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가족의 마음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대회당. 인간들의 대륙에서 가장 강대하다 일컬어지는 신성 제국의 홀을 따라 끝에 기다리고 있는 일실.
옥좌의 방.
제국의 강대함 그 자체를 상징하듯 장엄하게 늘어서 있는 흑색의 복도를 가로질러, 칠흑의 베일을 쓴 빌헬미나가 방에 들어섰다.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앉은 옥좌에서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
황금처럼 빛나는 금색의 장발을 늘어뜨린 미남자가, 눈앞에 무릎 꿇은 빌헬미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용서해 주세요, 아버님.”
“슬퍼하지 말려무나, 나의 딸아.”
딸을 위로하는 다정하고 상냥한 아버지의 목소리. 그러나 눈앞에 있는 남자는 결코 아퀴나스 가문의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라일라, 그 아이는 다시금 ‘진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거란다.”
신성 제국의 황제,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어느덧 무릎 꿇고 있는 빌헬미나와 옥좌에 앉은 황제, 막시밀리안 1세의 주위에 기척 없이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 가문처럼 거짓된 형태가 아니라, 진실로 하나의 피를 나눈 우리처럼 말이지.”
그림자 속에 숨어 이 제국을 다스리는 진짜 지배자들.
“울지 마, 빌헬미나 누나…….”
“모두 함께 힘을 합쳐서 되찾아요.”
얼핏 가문도 출신도 국가도 달라 공통점이 없어 보이는 그들이었으나,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확실하고 알기 쉬운 결속…… 「하나의 핏줄」로 맺어져 있는 존재들.
그 누구보다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존재.
“그게 우리 가족의 의무니까요.”
「패밀리(Family)」가 그곳에 있었다.
* * *
티아 나이트워커의 견진성사가 시작되었다.
라힘과의 수련, 스카디 제도에서의 싸움, 그 나이대의 나이트워커 가문 인간을 기준으로도 쉽지 않은 싸움을 거듭해온 그녀는 어느덧 3식의 마스터를 자처했고, 라일라 역시 티아의 성사를 순순히 허락해주었다.
스무 살이 된 시엔보다 두 살 어린 여동생, 티아.
당장 22살이던 시절의 비고가 견진성사를 치를 때 ‘너무 이르다’고 했던 것과 달리 티아는 아니었다.
비록 15살에 견진성사를 치른 시엔에 비할 바는 아니라도 그녀의 재능은 이미 가문 내에서도 충분히 경이로운 수준이었으니까.
그녀가 두 발로 밤하늘 산맥의 꼭대기, 《달의 사원(Moon Temple)》을 향해 올라오는 모습을 원경(遠鏡)으로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칠흑의 로브 위로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쓴 일련의 무리.
하나하나가 최소 마스터 내지 하이마스터 이상으로 이루어져, 능히 견진성사의 의식을 집전할 자격을 갖춘 강자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바보 라힘도 3식의 견진성사 정도는 얼마든지 치를 수 있는 거 아녔어?”
익살스러운 광대 마스크를 쓴 소녀가 물었고, 새하얀 라르바 가면을 쓴 시엔이 대답했다.
“……아직 마스터를 자처할 정도의 경지는 아니라며 하도 완강하게 거부해서요.”
“어휴, 그 멍청이!”
광대 가면의 소녀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동시에 라힘 나이트워커가 추구하는 3식의 ‘극의’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경지일까. 내심 기대를 감추지 못하는 가족들의 기대 역시 어린다.
어느새 원경 너머에 비친 티아가 백야의 협곡까지 이르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와, 벌써 여기까지 오다니!”
“경이롭네요. 이 정도면 돈 시엔의 기록보다 빠르지 않을까요?”
“뭐, 그때 시엔은 겨우 열다섯 살이었으니까.”
가족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 * *
째깍.
성사의 시작을 알리는 모래시계가 움직이는 동시에, 어둠 속에서 7식의 마스터 비고가 움직였다.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
그에 맞서는 티아의 칼끝에서는, 일찍이 밴시 린이 그랬던 것처럼 아무 소리도 울려 퍼지지 않았다.
째깍.
하이마스터의 집전이 시작되었을 때, 그곳에 입회해 있는 시엔은 움직이지 않았다.
하이마스터 경지의 나머지 가족들이 ‘가문의 적’들이 구사하는 검식을 펼치며 티아와 맞서는 것을 보며 침묵할 따름이었다.
째깍.
두 개의 모래시계가 뒤집혀서 떨어지고, 최후의 모래시계가 남겨졌다.
그러나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심지어 최후의 모래시계도 움직이지 않았다.
“가문의 규칙에 따라, 티아 나이트워커의 대부(代父)이자 하이마스터이며, 같은 3식의 경지에 통달해 있는 시엔 나이트워커가 최후의 집전을 맡을 것이다.”
엄숙하게 울려 퍼지는 가주의 목소리.
견진성사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마스터와 하이마스터, 가주의 동의를 구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의를 구하는 것이 꼭 검을 맞대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견진성사의 마지막은 보통 가주 라일라의 몫이나, 지금처럼 하이마스터 이상의 가족이 대부모이며 ‘같은 검식’을 배운 경우에는 가주를 대행해 최후의 집전을 치를 자격이 주어진다.
티아의 대부이자 《호수의 암살자》로 3식의 경지에 통달해 있는 하이마스터.
“준비됐니, 티아?”
시엔의 말에 어둠 속에서 티아가 말없이 검을 고쳐 잡았다. 시엔과 같은 단검이 아니다. 밴시 린이 썼던 것과 같은, 자기 몸보다도 기다란 태도(太刀)였다.
“네.”
티아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시엔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업화(業火).”
시엔이 손에 넣은 마음의 형태, 고요해야 할 마음의 호수가 불타며 어둠으로 가득 찬 실내에 불꽃이 휘몰아쳤다.
뜨겁다거나 정열이란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업화 그 자체.
그에 맞서 티아가 칼자루를 고쳐 잡고 읊조렸다.
“《삼련(三蓮)》─.”
세 개의 연꽃.
그녀의 해답 자체는 시엔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
“제1의 꽃, 수련.”
읊조림과 함께 시린 냉기가 휘몰아쳤다. 몸이 추위로 퍼렇게 얼어붙어 파란 수련처럼 보이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
일검(一劍)과 함께 거리가 벌어지고, 다시금 티아가 쇄도했다.
“제2의 꽃, 홍련(紅蓮)─.”
얼어붙은 적들의 피부가 터져나가 핏빛의 연꽃처럼 흐드러진 파쇄의 검.
수련과 홍련.
그녀의 마음속 호수가 펼치는 정경이자, 그저 알기 쉬운 비유에서 그치지 않는 그녀의 심상 그 자체.
“제3의 꽃─”
그 상태로 티아가 마지막 꽃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흑련(Black Lotus)─.”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더없이 검고 어두운 눈동자와 목소리로.
“…….”
마치 딛고 있는 일대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무저갱을 향해 빠져드는 것 같은 착각.
그것이 그녀의 마음이 가진 각오였다.
이 마음의 늪에, 가족을 위협하는 전부를 집어삼키고 묻어버리겠다는 각오. 그 속에 집어삼켜진 이들이 썩어 문드러져 흑련이 되어 피어오르는 것조차 불사하겠다는 집념.
“거울이 탁하구나, 티아.”
그렇기에 시엔이 담담하게 말했다.
“네 늪의 수렁이 거울마저 집어삼키고 있어.”
명경지수의 자세는, 그 어느 때라도 맑은 거울(明鏡)을 유지하며 자신을 냉정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금 시엔이 보기에 티아는 아니었다.
그녀의 거울을 집어삼키고 탁하게 하는 것도 모자라, 그녀의 존재를 집어삼킬 정도의 어둠.
“그게 어쨌다는 거죠?”
바로 그때, 티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마음의 거울이 깨끗하든 탁하든, 맑든 어둡든, 그게 우리 가족의 일과 무슨 상관이에요?”
순수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제 마음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저는 제 마음이 그 어떤 어둠과 악으로 더럽혀져도 개의치 않아요.”
더없이 검고 어두운 눈동자로 티아가 태도를 고쳐 잡았다.
그녀가 내린 마음의 답을 그곳에 펼치며.
자신의 마음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듯이.
멈춰 있는 마음의 호수는 물론 거울조차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며, 칠흑의 칼날이 쇄도했다.
가족을 위해, 이깟 호수 따위는 얼마든지 더럽히고 탁해져도 개의치 않겠다는 듯이. 이 세상의 악(惡)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하듯이.
“……!”
쇄도하는 티아의 검을 받아쳤고, 시엔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나직이 숨을 삼켰다.
무겁다.
지금의 시엔조차 쉽게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말 그대로의 심연(深淵)이 깃든 검을 맞받아치는 듯한 감각.
오히려 검의 묘리 자체는 3식이 아니라 가문의 6식이자, 훗날의 시엔이 통달했던 「나락의 자세(Naraka Stance)」와 흡사하다.
물론 6식의 마스터를 자처할 정도로 티아가 펼치는 검식은 정교하지도 완벽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카앙!
일말의 방심도 무엇도 없는 일격을 휘둘러, 눈앞에 있는 티아의 검을 맞받아쳤다.
어느덧 그녀의 손에 들린 칼자루가 튕겨져 허공을 갈랐고, 무방비해진 티아의 이마를 향해 ‘왕 시해자’를 겨누며 시엔이 말했다.
“너는 아직 3식의 마스터가 될 수 없어, 티아.”
“……!”
그 말에 티아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동요의 빛이 깃들었다.
“어째서죠?”
“3식의 이름을 잊어버린 거니?”
명경지수의 자세. 시엔이 되물었다.
“맑은 거울과 멈춘 호수, 네 검의 어디에 그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저는……!”
그 말에 어지간한 일에도 동요하지 않던 티아가 비로소 당황해서 소리쳤다.
“가족을 위하는 네 마음은 누구보다 잘 알아. 그런데 지금의 너로서는 그걸 ‘3식의 극의’로 소화해낼 수 없어.”
오히려 그녀의 검고 어두운 집착은, 과거에 그녀가 통달하지 못했던 6식 나락의 자세에 더욱 어울린다.
“너는 이미 충분히 강해. 아니, 지나칠 정도로 강하지.”
그렇기에 시엔이 말했다.
“어지간한 우리 가족의 마스터 이상으로 말이야.”
그게 티아의 문제였다.
“그럼 어째서─!”
“마스터는 힘 하나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니까.”
시엔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란 듯 세상 사람들에게 너의 강함과 악의를 드러내고, 너와 우리 가족들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생각이니?”
그녀는 너무 강했다.
“우리 가족이 지켜야 할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절대 일방적 폭력이나 광신(狂信)을 통해 지켜지는 게 아니야.”
“그럼 뭐로 지키는 거죠?”
“지혜.”
“…….”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은 괴물이다.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의 기준으로 봤을 때는 명백하게 악(惡)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괴물.
그럼에도 그들은 절대로 바보가 아니었다. 그게 그들이 진짜 괴물로 존재할 수 있는 이유였다.
“어설프고 어리석은 괴물은 쉽게 사냥당하지.”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좀 더 교활해질 필요가 있어, 티아.”
“……죄송해요, 오라버니.”
그 말에 비로소 티아가 검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직전까지 꺾지 않으려 했던 고집을 꺾으며.
“항상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해야 해, 티아.”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 되어서 놓쳐버린 그녀의 어리석음과 비합리성을 책망하며.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너의 마음이, 나에게는 전부란 사실을 기억하렴.”
“!”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다. 그 누구도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고 괴물이 되길 바라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티아 역시, 시엔의 말이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알겠어요, 경애하는 시엔 대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