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악몽 (1)
지금으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서야 겨우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경지.
대륙의 그 누구보다 강했고 제국의 그 누구보다 강했으나, 제국 그 자체를 쓰러뜨릴 정도로 강하지는 못했던 훗날의 시엔.
나이트워커 최후의 가주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라 불리게 될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갓 성년이 된 어리고 불완전한 육체에.
“너는…… 대체 누구지?”
보자마자 비토가 직감했다.
“저는 저입니다.”
바로 직전까지 자신이 상대하고 있던 시엔과, 지금 그가 마주하고 있는 시엔 사이에는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천 리의 격차가 있다는 것을.
타앗!
그 상태로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쇄도했다.
이글거리는 뇌신의 업화와 함께 휘둘러지는 나락의 검.
고작 수십 센티미터의 단검에 불과함에도, 그 일격 하나하나가 마치 무식하게 커다란 대검으로 내려찍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 달라진 것은 그게 다가 아니다.
직전까지 펼치고 있던 1식과 3식 역시,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해졌다.
어느덧 그것은 싸움이라고 부를 수조차 없었다.
그저 완벽하게 펼쳐지는 시엔의 압도였다.
보고 나서 깨달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짜 그랜드마스터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비토 나이트워커는, 결국 가짜 그랜드마스터에 불과했다.
─거짓된 첫 밤의 아들과 진정한 암살자들의 아버지.
휘둘러지는 시엔의 ‘왕 시해자’가 비토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똑같이 1식 망령과 3식 명경지수의 마스터를 자청하며, 유일하게 그들을 구별하는 검식은 8식 달그림자와 6식 나락의 자세.
검의 묘리와 상성상 완전히 카운터가 되는 검식을 구사하며, 아울러 진짜 그랜드마스터가 된 시엔을 지금의 ‘가짜 그랜드마스터’가 당해낼 리 없다.
“역시 가짜는…… 진짜를 이길 수 없나.”
나락으로 빠지는 듯한 시엔의 공세 속에서 비토가 중얼거렸다.
“당신이 가짜라 패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비토.”
“그럼 어째서지?”
“제가 더 강하니까요.”
시엔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와 함께 시엔이 펼치는 6식 나락의 자세, 그 극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락의 꽃(奈落華)》.”
검은 꽃이 흐드러졌다.
꽃이 피어올랐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사방 일대에 흐드러진 꽃잎이 녹아내리며 칠흑의 못으로 거듭났다.
딛고 있는 발밑 일대가, 어느새 벗어날 수 없는 나락의 구렁텅이로 바뀌어 있다.
바로 그 오의를 앞두고 비토는 그저 웃었다.
과거의 망령 따위는 결코 당해낼 수 없는 진짜의 무게. 그 압도적 힘과 폭력 앞에서 그저 경외했다.
시엔의 검이,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미래를 짊어질 검이란 사실에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기억하거라, 시엔.”
촤아악!
쐐기를 박아넣는 최후의 일격 속에서, 첫 밤의 아들 비토가 담담하게 읊조렸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가족을 향해 속삭이듯이.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란 것을.”
칠흑의 꽃이 흐드러졌다.
* * *
쨍그랑!
지혜의 고리, 제2의 고리 ‘재회’가 깨지고 두 사람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커헉!”
두 사람을 잇고 있던 사슬이 무너져 내리고, 그 후폭풍을 감당하는 것은 오롯이 콘실리에리 루나의 몫이었다.
“루나 님.”
시엔이 재빨리 무너지는 그녀의 어깨를 부축했다. 루나가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바라는 깨달음을…… 얻었느냐?”
자기 몸보다도, 시엔이 바랐던 결과를 손에 넣었는지를 궁금해하며.
하이마스터의 견진성사를 치를 때 이상으로 루나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눈에 띄는 알기 쉬운 상처 따위는 없다. 그저 입술 사이로 흐르는 핏물과 코피, 가빠진 호흡 정도.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타격을 감수하는 것은 오로지 루나의 정신세계다.
가족을 위해,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마모(磨耗)해가며 헌신하고 희생하는 다크 엘프.
그렇기에 시엔이 루나를 눕히며 손을 맞잡는다.
그대로 제대로 거동조차 하기 어려운 그녀를 위해 회복약을 머금고, 입에서 입으로 넣어준다.
“얻었어요.”
약을 머금고 흘려준 시엔이 말했다.
“그 남자, 밤의 아버지와 그의 거짓된 가족들에게 맞서 우리 가족을 지킬 진짜 힘을.”
“……그것참 다행이로구나.”
잿빛 피부 위로도 창백해진 혈색이 드러날 정도로 루나의 표정이 초췌하다. 그럼에도 루나는 시엔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에 더없이 흡족하게 미소 짓는다.
마치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이.
시엔이 재차 또 하나의 회복약 뚜껑을 열고 액체를 입에 머금었다.
얼핏 물처럼 쓰는 약처럼 보여도, 공화국 귀족들조차 대량의 출혈을 감내하며 ‘몇 방울’을 구하는 것도 벅찬 값비싼 영약.
대륙에서 가장 값비싼 약이라 일컬어지는 엘릭서(Elixir).
그 치유의 영약을 말 그대로 물처럼 펑펑 쓰고 있다.
“그쯤 하거라, 시엔.”
어느새 네 병째 뚜껑을 따려는 시엔을 보고, 루나가 됐다는 듯 팔을 뻗어 제지했다.
“이걸로도 이미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
“신경 쓸 것 없어요, 루나 님.”
그러나 제지하는 루나의 팔에 가볍게 힘을 주어서 가로막고, 시엔이 재차 네 병째의 엘릭서를 입에 머금고 흘려 넣었다.
“오히려 차고 넘칠 정도로 남아도는 것은 엘릭서 쪽이죠.”
루나는 그렇지 않다.
“고마워요, 루나 님.”
그녀는 시엔에게 있어 하나밖에 없는 가족이니까.
“……고집 하나는 그야말로 네 어머니를 쏙 빼닮았구나.”
그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실제로 피로 이어진 알기 쉬운 형태의 가족 따위가 아니다. 그것은 라일라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정한 가족이었다.
가족을 위협하는 최악의 적들, 쌍두까마귀의 가족들이 서로를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는 것처럼─.
* * *
그랜드마스터급 강자와의 상대를 통해, 시엔의 머릿속에 존재하고 있던 훗날의 경지를 완전히 지금의 육체에 정착시켰다.
그렇다고 진짜 수십 년 뒤, 암살자들의 아버지였던 시절의 100% 전력을 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시엔이 바라는 바조차 아니었다.
아직 시엔은 불완전하니까.
동시에 이 불완전함이야말로 훗날 자신조차 손에 넣지 못했던 경지에 닿게 해줄 열쇠였다.
이제부터 시엔이 나아갈 길은, 훗날의 시엔조차 걸어본 적 없는 미지의 길이다.
대륙의 정세와 미래 역시 달라졌다.
‘바꿀 수 있는 것들은 전부 바꾸었다.’
이제는 바꿀 수 있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그저 새롭게 써나갈 뿐.
그렇기에 아직 걸어본 적 없는 길을 향해 여정을 시작할 때였다.
인간과 엘프들의 끝없는 욕망과 탐욕이 교차하는 그곳, 미궁도시 오지만디아스에서.
* * *
그 시각, 사라센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Kostantiniyye)
사막 엘프들이 주축으로 된 제국이라고 해도, 실상은 대륙 전역에 퍼진 온갖 종족들이 모여 통합된 다문화 제국이다.
“경애하는 제국의 술탄 살라딘을 뵙습니다.”
“아, 어서들 오시게나.”
바로 그 제국의 지배자 앞에 별과 단검의 문장을 새겨넣은 인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거야 원, 공화국에서 귀하신 손님들이 오셨어.”
그러자 옥좌도 뭣도 없이, 그저 카펫 위에 손으로 턱을 받치며 비스듬히 누워 있는 남자가 대답했다.
“날씨도 더운데 시원한 음료라도 내드리지. 겸사겸사 내 몫도 좀 부탁해.”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술탄.”
세상 태평하기 그지없는 자세와 표정으로 손짓하자, 시종들이 얼음 차를 가져와 남자와 손님들에게 대접했다.
“그래, 오늘은 또 어떻게 우리 등을 쳐먹으러 왔나?”
손님 앞에서 예의를 차리지도 않고, 화려한 옥좌에 앉아 기품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황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늘어서 있어야 할 경비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얼핏 보기에 할 짓 없는 한량(閑良)이나 다를 바 없는 모습.
그것이 바로 당대 최강의 제국을 거느린 남자였다.
* * *
그날 밤.
오랜만에 악몽을 꾸었다.
훗날의 시엔이 바꾸지 못했던 미래의 광경이었다.
베네토 공화국의 수도.
「모든 도시의 여왕」이자 대륙 제일의 부를 자랑하는 물의 도시 상공에, 느닷없이 마력이 휘몰아치며 검게 빛나는 칠흑의 구체가 생겨났다.
「초위계 광역섬멸형 흑마법 · 아바돈(阿鼻沌)」.
암흑물질을 응축해 생성된 검은 별.
별의 시체이자, 죽은 뒤에도 같은 별을 포식하고 흡수하는 죽음과 탐식의 별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다였다.
깨닫고 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죽음의 별에 삼켜진 그곳에는, 그저 밑바닥을 알 수 없는 크레이터가 흉터처럼 남겨진 게 고작이다.
그곳에 세워진 모든 것이 사라졌다.
도시도, 사람도, 땅도, 물도, 그 무엇도.
몰락의 시작이었다.
* * *
선전포고조차 없이 공화국 수도를 지도상에서 없애버리고, 그 혼란을 틈타 제국 국교회는 나이트워커 가문을 특급 이단으로 규정하고 제국 전체에 황제의 이름으로 명령을 내렸다.
「666호 명령(Order 666) · 사냥꾼의 밤」.
신성 로마누스 제국 황실 직속 최고 친위대, 쌍두까마귀의 가족들 역시 그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 * *
공식적으로 수도 베네토에 떨어진 ‘아바돈’은 어디까지나 그들 도시의 죄악이 불러온 신의 천벌이라 알려졌다.
끝없는 부패와 탐욕의 죄악으로 얼룩진 그들에게 신께서 벌을 내리셨다.
그들 나라를 있게 했던 ‘나이트워커 가문’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 * *
헤아릴 수 없는 천사병들의 시체를 뒤로하고, 라일라는 그곳에 있었다.
“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그리고 절망하라.”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아들을 뒤로하고,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슬픈 듯이 읊조렸다.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네.”
무너져 닳아버린 거대한 조각의 곁에는, 황량하고 외로운 모래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이 세상의 그 어느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 그것은 설령 나이트워커 가문조차 마찬가지였다.
《몽환포영로전(夢幻泡影露電)》.
이 세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벼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꿈이 깨고 환상이 깨지고 물거품이 없어지고 그림자가 사라지듯, 세상에 절대적이고 고정된 것은 없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 공식적으로 《황금여명회》의 이름을 가진 그들이 그곳에 있었다.
길었던 밤의 어둠을 밝히는 새로운 여명이 되어서.
“아직 늦지 않았어, 라일라 언니.”
바로 그 여명의 기수(旗手)를 자처하는 자가 말했다.
“이렇게 부탁할게. 전부 되돌릴 수 있어.”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그 시절의 행복하고 사이좋았던 자매로 돌아가자.”
그녀 빌헬미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고 애걸하는 듯한 목소리로, 라일라를 향해 말했다.
“다시 사랑하는 동생의 품으로 돌아와줘.”
“여전히 너는 나의 전부란다, 빌헬미나.”
“그럼……!”
그들은 진정한 가족이었다.
라일라와 빌헬미나, 라파엘로와 마린, 심지어 오스왈드와 오스카조차도 예외가 아니리라.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지.”
그렇게 말하며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