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17화 (117/200)

117화. 악몽 (2)

“시엔!”

“사, 살아, 시엔…….”

“우리에게는 네가 전부야, 시엔.”

“살아, 시엔.”

“살아남으렴, 시엔.”

죽어가는 와중에도 가족들은 모두 그들의 전부인 시엔을 걱정했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가는 가족을 위해서라도 죽을 수 없었다. 그들의 뜻에 부응하기 위해 살아야 했다.

시엔. 시엔. 시엔.

시엔.

매일 밤, 가족들의 목소리와 자신의 이름이 저주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의 시체를 딛고서, 시엔 나이트워커는 홀로 살아남았다.

이윽고 동이 트고 밤의 어둠이 완전히 걷히기 전에, 죽여야 할 인간들의 명부(名簿)가 작성되었다.

떠오르는 여명에 맞서, 기약 없는 밤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 * *

무심코 어린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범죄 길드의 사냥개로 길러져, 살기 위해 죽이고 죽기 전에 죽이던 그때. 제대로 된 식사조차 하지 못하고 뒷골목의 시궁쥐를 잡아먹으며 겨우 목숨을 지탱하고 있던 나날.

그 시절,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몰락하고 나서 암살자들의 아버지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죽여야 할 이들의 명부를 갖고, 하나둘씩 그 이름을 제거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 제발 살려주시오, 나이트워커 공작!”

“나, 나는 알지 못하는 일이오! 모두 폐하와 교회의 뜻이었소!”

“이렇게 빌겠소! 제, 제발!”

“내가 왜 너희를 살려줘야 하지?”

헤아릴 수 없는 제국의 강자와 귀족들이, 그의 손에 쓰러졌다.

아무리 부유하고 힘 있는 대귀족이라도, 아무리 강하고 실력 있는 기사라도, 아무리 드높은 지식의 금자탑을 쌓은 마탑주라도, 설령 신벌의 대행자를 자청하는 이들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나의 패배다, 나이트워커 공작.”

“아버지,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

“기, 기다리게! 이, 이 몸의 두뇌가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은 이 세계의 손실─”

모두 죽였다. 모두 죽었다.

제국의 이들에게 있어, 그 남자는 말 그대로 사신(死神)이었다.

* * *

눈앞에 시엔이 쓰러뜨려야 할 살생부의 마지막 이름이 있었다.

그 남자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었다.

제국의 황제,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최초의 밤을 걷는 자, 밤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

산상노인(山上老人) 하산 이븐 알 사바흐.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에, 동방 대륙의 마신을 섬기는 교단을 이끌었던 남자를 부르는 이름은 오직 하나였다.

천마(天魔).

* * *

카앙!

검이 맞부딪쳤다. 맞부딪치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강하다.

암살자들의 아버지, 제국의 헤아릴 수 없는 강자를 쓰러뜨리고 죽음의 신이 된 훗날의 시엔조차 일검(一劍)에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더 이상 별과 단검의 문장을 과시하는 일조차 없이, 시엔의 육체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어째서 당신이─.”

훗날의 시엔과 똑같은, 아니, 그 이상으로 완벽한 망령의 자세를 구사하는 남자를 향해 말했다.

“어째서냐고?”

남자가 대답했다.

“《영야(永夜)》.”

가문의 1식, 망령의 자세가 자랑하는 최강의 오의. 영원히 끝나지 않는 밤.

생각해 보니 참으로 우스운 이야기였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들이, 정작 기술의 이름으로 영원한 밤을 붙이다니.

“나의 밤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밤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가 말했다.

이제는 제국의 황제, 막사밀리안 합스부르크의 이름을 자청하며.

“그 누구도, 나의 밤을 끝내게 놔둘 수는 없다.”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을 몰락시키고, 황실 직속 고위 친위대이자 쌍두까마귀의 가족…… 《황금여명회》를 거느린 남자가.

“…….”

그 남자를 보며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절대로 피해갈 수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언령(言靈).

“너는 절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와 함께 남자가 대답했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다.”

타앗!

그 말을 끝으로 시엔이 땅을 박찼다. 1식과 3식, 6식에 통달하고 그랜드마스터의 경지를 손에 넣은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밤의 아버지, 그리고 암살자들의 아버지.

세계를 찢고 비명 지르게 하는 살검(殺劍)이 격돌했다.

힘들다. 검이 부딪칠 때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그러나 무너질 수 없었다.

살아남아, 시엔.

역설적으로 저주처럼 시엔의 귓가를 맴돌았던 가족들의 목소리가 시엔을 지탱하는 끈이 되어주었다.

낡은 수레가 가죽끈에 묶여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타올라 스러지려는 시엔의 육체 역시, 가죽끈에 묶여 겨우 움직이는 수레처럼 힘겹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락의 꽃》.”

읊조림과 함께 칠흑의 꽃이 흐드러졌다.

“《백야》.”

카산 역시 읊조렸다.

새하얀 밤, 그 말처럼 시린 냉기가 내려앉았다. 휘몰아칠 리 없는 서릿발, 내릴 리 없는 눈, 보일 리 없는 순백의 밤하늘을 등진 채.

“형성된 모든 것은 부서지는 법이거늘.”

흐드러져야 할 칠흑의 꽃, 나락의 꽃이 피지 못하고 덧없이 스러진다.

“그것을 두고서 ‘절대로 부서지지 마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그 말에 시엔이 차갑게 조소하며 말했다.

“그럼 진즉 부서지고 없어져야 할 것은, 네놈의 존재다.”

“나는 부서졌다.”

그 말에 남자가 대답했다.

“일찍이 ‘천마’라 불리며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그 남자는 부서졌다.”

“…….”

“하산 사바흐라 불리며, 존재했고 형성된 그 남자도 부서졌다.”

카산 나이트워커도, 그 후로 그가 거쳐온 온갖 ‘형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수없이 태어나고 존재하고 형성되고 부서지기를 거듭하며 이곳에 있다, 아이야.”

그 헛소리를 들어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오의가 무력화됐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그저 땅을 박차고 쇄도하며,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가죽끈을 채찍질하고 삐걱거리며 나아갈 따름이다.

‘가족이 되고 싶니?’

‘앗, 시엔! 시엔이다!’

‘우리 귀여운 조카가 왔네!’

자신을 향해 내밀어준 어머니의 손길, 자신을 사랑해준 가족들, 형제자매, 그들 모두 죽었다. 그러나 아직 시엔 나이트워커는 죽지 않았다.

시엔이 살아남아야 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저 가족들 중 누구도 시엔이 죽지 않기를 바랐을 따름이다.

그렇기에 그 기대를 배신할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저주나 다를 바 없는 주박(呪縛)이라 해도.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시엔이 재차 읊조렸다. 오직 그 말을 증명하기 위해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야말로 망집(妄執)에 가까운 존재가 되어서.

검이 맞부딪쳤다.

“……!”

촤아악!

동시에 광기에 가까운 시엔의 망집이, 비로소 눈앞의 남자를 향해 일격을 먹였다.

끝없이 형성되고 부서지는 남자의 ‘형상’에 새겨넣은 상처가 아니었다.

눈앞의 존재 그 자체에 새겨넣은 상처였다.

뚝, 뚝.

피가 흘렀다.

“태어나고 존재하는 것은 모두 부서지는 법이랬나.”

남자의 뺨을 따라 흐르는 피를 보며 시엔이 조소했다.

시엔이 일말의 주저도 망설임도 없이 칼자루를 고쳐 잡고 쇄도했다.

칼날이 맞부딪쳤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맞부딪치는 와중,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뭐가 말이지?”

“너희를 사랑하지 않아서.”

가족이 전부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밤의 아버지는, 결코 가족을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랑하지도 않는 이들에게 자신의 전부를 가르쳐줄 필요도 없었다.

“「마신의 자세(Mara Stance)」─.”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고 가르쳐준 적도 없는 영식(零式)을.

* * *

“…….”

눈이 떠졌다.

영겁 같은 악몽이 끝나고, 현재의 시엔 앞에 펼쳐진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돈 시엔.”

어느새 시엔의 곁을 지키는 그림자 기사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배가 곧 마그레브 사막의 미궁도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알겠습니다.”

가볍게 느껴지는 파도의 흔들거림, 공기에 섞여 있는 소금 냄새.

시엔이 몸을 일으켜 배의 갑판 위로 나오자, 어느덧 지평 너머로 끝없는 모래의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 * *

그 시각, 옥좌의 방.

옥좌에 앉은 제국의 황제, 막시밀리안이 조용히 감겨 있던 눈을 떴다.

그리고 말없이 손을 뻗어 자기 뺨을 매만졌다.

“…….”

욱씬.

이 고통은 대체 무엇일까.

아무리 육신과 형상을 바꿔도, 저주처럼 자신을 따라다니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상흔(傷痕).

상처 자체는 아주 보잘것없는 생채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상처를 되새길 때마다, 그조차 알 수 없는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마치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사신의 속삭임처럼.

* * *

그곳은 불모의 사막 위에 지어진 도시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활기와 열정으로 넘치고 있었다.

《미궁도시 오지만디아스》.

대륙의 헤아릴 수 없는 이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품고 불나방처럼 모여드는 욕망과 탐욕의 도시.

시엔이 왔을 즈음에는, 이미 피라미드의 탐사와 공략 역시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었다.

피라미드는 ‘사각뿔 도형’의 형태로 땅에 깊이 파묻혀 있고, 위에서 아래로 각 층이 구별되어 있다.

지금 이 도시의 가장 많은 모험가들이 드나드는 곳은 어디까지나 가장 위의 제1계층.

그들이 노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무덤을 장식하는 금장(金裝)이나 보석 따위.

실력 없는 삼류 모험가나 용병, 심지어 전투 능력이 없는 도굴꾼조차 충분히 리스크를 감수하고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곳.

그 아래의 제2계층부터는, 방랑기사나 마법사 내지는 규모 있는 용병대가 드나드는 곳.

그저 황금이나 보석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 재화를 손에 넣을 수 있고, 무엇보다 신화시대의 신비(神祕)가 깃든 ‘보물’을 처음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계층.

아울러 지금 시점에서 공략이 이루어지는 최전선의 장소는 제3계층.

훗날의 시엔이 쓰러지는 시점에서는 피라미드의 9계층까지 공략이 끝나고, 그때조차 파라오의 방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이 층이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10계층에 파라오의 무덤이 있을 거란 추측이 유력하기는 했는데.’

그마저 확실하지는 않다.

훗날의 미래에서도 10계층에 발을 디디고 살아 돌아온 자는 없다.

그렇기에 지금 당장 공략의 진척이나 상황 따위를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이 무덤에서 ‘정말로 가치 있는 상품’이 어디서 어떻게 발굴될지는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지금 시점에서 보물을 앞서 손에 넣으려 굳이 열을 올릴 필요는 없다.

오히려 시엔이 이곳 미궁도시를 찾은 이유는 달리 있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과 사라센 제국이 동시에 움직일 것이다.’

그들 베네토 공화국이 이 도시에서 부를 쓸어담는 모습을 용납할 리 없는 두 제국.

바로 그 제국을 상대로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