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세계의 적 (1)
대륙 제일의 강자들이 모여들며 격발하는 대전쟁이 벌어지기 얼마 전.
“베네토 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샤를마뉴 왕국과 동맹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신성 로마누스 제국, 옥좌의 방.
“높은 확률로 가문의 하이마스터 전원이 움직일 수도 있는, 유례없는 지원 규모라고 합니다. 어쩌면 암살자들의 어머니까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최고 전력 전부.
그 의미를 헤아린 ‘남자’가 나지막이 표정을 찌푸렸다.
13계단의 하이마스터, 그리고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12사도 전원과 교회군을 투입할까요?”
“그들로서는 역부족이다.”
감찰성성의 장관급 추기경, 빌헬미나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젓는다. 제국 국교회가 자랑하는 최강의 전력조차 ‘그들’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듯이.
남자는 이 세상의 누구보다 나이트워커 가문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자신보다도 더.
문제는, 그들 역시 이제는 자신들의 힘을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공식적으로 움직이는 조직은 검마 오스왈드와 철십자 기사단으로 충분하다.”
“그럼─”
“우리가 움직일 것이다.”
* * *
왕의 자세, 올 포 원.
그것은 결코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강함이 아니었다.
왕으로서, 칠왕국 백성의 의지 전체를 짊어지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 없이는 감당할 수 없는 힘.
그리고 그에 맞서는 나이트워커 가문 최강의 강자가 있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그 곁에는 그녀의 대자이자 훗날 가문의 정점이 될, 《호수의 암살자》 시엔 나이트워커가 있었다.
알기 쉬운 대화 같은 것은 필요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갖는 진짜 힘이었다.
세례를 마친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을 잇는 모종의 결속이자 의사 공명, 일명 <텔레파시(Telepathy)>라 불리는 초상 능력.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를 가족으로서 성립하게 해주는, 피보다 강력한 무형의 결속.
실전에 앞서 미리 합을 맞출 필요도, 백 마디 말이나 제스처를 나눌 필요도 없다. 심지어 시시각각 바뀌는 전황 속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알 수 있었다.
나아가 가족끼리의 세례 이상으로, 대부모와 대자녀…… 부모와 자식의 관계로 맺어지는 ‘결속’은 훨씬 더 특별하고 강력하다.
바로 지금처럼.
쿠웅!
백성들의 의지를 홀로 등에 짊어진 아서왕이 검을 휘둘렀다.
「왕의 자세」─.
그 어떤 기교도 기술도 없다. 애초에 저것을 자세라고 불러야 할지, 검술이라 불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순수한 폭력과 파괴가 있었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진이 나며 대지가 찢어져 비명을 지르듯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이 세계를 부수는 것 같은 압도적 파괴.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화산이 폭발하고 태풍이 휘몰아치듯, 대지와 하늘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에 맞서 라일라는 평소처럼 그녀의 거미 허물 드레스 《위도우메이커》의 섬유로 죽음의 실을 드리우지 않았다.
소맷자락 속에 숨겨진 그녀의 단검 ‘죽음(La Morte)’이 서슬을 흩뿌렸다.
“영야(永夜)─.”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랜드마스터로서, 1식의 극의를 읊조린다.
콰앙!
마치 눈앞에서 태산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격 속에, 어느덧 라일라의 모습은 사라진 채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1식, 영야는 일대 시간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조정할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조종한다는 것은 꼭 ‘늦추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가속.
촤아악!
그와 함께 펼쳐지는 달그림자의 자세, 섬월(纖月).
1식, 7식과 함께 그녀 라일라 나이트워커를 그랜드마스터로 있게 해준 세 개의 검식 중 하나.
얼핏 보기에는 손에 들린 단검 ‘죽음’으로 일섬을 휘두른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깨닫고 보니, 그 칼날 위에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거미줄이 춤추고 있었다.
촤르륵!
마치 세계 그 자체를 찢어발기는 듯한 압도적 살의가 휘몰아쳤다.
세계를 부수고, 세계를 찢어발기는 공방.
그것이 이 시대 최강자들의 전투였다.
‘……!’
그 앞에서는 시엔조차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저기에 휘말렸다가는 시엔 자신의 목숨도 장담할 수 없을 테니까.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을 잇는 무형의 결속, 텔레파시는 결코 ‘일차원적 의사소통’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 가문이 갖는 가족의 결속은 그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시엔 역시 ‘왕 시해자’를 고쳐 잡는다.
감히 끼어들 틈조차 없어 보였던 최강자들의 싸움이, 비로소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라일라가 아서왕과의 전투 속에서 시시각각 보고 느끼며 갱신하는 정보를, 아서왕을 공략하는 라일라의 움직임을,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받아들였다.
상대의 정보를 얻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비록 극히 일부이기는 하나, 싸우고 있는 라일라의 강함과 경지 역시 시엔의 머릿속에 흘러들어왔다.
그야말로 한 몸이 된 것처럼.
‘싸울 수 있다.’
처음에는 끼어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그들의 싸움이, 이제는 시엔의 눈에도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휘몰아치는 뇌전(雷電)이 시엔의 몸에 깃들며, 마치 벼락이 질주하는 것처럼 시엔이 쇄도했다.
뇌전의 장갑을 따라 터무니없는 벼락이 내리쳤고, 그와 함께 오러의 힘을 폭발시키며 ‘왕 시해자’를 휘둘렀다.
직후, 뇌광과 함께 업화가 시엔의 전신을 불태우며 집어삼켰다.
뇌화(雷火).
뇌신의 불꽃.
어느덧 시엔의 두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청백색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6위계 전격 마법 ‘뇌안’이 아니다.
천둥망치 클랜의 수장, 토르비욘이 시엔에게 그들의 미래와 함께 맡겨준 신기 ‘묠니르’의 힘.
이전에 뇌안을 발동할 때는 비기 제비반전술을 통해 마력과 오러를 융합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몸에 깃든 뇌신의 힘을 이용해 자유자재로 이 세계의 ‘전기적 흐름’을 읽을 수 있었으니까.
천둥신의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정확하게 일대의 전기적 흐름을 감지하며 카멜레온처럼 움직였다.
파직!
어느덧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함께 호수의 암살자가 땅을 박찼다.
촤아악!
두 모자의 단검, ‘죽음’과 ‘왕 시해자’가 앞뒤로 왕의 몸에 핏줄을 내리그었다.
“훌륭하구나, 시엔.”
“어머님 덕이에요.”
“…….”
뚝, 뚝.
흐르는 피를 뒤로하고 아서왕이 고개를 들었다.
“고작 이 정도냐, 암살자들의 어머니여.”
왕이 말했다.
대륙 최강의 명검, 엑스칼리버와 최강의 창, 롱고미니아드를 각각의 손에 쥐고서.
지금까지 보여준 것들이 그저 아이들 놀음에 불과했다고 말하듯, 그의 손끝에서 ‘진짜 폭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그럴 리가요.”
아서왕의 도발에 라일라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웃는다. 그리고 시엔은 그녀가 왜 그리 말했는지 알 수 있었다.
쿠웅!
어느새 아서왕이 세워 올린 일대의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곳에─ 밤을 걷는 자들이 있었다.
가문 최강의 하이마스터 《웃는 남자》를 필두로 루치아노, 린, 헨젤과 그레텔, 앨리스.
그 외에도 가면과 망토를 둘러 얼굴과 정체를 감추고 있는 6명의 하이마스터.
끝으로 《호수의 암살자》 시엔 나이트워커까지.
나이트워커 가문의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 전원이 이 자리에 모여 대륙 최강의 기사 조직 중 하나, 원탁의 기사단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물러나는 게 어떻겠어요?”
그 긴장감 속에서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마치 그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듯이.
어느덧 폭우가 그치고 시린 밤하늘 위에 이지러진 달이 걸려 있었다. 대낮의 전투와 함성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물러나라고?”
아서왕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또다시 짐과 짐의 백성들을, 우리의 비좁은 섬으로 돌아가라 말하는 것이냐.”
“우리는 약속을 이행하고 있을 뿐이랍니다. 이 땅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지요.”
그 말에 아서왕의 표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대로 물러나세요.”
라일라가 말했다.
“그 대신, 우리 가문에 전쟁 자금을 위해 빌린 부채(負債)를 없던 걸로 탕감해 드리지요. 이곳에서 손에 넣은 약탈품 역시 마찬가지랍니다.”
“왜 그냥 우리를 죽이지 않지?”
아서왕이 물었다.
“말했듯이, 우리는 평화를 소중히 여기니까요.”
라일라가 미소 지었다.
“무엇보다 오늘의 적이, 꼭 내일의 적이리란 법도 없거든요.”
“…….”
아서왕이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했다. 바로 그때였다.
쿵!
무거운 강철로 된 갑주와 강철 군마(軍馬)를 타고, 철십자 문장이 새겨져 있는 중장기병들이 원탁의 기사단을 따라 합류했다.
칠흑의 중장기병대 사이에서, 어느덧 칠흑의 갑주로 전신을 무장한 남자가 말에서 내린다.
신성 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 전력─ 철십자 기사단장, 검마(劍魔) 오스왈드 그란델.
마찬가지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이들 뒤로 샤를마뉴의 12기사…… 정확히는 그중 두 명이 장궁병의 화살에 맞고 죽어 열 명이 된 팔라딘들이 합류했다.
그들의 수장인 검성 롤랑과 함께.
병사는 없다. 이곳에 있는 것은 오직 강자, 그것도 하나하나가 전투 그 자체를 결정 지을 힘을 가진 압도적 강자들이다.
그리고 그 강자들마저 이 자리에 모인 네 명의 최강자들 앞에서는, 그저 ‘일개 병사’에 불과할 것이다.
“전쟁과 평화, 그것이 늘 네놈들의 방식이었지.”
아서왕의 곁에서 검마 오스왈드가 싸늘하게 조소했다.
칠왕국과 신성 제국의 동맹.
샤를마뉴 왕국과 베네토 공화국의 동맹.
얼핏 보기에는 네 강대국의 최고 전력이 두 쌍으로 나뉘어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리라.
하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신성 제국의 철십자 기사단, 칠왕국 연방의 원탁의 기사단, 샤를마뉴의 12기사.
그 누구도 이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설령 여기 있는 세 국가의 기사 조직 전부를 적으로 돌려도 나이트워커 가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신성 제국이 자랑하는 철십자 기사단, 칠왕국 연방이 자랑하는 원탁의 기사단, 샤를마뉴 왕국이 자랑하는 12기사. 호사가들끼리 누가 대륙 최강의 기사 조직인지 아무리 떠들어도, 까놓고 말해 결론이 날 리 없는 탁상공론이다.
예를 들어 철십자 기사단이나 원탁의 기사단, 샤를마뉴의 12기사를 구성하는 이들이 통상 100의 전투력을 갖는다 치자. 그럼 그들 둘이 모일 경우에는 합계 200의 전투력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 열두 명 모두가 모일 경우, 오스왈드나 아서왕, 롤랑급 강자를 제외하면 1200이란 비슷비슷한 수치가 나올 것이다.
그러니까 대륙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이다.
오직 하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이들을 제외하고.
가령 100의 전투력을 갖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두 명이 모일 경우, 그들의 전력은 그저 알기 쉬운 덧셈으로 200이 되지 않는다.
그들의 전력은 모일수록 덧셈도 아니고, 심지어 곱셈도 아니며, 제곱이 되니까.
앞서 시엔과 라일라가 그랬듯이.
─이 자리에 있는 열세 명의 하이마스터와 가주 모두가 하나로 결속될 테니까.
“결정은 그대들의 몫이랍니다.”
지금의 라일라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게 그들의 힘이고, 더 이상 적들의 눈치를 보며 비굴하게 이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 가문과 전쟁을 치르고 모든 것을 잃어버릴지─”
동시에 이 대륙에는, 그들 가문의 힘을 갖고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진짜 적’이 있다는 사실을.
“혹은 우리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타협하며 ‘평화’를 택할지.”
나이트워커 가문은 비로소 각오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