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06화 (106/200)

106화. 조금 더 좋은 제의 (2)

“솔직히 말씀드리죠. 이 나라 기사들은 샤를 공주님이 상상하는 것보다 몇 배는 더 멍청합니다.”

시엔의 말에 로젤리아가 처음으로 그녀의 감정이 실린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공주님께서는 기사도의 허황한 우상을 무너뜨리기 위해 ‘검성 롤랑 경’을 죽여달라고 말씀하셨지요.”

시엔이 말했다.

“그런다고 해서 그들이 정신을 차릴 것 같습니까?”

못 차릴 것이다. 오히려 복수심에 불타 지금 같은 터무니없는 졸전을 거듭하겠지.

하나의 시대를 풍미하는 ‘정신’은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바뀌는 것이 바로 암살자의 시대다. 아무리 로젤리아 샤를이 지혜롭다 해도 그 정도까지의 피해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

“그나저나 저는 이미 공주님께 ‘의뢰’를 받았지요.”

그 말에 로젤리아가 침묵했다.

“칠왕국 군대는 약탈 행렬을 샤를마뉴 왕국의 전 국토로 확대할 거고, 아무리 검성 롤랑이라 해도 원탁의 기사단을 거느린 그들을 막기는 버거울 테고요.”

그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기회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시엔이라 해도 당대의 최강자, 롤랑을 혼자 힘으로 쓰러뜨릴 수는 없다.

그러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은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죠?”

로젤리아가 담담하게 목소리로 되물었다.

“서로에게 나쁠 것 없는 제의입니다.”

“그리고 늘 공화국 쪽에 ‘조금 더 좋은’ 제의겠죠.”

그게 그들의 방식이니까. 시엔은 달리 부정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는 베네토 공화국의 최고 국가원수, 오셀롯 총독 각하의 뜻을 대리하는 사절로서 샤를마뉴 왕국에 정중하게 제의하고자 합니다.”

여느 때와 다르게, 허울밖에 없는 의례와 형식으로 가득 찬 목소리로.

“공화국의 오셀롯 총독 각하께서는, 기꺼이 귀하의 왕국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자 합니다.”

이어지는 시엔의 말에 로젤리아가 숨을 삼켰다.

공화국의 최고 국가원수, 총독.

물론 길을 가는 일곱 살 꼬맹이들도 그들 공화국의 총독이란 직함이 허울밖에 없는 꼭두각시란 사실을 알 것이다.

누가 그림자 속에서 그들 나라를 진짜로 지배하고 있는지 역시도.

“그럼 그 대가는 뭐죠?”

로젤리아가 물었다. 그들 공화국의 진짜 지배자들을 향해서.

“귀국의 능력으로도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시엔이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대답했다.

* * *

그것은 ‘신사도의 나라’에서 온 인간들의 짓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고 참혹했다.

샤를마뉴 왕국의 농촌 전역을 조직적으로 습격해 약탈과 방화를 자행하고, 국토를 쑥대밭으로 짓밟으며 나아가는 악귀의 행진이었다.

그들이 지나는 곳마다 피부가 벗겨지고 팔다리와 목이 잘린 채, 꼬챙이 위에 꿰뚫려 전시된 시체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추가로 합류를 마친 샤를마뉴 왕국 기사들은 의분(義憤)을 참지 못하고 ‘명예로운 기병 돌격’을 감행했으나, 그 최후는 그다지 명예롭지 못했다.

왕과 신사들의 행진을 장식하는 새로운 ‘인간 오브제’가 추가될 뿐.

기껏 합류하는 족족 기병대가 멋대로 돌격을 감행해 인간 오브제로 거듭나는 사이, 비로소 공화국의 원군(援軍)이 합류해 ‘왕의 진격로’를 가로막았다.

원탁왕 아서의 길을.

* * *

“……공화국이 기어코 왕의 앞에 섰는가.”

그 시각, 샤를마뉴 왕국 내에서 약탈 행렬을 자행하고 있던 칠왕국 주력군의 막사.

대륙 최강자 중 하나, 원탁왕의 이름을 가진 남자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의 앞에 놓여 있는 원탁을 따라 기사들을 거느린 채.

“제국 측에서 넘겨준 정보로는, 이미 적지 않은 숫자의 하이마스터가 참전해 있다고 합니다.”

왕의 아들, 모드레드의 이름을 가진 원탁의 기사가 말했다.

“달라질 것은 없다.”

“하오나 폐하,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들이 움직이는 이상 우리로서도…….”

일명 《호수의 기사》란 별호를 가진 기사, 랜슬롯 경이 신중하게 말을 이으려 할 때였다.

“아, 맞다.”

이 자리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개구쟁이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신성 제국 측이 제의를 해왔는데 말이야.”

“제의라고?”

“자기네가 나이트워커 가문을 상대하겠다나 뭐라나.”

“무슨 수로 말입니까, 멀린 경.”

“나도 몰라. 몰래 꿍쳐둔 비장의 카드라도 있는 모양이지.”

“제국의 동맹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전해주시오, 멀린 경.”

결코 누구의 앞에서도 고개를 숙이는 일이 없는 그 남자가, 그답지 않게 가볍게 목을 숙이며 요정왕 멀린을 향해 예를 표했다.

“그럴 줄 알고 미리 받아놨지. 지금쯤 제국에서도 슬슬 병력이 도착할걸?”

“멀린 경! 감히 폐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멀린의 독단에 원탁의 기사 하나가 소리를 높이려는 바로 찰나였다.

콰직!

“……!”

목소리를 높이려는 기사의 바로 눈앞에, 어느새 원탁을 꿰뚫고 물푸레나무 창이 꽂혀 있었다.

원탁왕이 자랑하는 신기 중 하나, 롱고미니아드.

“왕의 대화를 가로막지 마라, 가헤리스 경.”

“소, 송구합니다, 폐하!”

“상황도 상황이겠다, 점을 좀 쳐보니 어차피 우리의 왕께서도 동의할 거란 ‘운명’이 나와서.”

예지의 눈동자를 가진 마법사. 체사레와 함께 신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왔다고 불리는 고대의 괴물이자 요정.

“출진을 준비해라.”

멀린의 말을 뒤로하고 원탁왕 아서가 말했다.

“그 무엇도 왕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줘라.”

길을 나아가려는 자와 가로막는 자들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 * *

칠왕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데서 그렇게 멀지 않은 샤를마뉴 왕국군의 진지.

“다음부터 명령 없이 멋대로 부대를 이끌고 기병 돌격을 감행하는 놈은, 귀족이든 기사든 개의치 않겠다.”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의 앞에서, 보란 듯 남자의 시체가 나무 위에 목이 매달려 있었다.

‘멍청해도 이렇게 멍청할 줄은 몰랐다.’

기사의 시체를 목에 매달아둔 당사자, 시엔이 어이가 없어서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대머리왕 4세, 실질적으로 1공주 로젤리아 샤를의 뜻에 따라 샤를마뉴 왕국군의 ‘지휘’를 맡게 된 총사령관으로서.

“우리 조국의 백성들이 놈들의 손에 짓밟혀 더럽혀지고 있는데!”

“우리더러 이곳에서 손가락이나 빨며 저 약탈자 놈들을 지켜보고 있으란 말이냐, 이 명예도 모르는 놈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당장 전열을 갖추고 기병대를 꾸려 놈들을 물리쳐야 하오!”

“옳소!”

그러나 그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하는 샤를마뉴 왕국의 기사들이, 굴러온 돌에 지나지 않는 시엔의 말에 얌전히 복종할 리도 없었다. 특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명예라고?”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조소했다. 앞서 동토에서 보았던 ‘진짜 명예를 아는 자들’을 떠올리며.

“그렇다!”

“비열하기 그지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기사의 도를 알 리 있겠느냐!”

심지어 그곳에 있는 샤를마뉴 왕국 군대는, 그들을 지휘하고 있는 시엔의 정체를 모르는 것조차 아니었다.

‘무식하니 용감하지.’

혹은 용감해지기 위해 무식해졌거나.

“라힘 삼촌.”

기사들의 항의가 높아지는 와중, 시엔이 곁을 지키는 가족을 향해 비로소 중얼거렸다.

“알겠소, 시엔 형님!”

그 의미를 헤아린 라힘이 있는 힘껏 숨을 들이마셨다.

그 상태에서 다섯 손가락을 시험하듯 움켜쥐었다 펴고, 힘껏 바닥을 향해 주먹을 내리꽂았다.

지축이 요동치고 고막이 찢어지며, 머리뼈가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수준의 충격파.

“나는 그대들이 충성하는 왕실의 이름 아래 계약을 맺고 이 자리에 왔다.”

휘몰아치는 정적 속에서 시엔이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지금부터 내 명령에 불복종하는 기사들은, 왕실의 이름으로 가문과 작위를 박탈하고 왕국 사가(史家)들의 이름으로 역사가 끝날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주홍글씨를 씌울 것이다.”

“……!”

웃기는 일이었다.

오크들이야 죽고 나서 영혼이 평생 얼어붙은 대지를 떠돌 거란 공포라도 있지, 이 멍청이들을 협박하는 데는 그저 이걸로 족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명예는 그저 ‘남들의 눈에 어떻게 기억될지, 역사가의 손에 어떻게 기록될지’에 불과하다.

자기 존재를 가장 아름답게 박제해 우러름을 받으려는,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명예욕.

어째서 로젤리아 샤를이 그토록 기사도의 우상을 파괴하는 데 집착했는지, 이제는 이해를 넘어 동정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 * *

전쟁은 결코 하루아침에 시작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투는 그렇지 않다.

침묵하고 있던 칠왕국의 주력군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시엔 역시 마다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전투에서, 시엔 나이트워커는 결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샤를마뉴 왕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그들을 대리해 싸우는 전투의 사령관이자 ‘책임자’였으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은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자신이 당사자가 되어 치르는 전쟁을.

그러나 이것은 좋든 싫든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당사자가 되어 치를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전투 당일.

구릉지 위에 진을 치고 있는 칠왕국 군대의 대형을 보며 시엔이 혀를 찼다.

기사, 기병을 가릴 것 없이 병사 전부를 말에서 내리게 하고 방진을 구축해 오롯이 적이 돌격하기를 기다리며─ 양익(兩翼)에 역V자로 장궁병 부대를 배치하고 각종 장애물을 파둔 상태였다.

그리고 저 장궁병의 화살에 샤를마뉴 왕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 중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게 전쟁이다.

일찍이 누구도 그 앞을 가로막지 못할 것 같은 대륙의 최강자이자 패왕 아서의 죽음이, 어느 이름 없는 노병의 석궁에서 쏘아진 화살이었듯이─.

‘이 이상 지체하다가는 아군 기병대의 통제를 완전히 잃어버릴 거다.’

지금 상황에서 저 진지에 돌격하는 것은, 앞서 크레시 전투에서 샤를마뉴 왕국이 맞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자살 행위다. 그러나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이 세계에서 보통 병사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다고 해도, 결국 이 세계의 저울추를 움직이는 것은 소수의 강자들이다.

앞서 체사레가 오크들을 향해 ‘거스를 수 없는 강자’들의 무게를 보여주었듯이─.

이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밤을 걷는 자들이 그들의 강함과 신뢰를 증명할 차례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는 결코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 * *

그 시각, 마그레브 사막.

신화시대의 제국을 지배했던 황제(파라오)의 무덤을 발굴하기 위해, 신성 제국에서 꾸린 탐사대 최후의 생존자가 얼어붙은 석벽을 등진 채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고개를 들었다.

“아, 아…….”

검은 자칼의 머리를 가진 인간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에 있는 제국의 기사단, 마법사, 교회의 성직자 모두가 피하지 못한 죽음을 거느린 채.

아니, 그것을 인간이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그 ‘존재’는, 일찍이 어리석은 신화시대의 인간들이 신앙했다며 교회가 부정하는 거짓된 신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죽음의 신, 아누비스(Anub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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