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03화 (103/200)

103화. 신명 재판 (2)

“친애하는 나의 라일라 아퀴나스 언니.”

일대에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흘러가는 시곗바늘 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시엔이 앞서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 별개로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

용서할 수 없었다.

자신의 전부이자 사랑하는 어머니를 당황하고 동요하게 하는, 눈앞의 상대를 용납할 수 없었던 까닭에.

너무나도 시시하고 알기 쉬운 도발이다. 그러나 알고 있어도 달리 도리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설령 그게 핏방울 하나 이어지지 않은 거짓된 가족이라고 해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자신의 가족과 어머니를 슬프게 할 수 없고, 괴롭게 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의 시엔을 지탱하고 있는 전부였다.

카앙!

쇄도하는 시엔의 ‘왕 시해자’에 맞서, 어느덧 빌헬미나의 손에 그녀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

데스 사이드.

칠흑의 흑철로 검게 빛나는 사신의 낫(Death's Scythe).

그녀, 빌헬미나 아퀴나스를 《죽음의 성모》라 불리게 하는 상징 그 자체.

“왜 그러시죠? 시엔 형제님.”

칠흑의 낫을 휘둘러, 너무나도 여유롭게 시엔의 일격을 튕겨내며 빌헬미나가 조소했다.

“사랑하는 가족이 상처 입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는 게 그렇게 괴로우신가요?”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럼 눈앞에서 사랑하는 언니를 빼앗기고…….”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다. 그리고 가족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이별하고 헤어진 동생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언니를 앞둔, 가족의 고통을 이해할 수는 있으신가요?”

너는 나의 아무것도 아니란다.

그때, 라일라가 그녀에게 해준 말을 떠올리며 죽음의 성모가 칠흑의 낫을 고쳐 잡는다.

“사랑해, 라일라 언니.”

“…….”

이 와중에도 쉼 없이 흘러가는 시곗바늘 속에서 빌헬미나 아퀴나스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언니는 나의 전부야.”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집착 어린 애정이 깃든 목소리로.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결투 재판에서는, 재판 당사자 이외의 발화(發話)가 엄격하게 금지되니까.

입을 여는 것이 허락된 것은 오직 두 사람의 당사자.

‘설마.’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 빌헬미나 아퀴나스의 진짜 속셈은 그저 시엔을 시험하거나 싹을 짓밟으려는 알기 쉬운 속셈 따위가 아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 전체를 향해 보내는 전쟁의 선포(宣布)였다.

“사랑하는 언니를 되찾기 위해, 나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어.”

가족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처럼.

“이 세상에 가족이 전부가 아닌 자는 없는 법이니까.”

빌헬미나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다.

“그나저나.”

라일라가 아니라 그곳에 있는 시엔을 마주하며.

“무척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시엔 형제님?”

“뭐가 말이죠?”

“굳이 가족이 전부라는 말이, 그렇게나 일부러 부르짖어야 할 정도로 특별하고 새삼스러운 말일까요?”

“…….”

“형제님께서는 일찍이 도(道)가 없는 자가 도를 논하는 법이라 했지요.”

용기가 없기에 기사도를 부르짖는다. 예의가 없기에 신사도를 부르짖는다.

“목이 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진실과 신뢰와 가족을 부르짖는 자신들의 ‘우물’을 되새겨보는 게 어떨까요?”

그렇기에 베네토 공화국은 진실과 신뢰를 부르짖고, 나이트워커 가문은 가족을 부르짖는다.

딛고 있는 공기가 일전했다.

그사이 몇 분이 지났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신들의 가문은,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악(惡)이랍니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말했다.

“이 땅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을 없애고 사랑하는 가족을 되찾기 위해, 저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지요.”

칠흑의 낫을 고쳐 잡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 자리에서 그녀가 내보이게 될 최대의 전력을 감안하며, 시엔 역시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가 그녀의 「자세」를 펼치는 일은 없었다.

“시엔 나이트워커.”

손에 들린 칠흑의 낫을 거두자, 사신의 낫이 칠흑의 입자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숨을 죽이며 전투를 지켜보고 있던 제국 측에서도 가벼운 동요가 일렁였다. 그럼에도 딱 거기까지였다.

“형제님의 죄악은 이단이니 뭐니 하는 시시한 죄목 따위가 아니랍니다.”

“…….”

도무지 제국 국교회의 추기경이라 생각할 수 없는 말. 그러나 그곳에 있는 누구도 더 이상 그녀의 말에 동요하고 당황하지 않았다.

“그러니 형제님의 ‘이단 혐의’를 묻는 이 재판에서는, 적어도 무죄라 할 수 있겠지요.”

도가 없기에 도를 부르짖는 것은 그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이어지는 정적 속에서 빌헬미나 아퀴나스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그저 담담히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째깍.

어느덧 13분의 시각이 지나고 나서도, 그곳 일대에 내려앉은 침묵은 절대로 그치지 않았다.

* * *

그 시각, 그란델 대공 가문의 저택.

“귀공의 환대에 실로 몸 둘 바 없는 빚을 졌소!”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라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이름도 눈앞에 있는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치광이 기사가 말했다.

“버, 벌써 떠나려는 것이냐……?”

아버지 오스왈드가 당혹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좀 더 이곳에 머물러도 좋다! 아, 아니, 아예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이곳에서 지내는 것은 어떻겠느냐!”

“하하하, 호의에 감사드리오!”

그의 말에 미치광이 기사, 오스카가 당치도 않다는 듯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이 몸은 그저 밤하늘의 별빛을 나침반 삼아 걷는 방랑 기사! 검과 갑주를 벗 삼아 명예가 이끄는 대로 나아갈 뿐이라오!”

말하고 나서, 그는 자신이 검이나 갑주는커녕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누더기 하나를 걸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검과 갑주를 주마.”

그렇기에 기약 없는 여행길을 앞둔 아들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오오, 실로 감사하오! 하오나 이 몸이 대체 무슨 수로 그 빚을 갚을 수 있을지─”

“아니, 자네가 갚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아버지 오스왈드가 붉어지는 눈시울을 뒤로하고 말했다.

“오히려 나야말로, 자네처럼 위대한 기사를 볼 수 있어 영광이었지.”

“호오, 그것참!”

“자네의 기사도 앞에 바치는 찬사라 생각하게나.”

“실로 고맙소!”

그렇게 말하며 오스왈드 그란델은 가문에서 가장 값비싼 미스릴 검과 투구, 갑옷, 어디를 가도 평생 굶주리지 않을 황금과 보석, 또 여차할 때를 위해 아들을 지켜줄 ‘사역마’가 깃든 아티팩트 망토를 넘겨준다.

“나 역시 그대 같은 명예로운 기사를 볼 수 있어 영광이었소!”

“……부디 몸을 조심하거라.”

아버지의 걱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사는 등을 돌렸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이.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사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남겨진 대륙 최강의 기사, 검마(劍魔) 오스왈드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빌헬미나 아퀴나스…….’

지옥불처럼 타오르는 복수심과 증오의 불씨를 뒤로하고.

* * *

시엔의 신명 재판은 무죄로 돌아갔다. 결국 시엔을 향해 씌워진 이단 혐의는 맥없을 정도로 허무하게 사라졌고, 결과적으로 스카디 제도에서 벌어진 일 전부는 ‘시엔의 완벽한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날 밤, 별장 저택에서 시엔을 마주하고 있는 라일라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죄송해요, 어머니.”

그렇기에 시엔이 고개를 숙였다.

“설마 그녀가 이런 식으로 어머니를 동요하게 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녀, 라일라 나이트워커는 시엔의 어머니다. 시엔이 사랑하는 전부이자 가족이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지켜야 할 가족.

“커다란 실책이었지.”

손에 들린 금빛의 술잔을 홀짝이며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었다.

“적들의 앞에서 우리 가문의 모순과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고 말았으니 말이야.”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도수가 높은 독주(毒酒)가 담겨 있는 술잔이었다.

라일라는 여전히 빌헬미나와 제국의 이들을 일컬어 ‘적’이라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내가 우리 가문을 배신하고 그녀에게 등을 돌릴까 걱정하는 거니?”

라일라가 되물었다. 그 말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그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던 까닭에.

“…….”

시엔이 대답하지 않고 말을 흐렸다.

바로 그때였다.

직전까지 쏟아지는 달빛 앞에서 역광을 드리운 라일라의 모습이 사라졌다.

깨닫고 보니, 그녀는 시엔이 깨닫지도 못하는 사이 시엔의 등 뒤에 서 있었다.

일말의 기척조차 없이 시엔의 목덜미 뒤에서 라일라의 두 팔이 시엔을 포옹해준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란다, 시엔.”

휘감기는 온기 속에서 라일라가 속삭였다.

“그리고 그 이외의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

그렇기에 시엔이 말없이 입을 다물고, 목덜미 뒤에서 자신을 포옹하고 있는 라일라의 손을 맞잡았다.

‘어머니에게 있어, 빌헬미나 아퀴나스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가요?’

그 말이 목구멍 끄트머리까지 솟아올랐다. 그러나 말할 수 없었다. 아니, 말하고 싶지 않았다.

* * *

시엔이 스카디 제도의 오크 생존자들을 규합해서 공화국에 받아들일 즈음, 그와 별개로 대륙의 정세 역시 심상치 않은 격랑을 맞이하고 있었다.

칠왕국 연방과 샤를마뉴 왕국의 전쟁에서는, 샤를마뉴 왕국이 100%의 승리를 확신하며 지고 싶어도 질 수 없었던 전투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훗날 ‘크레시 전투(Battle of Crécy)’라 불리며 역사에 기록될 정도의, 말 그대로 역사적 대패.

심지어 그 전투에서 샤를마뉴의 12기사 중 말석의 2명이 전사했다.

아무리 말석이라 해도 대륙의 저울추를 지탱하고 있는 강자 두 명이 죽은 것이다.

심지어 원탁의 기사 같은 강자끼리의 싸움조차 아니라, 그저 일개 궁병의 화살에 맞아서.

그 시점에서 대륙의 정세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와중, 사방에서 끝도 없이 울려 퍼지는 일체의 소란을 침묵하게 할 하나의 소식이 들려왔다.

천년 전, 신의 아들이 죽고 나서 몰락했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제국, 롬누스.

─바로 그 고대 제국 롬누스의 기준에서조차 충분히 ‘고대’라 불릴 정도로 까마득하기 그지없는 시절의 초고대 국가, 애굽(Egypt) 제국.

일명 신대(神代)라 불린 시절을 지배했던 애굽 제국에서, 그들 제국의 지배자 파라오를 위해 쌓아 올린 황제의 무덤…… 《피라미드》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었다.

칠왕국 연방도, 샤를마뉴 왕국도, 신성 로마누스 제국도, 베네토 공화국의 영토 그 어디도 속하지 않는, 완벽할 정도로 공교로운 중립 지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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