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왕의 자세 (1)
좋든 싫든 전투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적진을 향해서 돌격을 시도하는 샤를마뉴 왕국의 기병대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결하고 명예로운 전투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불태울 기세였다.
“차징(Charging)!”
“성 드니의 이름으로!”
“우리는 보병이 필요 없다! 우리는 충분한 기사들이 있다!”
‘이런 미친 새끼들…….’
시엔이 앞서 귀가 닳도록 신신당부했던 지휘 체계나 통솔이 말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다. 일찍이 로젤리아 샤를이 느꼈던 절망이 그대로 엄습했다.
‘이딴 게…… 기사라고?’
샤를마뉴 왕국을 상징하는 백합 문장(플뢰르 드 리스)을 서코트에 새겨넣은 순백의 기사단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기병 돌격(랜스 차징)을 감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뜨겁게 불타는 열정 속에서 함께 공명해야 할 인간찬가의 의지…… 원 포 올이 울려 퍼지지 않는다.
애초에 눈앞의 무공과 명예욕(名譽慾)에 눈이 멀어버린 그들에게, 가슴 깊숙이서 하나로 결속하고 공명시킬 의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공허할 정도로 덧없이 울려 퍼지는 고함밖에 없었다.
‘이러니 졌지.’
그게 그들이 부르짖는 기사도의 실체였다.
바로 그때── 대낮의 파란 하늘이 어둠에 뒤덮였다.
하늘을 시커멓게 뒤덮는 그 정체는 마법이나 괴물의 힘도 무엇도 아니었다.
화살비였다.
칠왕국이 자랑하는 숙련된 장궁병들의 화살 세례.
물론 화살 정도로 기병들의 갑주는 쉽사리 뚫리지 않는다. 그러나 애초에 그들이 노리는 것은 기사 자체가 아니었다.
히이잉!
쏟아지는 화살비 속에서 군마들의 마갑(馬甲) 사이로 화살촉이 내리꽂히고, 말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낙마했다. 낙마와 함께 돌격하고 있던 기병 대열이 함께 고꾸라졌다.
쏴아아!
바로 그때였다. 하필 전투 직후에 쏟아지기 시작하는 폭우로 바닥 일대가 진흙탕이 되고 있었다.
‘요정왕의 예지 능력…….’
칠왕국의 책사(策士)는 아마 비가 내릴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음, 시작부터 망했네.’
어차피 시작부터 이렇게 망할 거란 사실 정도는 눈을 감고도 예측할 수 있었다.
* * *
“때가 되었다.”
무모할 정도의 기병 돌격을 감행하다 낙마하고 진흙탕 위에 엎어진 샤를마뉴 왕국 기사들을 보며, 곰처럼 커다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누구도 왕의 앞을 가로막을 수 없다.”
담담하게 읊조리는 동시에,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의 귀에 똑똑히 새겨지는 목소리로.
“누구도 왕의 앞에 설 수도 없다.”
누구도 앞에 설 수 없고 가로막을 수 없다. 그것이 왕도(王道)니까.
“농부, 사냥꾼, 양치기, 대장장이…… 이곳에 모여 있는 칠왕국의 병사 모두에게 알린다.”
원탁왕 아서가 육중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제부터는 그대들이 왕이다.”
“……!”
“그대들은 짐의 발이고, 짐의 무릎이며, 짐의 다리이다.”
왕이 포효했다.
“나아가라.”
그리고 이제는 그들이 왕이었다.
“누구도 왕의 앞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줘라.”
강철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는 쉽게 죽지 않는다.
아무리 화살을 퍼부어서 진흙탕에 낙마시켜 궁지에 몰리게 해도, 자기들끼리 버둥거리거나 밀치며 흙탕물에 빠져 질식하거나 압사당하는 정도. 이들의 멍청함을 고려했을 때 그 정도는 피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것이다.
기사를 죽이기 위해서는 결국 갑옷을 뚫고 칼날을 꿰뚫어야 했다.
그렇기에 진흙탕 속에 자빠진 샤를마뉴 왕국 기사들에게 쐐기를 박기 위해…… 비로소 왕의 두 다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일방적으로 내리꽂히는 화살비는 어느새 엄호 사격의 형태로 바뀌었고, 궁수의 엄호와 함께 칠왕국 군대가 움직였다.
기사들조차 말에서 내리고 보병들과 함께 철저히 방진을 지키며, 오합지졸의 샤를마뉴 왕국군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강력한 ‘원 포 올’을 펼치며.
그저 의지의 결속 하나로 가질 수 있는 규모의 그것이 아니다. 저 결속의 정체를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왕의 자세─.’
그중에서도 「왕의 포효」라 불리는 대군 강화 기술.
저것이 바로 칠왕국 군도의 패왕, 원탁왕 아서의 진짜 힘이었다.
어느덧 칠왕국의 보병들이 엎어진 기사들을 둔기로 제압하고, 허리춤의 단검을 꺼내 억지로 그들의 투구 바이저(Visor)를 열어 얼굴을 찔러 죽였다.
왕의 앞을 가로막는 그 무엇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일방적으로 펼쳐지는 도륙.
‘아직이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시엔이 생각했다.
돌격을 감행하여 진흙탕 위에 널브러진 그들 샤를마뉴 왕국의 기병대는 ‘미끼’에 불과하다.
저들에게는 애초에 많은 기대를 걸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칠왕국의 군대는 사실상 돈좌(頓挫) 사태에 빠진 샤를마뉴 왕국의 기병대를 도륙하는 와중에도 평정을 잃지 않고, 절대 흥분해 적들의 사이로 파고들거나 전열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어느 의미에서는 참으로 신사답다고 해야 할지.
그들 부대가 내디디는 걸음 하나하나가, 마치 왕의 걸음처럼 묵직하다.
하지만 아무리 미끼라 해도 그들 전부를 내줄 수는 없다.
그때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림자 기사가 시엔의 등 뒤에 모습을 드러냈다.
“돈 시엔.”
“말씀하세요.”
“검마 오스왈드가 직접 거느린 신성 제국의 철십자 기사단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베네토 공화국이 샤를마뉴 왕국과 동맹을 맺었으니, 신성 제국이 칠왕국과 동맹을 맺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검성 롤랑 경을 필두로 샤를마뉴 왕국의 12기사와 휘하 기병대가 도하 지점에서 진을 치고 있으나, 사도급 전력 등의 추가 세력이 가세할 경우 병력을 온존하며 이곳으로 합류하겠다는 뜻입니다.”
“알겠습니다.”
말하고 나서 시엔이 생각했다.
어느덧 이 자리에 대륙 최강의 강자, 원탁왕 아서와 검성 롤랑…… 심지어 신성 제국의 검마 오스왈드까지 집결해 있다.
어쩌면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를 비롯한 제국 국교회의 쥐새끼들이 움직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동시에 이것이야말로 시엔이 바랐던 전쟁의 형태였다.
훗날의 미래를 기억하는 시엔이기에, 지금이 바로 지금껏 자신과 그들 가문이 쌓아 올린 전부를 내걸고 배팅을 할 순간임을 직감했다.
‘이제 더 지체할 수 없다.’
그렇기에 시엔이 각오를 다지며 명령을 내렸다.
여기서 시엔이 기억하는 미래의 지혜 따위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이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역사를 써 내려갈 용기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형제자매들과 함께.
* * *
진흙탕 속에서 고꾸라지고 밀집되는 와중,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일대의 흙이 진창이 돼서 샤를마뉴 왕국군의 갑주 틈새와 강판 구석구석에 달라붙었고, 마치 늪에 빠지는 것처럼 허우적대다 죽음을 맞는다.
그렇기에 올 포 원의 의지로 결속된 왕의 군세가 승리를 확신하려는 찰나.
“La famiglia è tutto(가족이 전부다).”
감정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진흙탕 속에 고꾸라지고 뒤엉켜 죽음을 기다리는 샤를마뉴 왕국군을 미끼삼아, 그 속에 도사리고 있던 가족들이 하나둘씩 움직였다.
거추장스럽게 입고 있던 갑주를 팽개치고, 그 속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상징을 드러내며.
“가, 가, 가족이…… 전부야…….”
별과 단검의 문장(紋章)이 새겨져 있는 암살자들.
“나, 나에게는…… 가족밖에 없으니까…….”
「대량학살장치」 앨리스 나이트워커가 읊조렸다.
좋은 암살이 되기 위해서는 많은 목격자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는 조용함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그들의 방식은 지나칠 정도로 과시적이고 화려했으니까.
시민들이 오가는 광장에서,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은 귀족의 파티에서, 수천 명의 부대가 격돌하는 전쟁터에서─.
촤아악!
앨리스의 전신을 꿰뚫고 칼날의 뼈가 솟았다.
적이 아니라 당장 그녀의 몸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전신에서 사출된 칼날의 뼈. 마치 고슴도치처럼 칼날을 전신에 휘감고, 그녀가 움직였다.
가문의 5식 「가시나무의 자세」와 가문 최속(最速)의 검식이라 일컬어지는 8식 「달그림자의 자세」.
전신에서 칼날의 뼈를 발검(拔劍)하는 동시에, 칼날로 이루어진 몸이 적진에서 쇄도했다.
달그림자의 자세 ─ 《섬월》.
결코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땅을 박찬 일섬이 아니었다.
그녀의 전신에 솟아나 있는 칼날이, 마치 고속으로 회전하는 칼날 장치처럼 경로 위의 전부를 도륙내고 있었다.
전신에 솟아나 있는 뼈의 검을 무기 삼아, 칼날의 무희가 춤을 춘다.
그녀가 춤을 출 때마다 헤아릴 수 없는 인간들의 팔다리와 사지가 찢기고 창자가 흘러내리며, 의심할 여지가 없는 ‘대량학살’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역시, 나이가 드니 무거운 갑옷을 입는 것도 힘이 드네요.”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갑주를 벗자, 비로소 별과 단검의 문장이 새겨진 흑색 정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움직임에 알기 쉬운 화려함 같은 것은 없었다.
깨닫고 보니 병사 하나의 등 뒤로 움직여 칼날로 그의 목빗근과 경동맥을 내리긋고, 다음 상대의 팔을 꺾고 심장과 폐, 정확히 두 곳 급소에 칼날을 꽂아 넣었다.
아무도 비명을 지르지 못했다. 저항할 수도, 칼날을 맞부딪치지도 못했다.
그저 소름 끼치는 침묵과 죽음의 공포 속에서 차례차례 죽어갈 따름이다.
가장 완벽하고 기품 넘치는 암살자가 그곳에 있었다.
* * *
“고, 공화국의 사신이다!”
정체를 숨기고 있던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칠왕국의 병사들 사이에서 걷잡을 수 없는 죽음의 공포가 퍼져나갔다.
직전까지 승리를 확신하고 있던 표정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이 세상은 의지 하나로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으니까.
La famiglia è tutto(가족이 전부다).
전쟁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읊조리는 그 말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 그 자체였다.
저것이 바로 ‘밤을 걷는 자’다.
그리고 그들이 보란 듯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며 말하고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들이 처절한 저항 끝에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지 알려주기 위해서.
* * *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움직였습니다.”
그 시각, 전황을 내려다보고 있던 아서왕의 곁에서 랜슬롯 경이 속삭였다.
“우리도 원탁의 기사단을 움직일까요, 폐하.”
이 세계의 규모 있는 전투는 대개 다음처럼 치러진다.
가장 처음에는 보통의 병사들이 돌격하고, 그들끼리 보통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 싸움에서 어느 하나가 밀리는 순간, 그 밀리는 지점에 ‘강자’가 투입되어 전선의 붕괴를 막거나 역습을 노린다.
바로 지금, 침묵을 깨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움직이는 것처럼.
상대가 강자를 투입하는 이상, 이쪽도 같은 ‘강자’를 투입해 요격하거나 병사들로 강자의 발을 묶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저들로서는 결코 저 괴물들의 발을 묶을 수 없다.
“제국 측의 합류가 올 때까지 강자들을 섣부르게 움직이는 것은 좋지 않아.”
예지의 힘을 가진 아서왕의 책사, 멀린이 말했다.
“그래도 이 이상 병사들의 피해가 심해지는 것을 막을 필요는 있겠지.”
“병사들 전원에게 퇴각 명령을 내려라.”
아서왕이 말했다.
말하고 나서, 몸을 일으켰다.
“그사이, 내가 놈들을 막을 것이다.”
휘하의 그 어떤 강자도 거느리지 않고, 그저 홀로 곰처럼 커다란 거구를 일으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