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조금 더 좋은 제의 (1)
티아가 마스터 시험에 실패하고 나서 얼마 후.
“풀이 죽어 있네, 티아.”
“……시엔 오라버니.”
시엔이 공작 저택을 나오자, 수정처럼 새파란 머리카락의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여느 때 이상으로 기가 죽은 얼굴을 하고서.
“견진성사를 통과하지 못한 게 아직도 그렇게 충격이야?”
“……그야 가족을 실망하게 했으니까요.”
“나는 실망하지 않았는데.”
“……네?”
“오히려 내 예상을 뛰어넘어서 더 기쁘지.”
“그런데 왜 떨어뜨렸어요?”
티아가 뾰로통하게 되물었고,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
“너는 나의 전부란다, 친애하는 티아.”
시엔이 말했다.
“네 마음도 마찬가지지.”
티아가 침묵했다.
마음의 거울이 깨끗하든 탁하든, 맑든 어둡든, 그게 우리 가족의 일과 무슨 상관이에요?
제 마음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어요.
“우리는 서로의 전부야.”
“…….”
“그런데 사랑하는 가족이 자기 마음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도, 너는 잘했다고 칭찬할 수 있겠니?”
“……따끔하게 혼내주겠죠.”
티아가 머쓱한 듯 웃으며 말했다. 비로소 시엔의 말에 깃든 진짜 의미를 이해했다는 듯이.
“너 자신을 소중히 여겨, 티아.”
시엔이 대답했다. 그녀에게 나아가야 할 길을 가르쳐주는 지혜로운 아버지이자 가문의 어른으로서.
“우리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고마워요, 오라버니.”
시엔의 말에 티아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세상에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상냥함처럼 끔찍한 것도 없는 법이니까.
* * *
그날 밤.
“마그레브(Maghreb) 사막에 신대 시절, 애굽 제국의 황제가 묻혀 있는 무덤이 발굴되었다는구나.”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집무실.
“신성 제국 측에서 선수를 쳐 몇 차례에 걸쳐 탐사대를 꾸렸는데, 보내는 족족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모양이야.”
라일라가 말했다.
“신대 시절의 제국이 그들의 황제(파라오)를 위해서 세운 무덤이니, 순순히 침입을 허락해줄 리가 없겠죠.”
“뭐, 그렇지.”
라일라 역시 놀라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 시대를 기준으로 천년도 전에 세워진 고대 제국, 롬누스.
신성 로마누스 제국은 그들 롬누스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하는 가짜에 불과하다.
─그 고대 제국 ‘롬누스’의 기준으로도 무려 3천 년이나 앞서 세워진 초고대 제국이자, 신과 인간의 구별조차 희미했던 신화시대의 국가.
체사레가 즐겨 읊조리는 시 ‘오지만디아스’는 바로 그 신대 시절 애굽 제국의 가장 강력했던 황제(파라오)를 일컫는 이름이기도 했다.
“흥미가 있어 보이는구나.”
이어지는 라일라의 말에 시엔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황제의 무덤 자체에는 별 흥미가 없어요.”
“그럼?”
“금광보다 더 비싼 것은 ‘금광으로 가는 길’이다.”
공화국의 옛 속담을 읊조리자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육로로 마그레브 사막을 지나기 위해서는 사라센 제국이 가로막고 있는 아나톨리아 지방을 경유해야 하지.”
이 대륙에 사는 종족은 인간이 다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이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종족은 더더욱 아니다.
술탄 살라딘이 다스리는 사막 엘프들의 영역, 사라센 제국이 그 증거였다.
“육로는 막혀 있어도, 우리나라에서 배를 타고 직행할 수 있죠.”
마그레브 사막은 지중해(地中海)를 사이에 두고 베네토 공화국 남쪽에서 그리 멀지 않다.
“소식이 들리는 즉시 일확천금을 노리는 모험가와 용병들, 방랑 기사들이 모일 거예요.”
탐욕에 이끌려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인간들.
“그들을 위해 공화국의 함대로 수송단을 꾸리자는 거구나.”
“하나 더 있어요.”
“또 다른 계획이 있니?”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 일대에 도시를 세우는 거예요.”
무덤과 미궁의 도시.
“─.”
“피라미드 일대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이겠죠. 공식적으로 마그레브 사막 일대는 누구의 영역도 아니니까요.”
수천 년 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그곳 일대는 생명이 살 수 없는 불모(不毛)의 땅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정도 규모의 고대 유적이 발굴된 이상, 사라센 제국도 좌시하지는 않을 거란다.”
“딱히 우리가 그 땅을 점령하자는 게 아니에요.”
시엔이 말했다.
“그저 ‘투자’를 하는 것뿐이죠.”
그들 베네토 공화국이 가장 잘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충분히 할 가치가 있는 투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 말처럼 파라오의 무덤 자체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지, 정말 일말의 흥미도 관심도 없다는 목소리로.
* * *
실제로 마그레브 사막에서 발굴된 신대 제국 파라오의 무덤…… 피라미드 자체에 시엔은 아무 흥미가 없었다.
훗날의 시엔이 제국의 손에 사로잡혀 최후를 맞는 그 순간까지도, 피라미드의 끝까지 들어갔다가 살아 나왔다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정도 되는 황제의 무덤에는, 굳이 파라오가 묻혀 있는 최후의 방을 찾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에 넣을 재보(財寶)들이 넘칠 것이다.
파라오의 무덤, 피라미드에는 헤아릴 수 없는 보물과 아티팩트가 잠들어 있다.
아티팩트 하나를 손에 넣어도 3대가 놀고먹을 떼부자가 될 수 있다.
운 좋게 무덤에 있는 보석 하나를 캐내도 일평생 풍족하게 먹고 살 수 있다.
소문이 퍼질수록 대륙 각지에서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고, 불나방처럼 욕심을 부채질하며 그 과정에서 이득을 챙기는 것으로 족하다.
정작 이 시점에 시엔이 흥미를 갖는 것은 달리 있었다.
수천 년 전에 죽은 황제의 내용물조차 알지 못하는 무덤 따위가 아니라, 당장 눈앞에 닥쳐올 지금과 미래의 일이었다.
기사도의 나라, 샤를마뉴 왕국.
얼마 전 그들이 칠왕국에 맞서 몇 배의 병력 우위를 갖고도 경이적으로 패배했던 크레시 전투.
‘망하려고 작정해도 이렇게 망하기는 어렵겠다.’
그들이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전투에서 역사적 대패를 맞이하고, 그 후에 벌어질 후폭풍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까닭에.
* * *
“네?”
얼마 전, 샤를마뉴 왕국의 왕도 루테시아.
“……지금 제가 잘못 들었나요?”
그 누구보다 기사도의 이상을 경멸하고 허황함을 이해하는 지혜로운 1공주, 로젤리아 샤를이 되물었다.
평소의 그녀가 보여주는 일체의 여유나 느긋함도 없이, 말 그대로 자기 귀를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그, 그것이─.”
그리고 그녀 앞에서 고개를 조아린 샤를마뉴 왕국의 전령병이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당황과 함께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것은 로젤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작 6,000명의 칠왕국 군대와 40,000명의 우리나라 왕국군이 맞붙어서─ 졌다고요?”
“그, 그렇습니다.”
“그 와중 10,000명의 기병대가 몰살당했고, 샤를마뉴의 12기사 중 두 명이 전사했고요?”
“그렇습니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영토에서 적들을 포위한 상황에서?”
“그렇, 습니다.”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니, 도대체 어떻게 졌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었다. 정말로. 어떻게 졌지? 그녀의 ‘지혜’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경우의 수가 존재하지 않았다.
지고 싶어도 질 수 없고 망하고 싶어도 망할 수가 없는 전투였다.
그 어려운 걸 해냈다.
──그게 기사란 족속들이다.
“그, 그것이…… 워낙 상황이 유리해 아무도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던지라.”
샤를마뉴 왕국의 전령병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우리 왕국의 군대가 도착하자마자 전열을 재정비하지 않고, 기사들 사이에서 서로 무공(武功)을 세우기 위해 명령을 무시하고 앞다퉈 기병 돌격을 감행했습니다. 뒤에 남겨져 있는 보병과 쇠뇌병들을 놔두고 일방적으로─.”
“…….”
“마침 비가 오고 땅이 젖어 있던지라, 진흙과 진창을 사이에 두고 구릉을 점거하고 있던 적의 궁병이 화살 세례를 퍼부었고…… 진창 위에서 말들이 낙마하고 기사들끼리 엉키며…….”
“됐습니다, 됐어요.”
들을수록 정신이 어지러워질 것 같았다.
이 이상 들었다가는 천하의 그녀조차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눈앞에 있는 전령병의 목이라도 대신해서 날릴 기세였으니까.
이 세계에서는 그리 드물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로젤리아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로젤리아 샤를 저하.”
바로 그때, 그녀의 충성스러운 부하이자 샤를마뉴 왕국의 12기사 중 하나, 테레지아 경이 조심스레 그녀의 집무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비밀리에 저하를 뵙고자 하는 분이 계십니다.”
* * *
“표정이 좋지 않으시네요, 로젤리아 저하.”
“저를 놀리려고 여기까지 오셨나요?”
“뭐, 좀처럼 보기 어려운 기회기는 하네요.”
그녀답지 않게 손에 들린 백포도주를 병째로 비우며, 로젤리아 샤를이 마주하고 있는 남자를 향했다.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진 코트 차림의 암살자.
“오랜만이에요, 시엔 공.”
“친애하는 로젤리아 샤를 저하를 뵙습니다.”
“한잔하실래요?”
“주시는데 받지 않을 이유는 없죠.”
그렇게 말하며 시엔이 로젤리아가 넘겨주는 잔에 백포도주를 받았다.
동시에 눈앞의 그녀는 포도주병을 잔에 담을 생각조차 없이, 그대로 병나발을 불며 말했다.
“저는 말이죠, 멍청이들이 싫답니다.”
마치 오랜 친우를 대하는 것 같은 스스럼없는 목소리로 로젤리아가 말했다.
“뭐,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는 도대체 뭐가 문제기에, 왜 이렇게 멍청이들이 넘쳐나고 있을까요?”
“꽃은 원래 봄에 피는 법이니까요.”
그때와 같은 대답이다. 그리고 시엔이 나고 자란 베네토 공화국, 그곳은 꽃이 피는 봄과 더없이 거리가 멀었다.
신성 제국이나 칠왕국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들조차 지금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겨울을 지새웠으니까.
“아, 이런.”
로젤리아의 몸이 취기에 흔들리듯, 기울어졌다.
“조금 과음을 했나 보네요.”
흔들리는 몸을 다잡으며 로젤리아가 말했다. 그녀가 보여주는 나약함에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 앞에서 어설픈 연기는 통하지 않습니다.”
“…….”
그 말과 함께 로젤리아의 움직임이 멈춘다.
“제게 포도주를 따랐을 때, 미리 준비해둔 장치를 통해 ‘알코올이 있는 쪽의 액체’를 넘겼죠.”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지금 샤를 저하가 마시는 포도주는 알콜이 없는 액체 쪽일 겁니다.”
“…….”
“비운 병이나 술 냄새는 애초에 위장일 테고요.”
“굳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죠?”
로젤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전히 취기로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굳이 상대의 노림수를 읽었는데, 그걸 의도적으로 숨기지 않고 떠벌릴 필요가 있을까요?”
“이런 우스꽝스러운 놀이를 진지하게 ‘노림수’라고 여길 정도로, 제가 아는 공주님께서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니까요.”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 그것참.”
그 말에 로젤리아의 얼굴에 돌고 있던 붉은 빛의 취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이내 차가운 미소가 깃들었다.
“하도 멍청이들밖에 상대하질 않았더니, 요새는 덩달아 저까지 멍청이가 돼버린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