어서 스러질 것이다!”

“늙은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듯이!”

애송이는 커서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애송이를 지키는 것 역시 어른의 몫이다.

“우리의 황혼을 밟고, 이 세상의 누구보다도 빛나는 여명이 되어 떠올라라!”

마찬가지로 뇌광의 토르비욘이 호탕하게 소리치며 팔을 뻗었다.

지금이 아니다. 훗날에 떠오를 새로운 태양과 여멍을 위해서, 황혼과 함께 스러질 자신들의 운명을 각오하고.

“아, 이래서 인간이란.”

피의 검을 고쳐잡은 체사레가 표정을 찌푸리며 조소했다.

쿠구궁, 쿵!

토르비욘의 머리 위를 향해, 수직으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일발도 아니다. 끝없이 벼락이 내리치고 또 내려치고, 그 와중에도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벼락 속에서 토르비욘 라그나르손이 호탕하게 웃었다.

천둥의 신 ‘토르’의 무기를 본뜬 신기 중 하나이자…… 묠니르(Mjölnir)에서 휘몰아치는 뇌전의 힘을 최대 출력으로 끌어내며.

“천둥의 힘이 솟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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