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신기의 주인들 (2)
태고의 빙하가 얼어붙은 동토의 대지, 하얗고 시린 바다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오크들의 배, 롱쉽(Longship)의 무리가 있었다.
스카게라크 해협을 지나 북해로, 고향을 등진 채 새로운 터전을 향해 기약 없는 항해를 하며 나아가는 최후의 생존자들.
지금쯤 그들의 고향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피를 흘리고 있을 사랑하는 가족들, 누군가에게는 남편이고 아버지이자 동생들을 떠올리며.
바로 그때, 검은 옷을 입은 과부 하나가 류트를 퉁기며 음유시를 불렀다.
별들이 우리의 등을 향해 손을 떠밀어요
Stars reach out, pushing our back.
─ 키이이이익!
발퀴리아 협곡에 남아 싸우던 오크 전사를 향해 교회군의 천사가 아가리를 쩍 벌린다.
콰직!
수천 개의 이빨과 아가리가 오크를 머리에서 몸통까지 그대로 집어삼켰고, 마치 뱀이 개구리를 통째로 삼키는 것처럼 천사의 몸이 기괴하게 부풀었다.
상체가 삼켜지고 남겨진 오크의 하체가, 창자와 내장을 흩뿌리며 덧없이 무너져 내렸다.
별빛의 손이 머뭇거리는 등을 떠밀고, 우리는 떠나네요.
Hands of starlight, push as we set sail.
전신을 덧씌우듯 강철판을 살점 위에 못 박은 철가면의 대천사가 검을 휘둘렀다. 대형이 무너진 오크 무리 속에서 순백의 검이 서슬을 흩뿌렸고, 잘린 목과 팔다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여느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새빨갛고 붉은 피였다.
그대는 여전히 춥고 어두운 밤에 남겨져 있는데
Thy still left alone in cold, dark night
구슬픈 곡조와 함께 류트의 현(絃)이 퉁겨졌고, 배에 타고 있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서녘 하늘 너머로 황혼이 스러졌고, 발퀴리아 협곡의 하늘은 어느덧 검고 어두웠다.
칠흑 같은 밤 속에서 그것은 더 이상 전투라 부를 수도 없었다.
도륙이었다.
우리는 황혼과 어스름을 등지고, 시린 별에 이끌려 새로운 여명을 찾아 떠나네요.
We seek for dawn, led by cold star, leaving dusk and shadow behind.
쿠르릉!
토르비욘 라그나로손의 신기, 묠니르의 뇌전(雷電)이 눈앞의 괴물을 향해서 내리쳤다. 노장 스벤이 그 틈을 노리고 쇄도하며 양날 도끼를 휘둘렀다.
바로 그때, 휘몰아치는 벼락의 폭풍 속에서 남자의 손이 튀어나와, 그의 도끼날을 손으로 잡아챘다.
“……!”
콰직!
깨닫고 보니 피의 검이 노장의 복부를 찢고 있었다. 핏빛의 칼날이 꿰뚫려 그의 등 뒤로 튀어나와 있다.
“크흐흐……!”
입에서 왈칵 피를 토해내는 와중에도 새벽 어스름 클랜의 야를, 노장 스벤이 웃었다.
그리고 자기 배에 꽂혀 있는 남자의 검을 두 손으로 쥐더니, 최후의 힘을 쥐어짜 소리쳤다.
“오딘이시여! 나에게 최후의 힘을 주시오!”
안녕, 누구보다 뜨겁게 타올랐던 나의 황혼이여.
Goodbye, my dusk, lit brighter than ever.
황혼의 문지기, 스벤이 최후의 힘을 쥐어짜며 소리쳤다. 그의 몸에서 불타는 오러가 폭발하듯 타올랐다.
“아, 이래서 인간이란 족속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타오르는 의지를 보며 남자가 차갑게 조소했다.
동시에 그의 몸에서 휘몰아치는 찬가(讚歌)를 집어삼키듯, 남자가 펼친 악마의 날개가 꿈틀거렸다.
촤아악!
검고 어두운 두 장의 날개가 마치 살아 있는 별개의 생물처럼 뒤틀리더니, 어느새 날개에서 칠흑의 촉수가 솟아나 노장의 전신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목이 잘리고 팔다리가 잘리고, 몸이 수십 조각으로 도륙이 나서 내장과 창자가 줄줄이 쏟아졌다.
시린 밤의 냉기가 누구보다 뜨거웠던 당신을 보듬어주길.
Let the cold night, let the chill pat on your blaze.
“스벤……!”
늙은 전우의 죽음에 토르비욘의 전신이 벼락처럼 일렁이며 전기를 내뿜었다.
별이 된 내 사랑 황혼이여, 남겨진 우리가 여명으로 나아가는 별빛으로 이끌어주길.
Dusk my love, my star, guide us toward startlight reaching for dawn.
뇌신의 망치, 묠니르.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해 망치도 아니고 무기조차 아니었다.
그저 토르비욘의 몸속에 깃들어 있는 뇌전의 화신(化身) 그 자체였으니까.
바로 그 천둥을 휘감고 토르비욘이 쇄도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운명의 괴물을 향해.
우리 역시 황혼의 어스름이 되어 스러지고, 아이들의 미래를 비춰줄 별이 될 수 있도록.
As we shall fall with dawn, become a star to lit our childs path.
류트를 튕기는 과부의 애가(哀歌)가 끝났다. 구슬픈 곡조 속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곳에 함께 타고 있는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곳에 있는 생존자들, 저 땅에 남아 죽음을 자처한 전사들, 그들 모두는 시엔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다.
그러나 과부가 노래하는 구슬픈 곡조의 음유시는, 이상할 정도로 시엔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었다.
웃기는 일이었다.
이 대륙에 전쟁의 비극을 퍼뜨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며, 양쪽에 무기를 팔고 싸움을 부추겨 과부의 눈물로 대륙을 적시는 것은, 세상 누구보다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와서 눈앞에 있는 그들을 보며 동정을 품고 있는 자신이 너무나도 우스웠다. 그 역겨운 위선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바로 그때였다.
“제국군 함대다!”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묵묵히 바람을 타고 나아가던 롱쉽 함대 사이에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놈들의 함대가 추격하고 있다!”
그렇기에 뱃머리 위, 수평선 너머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함대를 보며 시엔이 혀를 찼다.
아무리 노를 잡고 배를 몰 수 있는 전사들이 타고 있다고 하나, 그들의 함대는 결코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 당장 배가 부딪치고 적들의 강습에 저항할 방법이 없으니까.
게다가 상대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군(軍)이 타고 있는 함대다.
‘여기서는…….’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아무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이 바다 위에서 서펀트 가문의 이들에 비할 바가 아니라고 하나, 어디까지나 그들 가문을 기준으로 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시엔이 각오를 다지려는 순간.
콰르릉!
밤하늘에서 날벼락이 내리쳤다.
바로 시엔의 머리 위로.
“!”
느닷없이 내리치는 벼락에 시엔의 전신이 타오를 것처럼 이글거렸고, 곁에 있던 이들조차 당황해서 숨을 삼켰다.
“시엔!”
“대부님!”
“시, 시엔 형님!”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삶의 터전에서 떠나가는 이들을 보면서도 눈동자 하나 깜빡하지 않던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당황해서 소리쳤다.
처음에는 알기 쉬운 뇌전 속성의 공격 마법이라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설마……!’
시엔을 향해 내리꽂히는 동시에, 벼락은 그저 시엔을 불사르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 이질감의 정체를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것은 알기 쉬운 벼락이나 뇌전 마법 따위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경외해야 할 무엇이었다.
파직, 파지직!
그 증거로 시엔이 착용한 뇌전의 장갑이 그 어느 때와 비할 바 없이 터무니없는 전격의 마력을 뿜어내고 있다. 자칫 방심하는 순간 의식을 잃을 정도로 휘몰아치는 뇌전의 폭풍, 마치 몸속에서 끝없이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다.
내장이 불타고 찢어질 것 같은 고통. 감히 명경지수의 극의, 업화의 불꽃으로 전신을 휘감을 때 이상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의 격통.
마치 시엔의 내부에서 폭발할 것처럼 휘몰아치며 깃드는 뇌전의 힘…… 이 정체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게 있었다.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 토르비욘 라그나르손이 가진 신기 「묠니르」.
그러나 천둥신의 망치란 이름과 달리 묠니르 자체는 엄밀히 말해 망치나 무기 같은 알기 쉬운 형태의 무기도, 심지어 기물(器物)조차 아니었다.
그저 가장 순수한 형태로 휘몰아치는 뇌전의 정수 그 자체다.
그리고 이 신기에 깃들어 있는 또 하나의 능력─.
어디에 있어도 주인의 손으로 돌아오게 되는 전승(傳承).
대륙 역사 속에 족적을 남길 정도로 강력한 전승을 가진 신기는 별개의 의지를 가진 생물이나 다름없다. 허락 없이 명마의 등에 탈 수 없듯, 신기 역시 마찬가지다. 어쩌다 운 좋게 손에 들어왔다고 해서 멋대로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자칫하면 쓸모없는 애물단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신기가, 시엔 나이트워커를 자신의 새로운 주인으로 인정하고 전승처럼 그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토르비욘 라그나르손…….’
그대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기겠네.
바로 이 순간,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이 죽었다. 토르비욘의 죽음과 함께 신기 묠니르는 옛 주인의 유지(遺志)를 이어 기꺼이 시엔을 새 주인으로 택했다.
그리고 묠니르의 전승에 따라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주인의 손에 돌아온 것이다.
“─.”
체내에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휘몰아치는 뇌전의 격랑을 뒤로하고, 시엔이 뱃머리 위에 섰다.
수평선 너머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제국군의 함대를 향해 나지막이 두 팔을 뻗으며.
그렇지 않아도 전격 마력을 강화해주는 아티팩트 ‘뇌전의 장갑’ 위로 덧씌워진 청색의 전류가, 그대로 휘몰아쳤다.
자신의 두 눈동자가 초점 잃은 청백색의 눈동자가 되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손끝에서, 하늘에서 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그곳에 있는 제국군 함대 일대를 모조리 집어삼킬 듯 휘몰아치는 천둥의 폭풍.
마치 토르의 진노가 내려치는 것처럼, 어느덧 먹구름이 드리운 밤하늘에서 수십, 수백 줄기의 벼락이 내리꽂히며 제국 함대를 박살 내고 있었다.
노를 저으며 배를 몰고 있는 제국 인간들의 의지를 조롱하는, 그야말로 신의 천벌이었다.
* * *
수도 베네토의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
“길 가다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엄숙하게 울려 퍼지는 주교의 목소리와 함께 ‘세례’가 치러지고 있었다.
스카디 제도 출신의 오크 부족, 이제는 베네토 공화국의 인간으로 거듭나 있는 그들의 이마에 주교가 성수를 뿌린다.
그 후에는 물로 죄를 씻는 의식과 함께 무결을 상징하는 순백의 옷을 입히고, 이마에 성유(聖油)를 발라준다.
그리고 예배당의 끝자락에서, 칠흑의 베일을 쓴 여성이 감정 없는 눈동자로 그 풍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묵묵히 기도를 올리는 일조차 없이.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말없이 침묵하고 있던 그녀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네요, 라일라 자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