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세계의 적 (2)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설마 이것이 ‘제국의 약속’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바로 그곳에서, 원탁왕 아서가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고작 철십자 기사단과 검마를 보내준다고 해서, 네놈의 전력 따위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 놈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나?”
아서왕의 조소에 검마 오스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그와 말싸움을 할 기력도 없었고, 애초에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이곳에 있는 대륙 최강의 기사 조직 전부를 돌려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13계단’이라 불리는 최고 전력─ 하이마스터다.
저들 모두가 전장에서 하나로 결속될 때, 그들이 가지는 의사 공명이나 무형의 결속은 ‘원 포 올’ 따위와 감히 비교를 불허하니까.
“약속은 이행될 겁니다, 아서왕.”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렸다.
검마 오스왈드에게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증오스러운 원수의 목소리였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여기서는 ‘우리’가 나이트워커 가문을 상대할 테니까요.”
제국 국교회 감찰성성의 장관 추기경.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 ‘우리’는 결코 그녀가 거느린 제국 국교회의 사도 따위가 아니었다.
13명의 남녀들이 그곳에 있었다.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검, 검마 오스왈드조차 얼굴을 알지 못하는 낯선 이들이.
“!”
신성 제국의 황실을 상징하는 쌍두독수리가 아니라, 칠흑의 《쌍두까마귀(Double-headed Raven)》를 문장으로 새겨넣은 새하얀 코트를 입은 채.
교회의 추기경이어야 할 빌헬미나 아퀴나스 역시, 평소 즐겨 입는 수녀복 차림이 아니었다. 칠흑의 베일조차 쓰고 있지 않았다.
그저 칠흑의 쌍두까마귀가 새겨진 코트 차림으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을 마주했다.
그 모습에 더 이상 제국 국교회를 섬기는 추기경, 성직자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아직 늦지 않았어, 라일라 아퀴나스 언니.”
그 어느 때보다도 검게 빛나는 사신의 낫을 쥐고서 말했다.
“진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자.”
“…….”
기척조차 없이 원탁의 기사단과 철십자 기사단의 사이에 있는 그들, 자기들을 《가족(Family)》이라 일컫는 자들이 말했다.
동시에 그들의 존재 앞에서 당황하는 것은, 누구보다 황제의 충성스러운 검을 자처했고 제국의 칼날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남자였다.
그럼에도 보고 나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곳에 있는 이들 하나하나를 놓고 봤을 때는 당대의 최강자를 자처하는 자신에 비할 경지는 아니나, 그곳에 있는 그들의 전력 자체는 충분히 자신을 압도하고도 남는다는 것을.
휘하의 철십자 기사단이나 제국 국교회의 12사도 따위는 애초에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다.
마치 또 하나의 나이트워커 가문이 있는 것 같은 감각.
그 정도의 강자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존재를 극비리에 감추어 왔다.
심지어 제국의 가장 충성스러운 검 그란델 자신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싸워왔나?’
오스카가 그 꼴을 당했을 때, 그란델 대공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전부를 걸고 빌헬미나 아퀴나스를 압박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교회도 황실도, 그가 누구보다 충성을 바치고 평생을 섬겨온 ‘황제’조차 그를 무시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것이 바로 자신이 충성을 바쳐온 제국의 진짜 전력이고, 진짜 제국의 지배자들이며, 제국에게 있어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처음부터 검마 오스왈드 그란델와 그의 대공 가문은 진정으로 제국의 일부에 포함되었던 적이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허무했다.
그리고 그 허무함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증오로 거듭났다.
그렇기에 움직였다.
칠흑의 중장갑주로 전신을 휘감고 있는 검의 악마, 대륙의 최강자라 일컬어지는 검마(劍魔)의 칼날이 휘둘러졌다.
그의 곁에 있는, 쌍두까마귀 문장을 새겨넣은 새하얀 코트 차림의 빌헬미나를 향해─.
“아, 참으로 어리석기도 하셔라.”
검마의 일격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빌헬미나가 웃었다.
그 대신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가족들이었다.
“사냥개 따위가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네.”
올백 머리의 남자가 조소하며 검마의 일격을 가로막았다. 소맷자락 밑에 숨겨진 단검을 암살자처럼 쥐고.
“지금껏 우리 제국에 바쳐온 그대의 충성을 고려해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답니다, 그란델 대공.”
가족들의 검 앞에 지켜지며, 빌헬미나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우리 제국 앞에 충성을 바치시겠나요?”
우리 제국.
그녀는 더 이상 신의 이름도 교회의 이름도 입에 담지도 않았다.
그녀는 성모도 무엇도 아니다. 더없이 세속(世俗)에 물들어 있는 제국의 인간이었다.
대답할 가치조차 없는 물음이었다.
“웃기지 마라.”
검마의 등 뒤에서 칠흑의 오러가 날개처럼 펼쳐졌고, 그대로 휘둘러졌다.
마치 이 세상의 악(惡) 그 자체가 응축된 것 같은 악의의 검을.
「사탄의 자세」.
촤아악!
그들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 뜻밖의 당혹이 깃들었다. 철십자 기사단도, 원탁의 기사단도, 누구에게 장단을 맞춰 싸워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야, 볼 때마다 느끼는데 저 동네는 진짜 콩가루가 따로 없다니까.”
《웃는 남자》 요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남의 일처럼 웃었다. 그러나 ‘남의 일처럼’ 웃는 것은 그밖에 없었다.
“저것들…… 대체 뭐야?”
그레텔이 경계의 빛이 어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강해.”
헨젤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모를 그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마찬가지로 그들이 ‘진짜 가족’이라고 일컬은 라일라 나이트워커 역시, 말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
* * *
칠흑의 기사가 검을 휘둘렀다. 그곳에 있는 누구보다 증오스러운 적, 빌헬미나 아퀴나스를 향해서.
“철십자 기사단의 수장으로서, 마지막 명령을 내린다.”
동시에 남자가 말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싸움이다. 너희들이 개입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철십자 기사단의 수장, 검마 오스왈드가 말했다.
“그렇기에 나를 버리고 충성을 바치지 마라. 계속해 지금처럼 제국에 충성을 바쳐라.”
그가 거느린 휘하의 기사들을 향해서.
“나는 오늘, 이 자리에서 역모(逆謀)로 죽을 테니까.”
“……!”
“아, 결국 그게 대공 각하의 뜻이로군요.”
그 말에 빌헬미나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로 그때였다.
“단장님을 지켜라!”
철십자 기사단의 흑기사들이 어느덧 검마의 주위로 모여들며 저마다의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 앞에서 빌헬미나가 하찮은 듯 조소했다.
“아, 이래서 기사란 족속들은 정말이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 주군을 향해 충성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리고 그렇게 죽는다.
“아무래도 재고의 여지가 없겠네요.”
그렇게 말하며 빌헬미나가 그녀의 손에 들린 칠흑의 낫을 고쳐 잡았다.
“그럼 죽을 수밖에.”
아무리 검마 오스왈드가 대륙의 최강자라고 해도, 빌헬미나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그녀가 숨겨둔 전력은 아마 그 이상일 수도 있으리라.
그 자리에 있는 쌍두까마귀의 가족들이 그렇듯이.
“「사신의 자세(Grim Reaper Stance)」.”
* * *
휘몰아치는 죽음의 기류 속에서 사신의 낫이 휘둘러졌다.
그것은 이미 싸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패밀리에 의해 벌어지는 일방적 학살이었다.
《죽음의 성모》가 그곳에 있었다.
아니, 성모조차 아니다. 저것은 죽음의 신이었다.
그렇게밖에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기 그지없는 살육.
설마 대륙 최강의 기사 조직이라 일컬어지는 철십자 기사단과 그들의 수장이 이토록 허무하게 쓰러질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사신의 낫이 휘둘러졌고, 대륙 제일의 강자가 쓰러졌다.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패밀리에 의해 벌어진 일방적 학살.
마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기사를 도륙하는 것처럼,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수 없는 압살.
“아, 본의 아니게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그리고 검마 오스왈드를 향해 최후의 일격을 꽂아 넣은 올백 머리의 미남자가 말했다.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을 향해서.
마치 밀랍으로 된 얼굴처럼 생기와 감정 없는 표정을 하고서, 섬뜩할 정도로 작위적이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너희는…… 누구지?”
그들을 향해 밴시 린이 차갑게 되물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올백 머리의 남자가 대답했다.
“우리는 ‘가족(Family)’이라고.”
그 곁에서, 얼핏 그레텔처럼 어려 보이는 금발 소녀가 대답했다.
“진짜 가족이지.”
진짜 가족.
“너희 가문 같은 거짓으로 점철된 ‘가짜’가 아니라.”
“우리가 왜 가짜야?”
양 갈래로 땋아 올린 금발 소녀의 말에, 마녀 그레텔이 대답했다.
“내가 보기에 너희야말로 ‘우리 가족’을 흉내 내는 가짜 같은데?”
“왕바보 멍청이.”
“바보라고 말하는 사람이 바보야.”
“네가 마지막으로 바보라고 했으니, 네가 바보지롱!”
그레텔의 말에 금발 소녀가 조롱했다. 어린아이답게 유치하고 알기 쉬운 조롱이었다.
“주위를 둘러봐, 이 바보야!”
금발 소녀가 말했다.
“네 주위에 있는 점철된 거짓, 진짜는 아무것도 없지, 그런 주제에 그 거짓을 자신의 전부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네가 불쌍해.”
어린아이의 천진한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로.
“너희는 그냥 가족 놀이를 하는 것뿐이야.”
가족 놀이.
“갈 곳 없는 외톨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말이지.”
“…….”
금발의 소녀가 조롱했다.
침묵하고 있던 시엔의 손에 들린 블랙 미스릴 소재의 칼날, 이모 그레텔이 ‘사랑하는 조카’에게 준 칼날 끝자락을 따라 마력이 휘몰아친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검고 어두운 악의로 가득 찬 살의의 검.
그 무엇보다 이글거리는 증오로 가득 찬 죽음의 칼날.
《네버모어(Nevoermore)》.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전부를 부정하는 존재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었다.
바로 지금, 시엔의 눈앞에 그들이 있었다.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은 이성을 가까스로 지탱하는 게 고작이었다. 이대로 땅을 박차고 쇄도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시엔이 차갑게 미소 지었다.
‘계획대로다.’
이제는 대륙 모두가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대륙의 ‘모난 돌’은 더 이상 나이트워커 가문의 전유물이 아니란 사실.
심지어 오늘의 적이었던 원탁왕 아서와 칠왕국조차, 그들의 존재를 보고 나서는 생각을 재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강력한 전력을 갖고 있는 제국에게, 그 전부를 합친 이상의 힘을 가진 전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대륙의 저울추는 이것으로 완벽하게 무너질 것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아니라, 바로 그곳에 있는 쌍두까마귀의 문장을 공유하는 가족들─ 《패밀리》의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