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15화 (115/200)

115화. 재회 (2)

“……나를 쓰러뜨린다고 했나.”

“가족을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거든요.”

시엔의 대답에 비토 나이트워커가 즐거운 듯 웃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과 대화를 나누듯이.

“하이마스터 서품을 받을 때와는 다를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비토의 망령은, 이미 시엔이 3식 명경지수의 극의에 이르고 손에 넣은 ‘불꽃의 정체’를 알고 있다.

게다가 이 이상 적당히 손대중하는 일도 없이, 그의 전력을 다하겠지.

망령, 명경지수, 달그림자.

1식과 3식, 8식의 그랜드마스터로서.

물론 눈앞의 남자는 진짜 그랜드마스터가 아니다. 아무리 루나의 지혜 속에서 정교하게 조립되었다 해도 결국 가짜에 불과하니까.

‘지금의 가짜 그랜드마스터조차 이기지 못하는 이상, 쌍두까마귀의 가족을 상대로 승산이 없다. 무엇보다도─.’

이제부터 시엔이 싸우게 될 적들, 그 적들의 정점에 있는 남자는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렇기에 강해져야 했다. 지금 이상으로 더더욱.

“《영야(永夜)》.”

비토가 1식의 오의를 읊조렸다. 시간을 늦추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시곗바늘을 빠르게 돌리고 가속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의 흐름이 가속된 비토의 육체가, 가문 최속의 검식이라 일컬어지는 8식 달그림자의 자세를 취했다.

《섬월》.

그것은 이미 움직임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조차 아니었다. 깨닫고 보니 비토는 이미 시엔의 눈앞에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란 말도 부족했다.

그저 움직였다는 「결과」가 남아 있을 뿐.

어느덧 그의 소맷자락 밑에 숨겨진 순백의 미스릴 소재 단검 ‘백귀’가 휘둘러졌다.

카앙!

어지간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강자조차 쉽사리 맞받아칠 수 없는 신속의 일격.

그러나 그 일격을 블랙 미스릴 소재의 단검 ‘왕 시해자’로 맞받아치며 시엔이 자세를 취했다.

“호오, 그 눈동자…….”

초점을 잃은 청백색의 눈동자를 하고, 전신에 뇌전과 이글거리는 업화를 덧씌운 채.

벼락의 신, 토르의 무기라 불리는 신기 묠니르의 힘.

지금 시엔의 눈동자는 그저 보통의 6위계 뇌전 속성의 마법 ‘뇌안’이 아니었다.

뇌신의 눈이다.

바로 그 뇌신의 눈동자가 보는 것은 움직임 따위가 아니다. 심지어 움직임의 전조조차 아니었다.

상대가 움직이려고 마음을 먹는 즉시, 뇌에서 발생하고 신경을 따라 이동하는 생체 전기신호를 미리 해독하고 앞서 대처하는 것이다.

상대가 움직이려고 ‘생각하는 찰나’에 앞서 움직이는 능력.

그야말로 신기(神技)란 말로밖에 형용할 수 없는 대처.

“사고(思考)를 읽는 힘이라, 실로 경이롭군.”

능력의 정체를 헤아린 비토가 놀라운 듯 중얼거렸다.

“설마 신기 묠니르의 힘을 그 정도까지 다룰 줄이야.”

일찍이 천둥망치 클랜의 야를이 그들 부족의 미래와 함께 시엔에게 넘겨준 유지.

묠니르 그 자체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뇌전의 정수다. 그 뇌전을 이해하고 다루는 것은 결국 사용자의 역량 나름.

공교롭게도 시엔은 이미 뇌전 속성의 마법을 6위계 마스터 경지로 구사하는 ‘고위 뇌전 마법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뇌전의 정수를, 마력이 아니라 순수하게 신기 묠니르의 힘에서 끌어내 오러와 함께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다.

그야말로 범에 달아준 날개.

지금의 시엔에게 있어 이 묠니르는, 감히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 하나를 통달하는 것과 맞먹는 가치를 갖는다.

파직, 파지직!

시엔의 존재를 집어삼킬 것처럼 휘몰아치는 뇌전과 불꽃…… 뇌신의 업화(雷火)를 덧씌운 시엔이 손에 들린 칠흑의 미스릴 단검 ‘왕 시해자’를 고쳐 잡았다.

여전히 시엔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맑고 고요했다.

깨닫고 보니 어느덧 시엔 일대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칼날이 끝없이 생성되고 있었다.

염동 학파의 2위계 마법 《사이킥 나이프》.

염력으로 생성된 수십, 수백 자루의 칼날들이 마치 폭격처럼 눈앞의 비토를 향해 내리꽂혔다.

가문의 9식 「크라켄의 자세」.

그러나 결코 눈을 가린 채 무차별적으로 쏘아지는 폭격이 아니다.

초점 없는 시엔의 청백색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일대 영역의 전기장을 해독하며 정교하게 사이킥 나이프를 유도하는 것이다.

‘근육이나 세포 단위에서 전기적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는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전기적 신호는 오직 하나, 루나의 뇌(腦)와 뉴런 시냅스에서 발생하는 생체 전류다.

눈앞의 존재는 어디까지나 그녀의 지혜 속에 존재하는 망령에 불과하니까.

‘까다롭군.’

그 까닭에 눈앞의 상대를 직접적으로 읽을 수가 없다.

시엔이 읽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 세계에 까마득하게 드리워진, 루나의 ‘심층 의식’에서 벌어지는 뇌세포와 시냅스의 전기신호 그 자체.

그렇기에 어떤 점에서는 유리하고, 어떤 점에서는 그렇기에 더더욱 불리하다.

“9식의 가장 손쉬운 파훼법을 알고 있나.”

동시에 눈앞의 상대는, 가문의 그랜드마스터이자 9가지 검식 모두에 통달해 있는 역대 최강자 중 하나.

“모를 리가 없겠지.”

아무리 정교하게 유도했다 해도 고작 이 정도의 사이킥 나이프 폭격에 당할 리 없다.

카앙!

깨닫고 보니, 비토 역시 어느새 염력 마법을 써서 벼린 사이킥 나이프로 시엔의 나이프를 요격하고 있었다.

서로 그 자리에 서서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들 주위에서 염력으로 벼린 수십, 수백 자루의 사이킥 나이프와 보이지 않는 손들이 교차하고 있다.

마치 형체 없는 암살자들의 군세(軍勢)가 격돌하는 듯한 착각.

‘!’

바로 그 착각에 빠진 시점에서─ 시엔의 실책이었다.

“뇌안으로 상대의 움직임을 읽는 데는 고도의 집중력이 소모되지.”

시엔이 깨달을 틈조차 없이 쇄도하며 비토의 단검이 휘둘러졌다.

“하물며 지금처럼 대규모의 격돌 속에서는, 더더욱 상대의 사고를 해독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카앙!

가까스로 맞받아치기는 했다.

그러나 가문 최속의 검식이라 일컬어지는 8식, 달그림자의 자세는 결코 쇄도(殺到)가 전부가 아니다.

8식의 진짜 위력은 결코 거리를 좁히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거리를 좁히고 나서부터 진짜 시작이었으니까.

“《월식(月蝕)》.”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져 「달을 좀먹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그 기술명의 유래처럼 시엔의 그림자에 가려진 비토는, 어느새 달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망령, 명경지수, 달그림자.

첫 밤의 아들이란 말처럼, 눈앞의 남자에게는 결코 뜨겁게 타오르는 그 무엇도 없었다. 그저 너무나 암살자답게 고요하고 침착하며 냉정하다.

달그림자가 된 망령이, 흔들림 없는 명경지수 속에서 비로소 ‘그랜드마스터의 전력’을 내뿜었다.

시엔 역시 여기서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감출 이유도 없었다.

“「나락의 자세(Naraka Stance)」─.”

1식 망령의 자세, 3식 명경지수의 자세, 끝으로 시엔 나이트워커를 그랜드마스터로 있게 해준 가문의 6식.

과거로 돌아오고 나서 백지부터 새로 가르침을 쌓아 올린 시엔이다. 검식을 마스터하는 순서도 바뀌었고, 심지어 마스터라고 지레짐작했던 경지를 뛰어넘어 그 이상의 영역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 올린 ‘새로운 시엔’ 위에, 이제는 ‘훗날의 시엔’을 겹칠 때였다.

망령과 명경지수, 나락.

─달그림자와 나락의 검이 격돌했다.

검의 자세는 강한 자세일수록 강하다고 하는 일방적 먹이사슬의 형태가 아니다. 오히려 서로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물리는 상성에 가깝다.

부드러움이 묵직함을 잡아먹고, 그 부드러움을 빠름이 잡아먹는다.

끝으로 빠름을 잡아먹는 것은 정작 부드러움에 잡아먹히는 처음의 묵직함이다.

그렇기에 가문 최속의 검식에 맞서, 최강의 카운터라 할 수 있는 ‘묵직함’이 깃든 나락의 검이 펼쳐졌다.

“!”

묵직함은 빠름을 잡아먹는다.

어째서일까?

“《무소의 뿔》.”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동방 대륙의 어느 성자(聖子)가 남겼던 말처럼, 그것이 바로 묵직함의 진짜 위력이었다.

일찍이 아서왕이 보여준 왕의 자세와 같다.

왕은 남들의 눈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홀로 나아갈 따름이다.

시엔의 검 역시 마찬가지였다.

터무니없는 힘과 무게가 실린 천근(千斤)의 일검.

압도적 속도로 시엔의 전신에 끝없이 생채기를 쌓아 올리며 농락하고 있던 비토의 검이, 비로소 멈춘다.

멈출 수밖에 없었다.

지금 시엔이 펼치는 저 나락의 검 앞에서는.

타앗!

절대 힘으로 맞받아칠 수 없다. 피해야 했다. 그렇기에 비토가 어느새 땅을 박차고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벌린 동시에, 시엔의 검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휘둘렀다.

후웅!

의심할 여지가 없는 틈이다. 그러나 비토는 그 틈을 노리고 뛰어들지 않았다.

저것은 함정이니까.

《나락의 늪》.

일부러 헛손질하며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흐트러진 틈을 노려 상대의 역습을 유도하는 함정의 초식.

“그 경지는 설마…….”

그렇기에 비토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저 기술은 결코 6식의 오의(奧義)가 아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 알고 있었다.

기술의 마스터를 자처하는 것은 오의를 쓸 수 있느냐 없냐 같은 알기 쉬운 척도가 아니다. 오히려 시엔이 갈까마귀 자세의 오의 ‘네버모어’를 쓸 수 있음에도 결코 4식의 통달을 자처하지 않듯이.

자세의 통달은 결국 철저하게 기본에서 비롯된다.

그 관점에서 지금 시엔이 펼치고 있는 나락의 자세가 보여주는 경지는, 감히 의심할 여지가 없는 6식의 마스터 그 자체였다.

─1식과 3식, 어느 검식하고도 충돌하지 않고 어그러지지 않는 조화의 경지.

그들 정도의 강자는 하나를 보고도 열을 헤아릴 수 있다. 하물며 그 누구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을 잘 이해하고 있는 비토이기에 더더욱.

“벌써……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것이냐.”

“그거야 부르기 나름이지요.”

누군가의 납득과 동의를 얻는 것이 그랜드마스터를 정의하는 척도라고 했을 때, 시엔은 분명히 그랜드마스터가 맞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 아직은 아닙니다.”

시엔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거이자 훗날에 손에 넣게 될 경지를, 지금의 ‘새로운 그릇’에 붓는다. 그게 다였다.

지금까지 미숙했던 육체로는 감당할 수 없었던 훗날의 지식과 경지. 이제는 달랐다.

“!”

바로 이 순간, 시엔이 겪게 될 미래이자 과거가 지금과 겹쳤다.

겹치며 교차하고 나서도, 여전히 시엔 나이트워커는 완성되지 않았다.

‘아직 불완전하다.’

이제는 때가 되어 머릿속에 들어 있는 훗날의 경지와 깨달음, 지식을 모조리 지금의 그릇에 부어 체화(體化)시켜도 시엔이란 존재는 완성되지 않는다.

동시에 그 불완전함이 갖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시엔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을 준다.

‘아니, 아직이다.’

아직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더 강해져야 했다.

시엔이 쓰러뜨리지 못했던 제국, 그리고 제국 그 자체였던 남자는 고작 그랜드마스터 따위의 경지로 어쩔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묠니르와 운명의 창, 다시 돌아와 손에 넣고 갈고닦은 깨달음, 새로운 육체, 지금까지 쌓아 올린 경지와 새롭게 달군 그릇 위에 덧씌운 과거의 잔재(殘滓)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나이트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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