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자매의 진실
‘여전히 소란스러운 도시군.’
지평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열사(熱砂)의 대지와 황량한 모래밭을 뒤로하고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탐욕으로 쌓아 올린 황금의 도시가 있었다.
멀리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에는 바다 냄새가 섞여 있다.
소금과 물기를 머금은 모래바람을 등진 채, 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미궁도시 오지만디아스에 모이고 있는 ‘특별한 손님’은 시엔뿐이 아니었던 까닭에.
“제국의 2황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디트리히 저하님을 뵙습니다.”
시엔이 눈앞의 청년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공화국의 시엔 나이트워커인가.”
불사자(임모탈) 디트리히.
“참으로 공교롭군. 설마 이런 데서 다시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순백과 금빛의 코트 위로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紋章)을 새겨넣은 2황자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쌍두까마귀의 가족은 남자 하나가 아니었다.
“제국의 ‘친위대’께서, 이런 변방까지 무슨 용무로 오셨는지 여쭤도 될까요.”
제국의 황실 직속 최고 친위대─ 《황금여명회》.
“마치 이 땅이 자기들의 영토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디트리히의 조롱에 시엔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말씀드렸다시피, 우리는 이 땅 위에서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장사’를 하는 것뿐입니다.”
“누가 너희에게 이 땅에서 맘대로 돈을 벌어도 된다고 허락했지?”
“누구의 허락도 받을 필요가 없지요.”
시엔이 대답했다.
“제국 최고 친위대가 이 땅의 무덤을 들쑤시기 위해, 누구 허락도 받지 않고 거창한 ‘조사대’를 꾸려 행차하신 것처럼요.”
“그 말인즉슨, 우리가 너희처럼 이 땅에서 돈 놀음을 벌여도 제지하지는 않겠다는 뜻인가?”
“그렇습니다.”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저 피를 흘리는 전쟁과 마찬가지로, 상전(商戰)에는 상전으로 응할 뿐.”
피 대신 돈을 흘리는 전쟁. 적어도 그 전쟁에 있어, 제국은 결코 공화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시시하다.”
이내 디트리히가 헛웃음을 흘리며 등을 돌렸다.
“이런 데서 시간 낭비할 여유 따위는 없다.”
쌍두독수리의 가족, 제국 기사단, 교회, 에인션트 리그 소속의 학자와 마법사로 이루어진 각양각색의 조사대를 거느린 채.
“막사와 야영지가 설치되는 대로, 준비를 마치고 미궁에 진입할 것이다.”
규모 자체로 놓고 봤을 때는 지금 미궁을 탐사하고 있는 세력 중 압도적으로 강력할 것이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알기 쉬운 보석이나 재물 따위가 아니었다. 동시에 그들조차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노려야 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애초에 그곳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니까.
적어도 이 순간, 그 ‘무엇’의 정체를 확실하게 아는 것은 오직 시엔 혼자였다.
「검은 파라오의 서」.
훗날 제국의 손에 거두어져 제4마탑의 비급(祕笈)이 되는, 이 피라미드에서 발굴된 보물 중 유일하게 시엔이 탐내는 재보.
‘생각보다 빨리 움직였군.’
그리고 설마 쌍두독수리의 가족 중에서도 불사자 디트리히 정도의 전력이, 이 대규모 조사대의 수장을 맡을 거란 사실은 예상 밖이었다.
‘어차피 정체를 드러낸 이상, 더 이상 침묵할 이유도 없다는 뜻인가.’
대륙의 모두에게 자신을 드러냈으니, 잠자코 있을 이유가 없다. 황실 직속 최고 친위대─ 황금여명회의 존재는 그 자체로 대륙의 저울추를 뒤흔드는 변수였다.
모든 것이 예정보다 빨라졌다. 이곳 미궁도시에서 벌어질 일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든 것은 시엔의 예상 범위 내였다.
딱 하나, 눈앞의 남자 디트리히가 직접 움직였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 * *
그 시각, 공화국 본토의 나이트워커 공작령.
공작 저택의 다이닝 룸.
어둠 속에서 은으로 된 촛대가 타올랐고, 정찬에 앞서 입맛을 돋우는 각종 애피타이저 요리가 테이블 위에 세팅되었다.
“많이 드시지요, 아퀴나스 추기경 예하.”
서로가 다이닝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양쪽을 마주한 채,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그들 자매의 거리감처럼 한없이 널따란 직사각형 모양의 간격을 두고.
“고마워, 라일라 언니.”
그럼에도 빌헬미나는 개의치 않고 스스럼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언니와 이렇게 둘이서 저녁식사를 하게 될 줄이야, 정말 꿈만 같아.”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바질 샐러드와 방울토마토를 입에 넣으며 빌헬미나가 웃었다.
“꿈이 아니란다, 빌헬미나.”
라일라가 대답했다.
“현실이지.”
“…….”
알기 쉬운 달콤한 꿈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현실이다.
아무리 부정하고 바꾸려 해도 바꿀 수 없는 비참한 현실.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침묵 끝에 빌헬미나가 입을 열었다.
“시엔 나이트워커.”
그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라일라의 얼굴에서 지금껏 보여준 다정하고 상냥한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거짓된 가면을 벗는 것처럼.
“하고 싶은 말이 뭐니?”
“언니는 그 아이를 무척 사랑하는 모양이지.”
빌헬미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의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 아이를 사랑한다니 말이야. 그런데 지금의 나라면 이해할 수 있어.”
차갑고, 동시에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따스한 목소리로.
“언니가 사랑하는 그 아이 역시 우리의 ‘가족’이 될 수 있어.”
빌헬미나가 말했다.
“나와 언니, 언니와 내가 사랑하는 아들들, 모두가 함께 진실로 행복한 가족이 되는 거야.”
그것은 그녀가 내걸 수 있는 최선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내가 왜 그래야 하니?”
정적 끝에 라일라가 되물었다. 더없이 차갑고 냉혹한 목소리로.
“나에게는 가족이 전부란다, 빌헬미나.”
“그래서 특별히 그 아이, 시엔을……!”
“시엔이 동의해줄 것 같니?”
“그 아이의 의지 따위는 필요하지 않아.”
“하지만 나의 의지는 필요하구나.”
라일라가 말했다.
“그래.”
“나의 전부이자 내가 사랑하는 가족은, 결코 시엔이 전부가 아니란다.”
시엔 역시 가족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아이가 가장 소중하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빌헬미나가 미소 지으며 되물었다.
“만약 언니의 사랑하는 가족들이 ‘무척이나 불행한 사고’로 멸족당하게 됐을 때, 딱 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를 고르겠어?”
“시엔을 고를 거란다.”
라일라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아이는, 살아남아 훗날 우리 가문의 희망이자 미래가 될 테니까.”
“언니의 단순한 편애(偏愛)가 아니고?”
“가문의 외부자가 잘도 지껄이는구나.”
그 말을 끝으로 라일라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촤아악!
은으로 된 촛대 위에서 타오르고 있던 불이, 덧없이 스러졌다. 촛대가 사선으로 잘리며 깔끔한 절단면과 함께 미끄러진 것도 동시의 일이었다.
빌헬미나 아퀴나스의 뺨을 따라, 한 줄기의 핏방울이 흘러내린 것 역시.
“친애하는 아퀴나스 추기경 예하, 그런 의미 없는 질문을 위해 이곳까지 어려운 걸음을 하신 겁니까?”
어느덧 아퀴나스 가문에 전해지는 마안(魔眼)이자 축복, 이단과 진실을 가려내는 라일라의 두 눈동자가 서슬 퍼렇게 빛났다.
진실로 답을 갈구하는 이형의 눈동자.
“저 역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답니다, 나이트워커 공작 각하.”
그녀를 마주하는 빌헬미나의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그 아이, 시엔을 자신의 전부 중에서 얼마나 편애하는지 역시 말이죠.”
라일라 앞의 빌헬미나가 그렇듯, 라일라 역시 그녀 앞에서 어중간한 거짓말 따위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그들 자매가 가진 눈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그들 자매는 서로에게 결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직 진실만을 말했다.
‘싫어, 언니! 가지 마……!’
‘전부 너를 위한 일이란다, 빌헬미나.’
그날, 자신을 향해 속삭여준 언니의 말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에게는 네가 전부니까.’
그날, 라일라의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명백한 거짓이 되었다.
진실이 거짓이 되다니, 제국의 인간이자 빌헬미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그렇기에 절망하는 그녀를 향해 손길을 내밀며, 남자는 그렇게 말했다.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된 것은 모두 부서지기 마련인 것을.’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라 믿었던 사랑하는 언니의 진심이 바뀌었듯, 세상 모든 것은 변하고 바뀌기 마련이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밤 역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말이 빌헬미나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이었다.
‘그럼 언니의 뒤틀린 결의 역시…….’
그렇기에 빌헬미나는 자신의 신념과 종교와 가문과 그 전부를 버리고, 눈앞의 남자 앞에서 무릎 꿇고 맹세했다.
‘일찍이 모든 것이 태어났고 존재했고 형성되며 부서졌듯, 부서뜨릴 수 있는 걸까요?’
‘이 세상에 영원한 밤은 없는 법이니까.’
달라질 것은 없다. 빌헬미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언니 말이 맞아.”
미소와 함께 빌헬미나가 대답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는 않거든.”
어느덧 라일라의 곁에서 칠흑의 낫을 손에 쥐고, 당장이라도 휘두를 듯한 살기를 내뿜으며.
“이 순간 언니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 나보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다고 해서, 그게 결코 영원할 거란 착각은 하지 마.”
그럼에도 의자에 앉은 라일라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보고 있는 진실의 눈 속에, 빌헬미나가 사랑하는 언니를 ‘해치는 진실’은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진실은 늘 바뀌는 법이지.”
그저 그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이 아팠다. 그렇기에 라일라가 속삭였다.
“하지만 빌헬미나, 우리는 오직 이 순간의 진실을 위해 살아가는 법이란다.”
“…….”
눈앞의 우둔한 자에게 지혜를 내려주는 현자처럼.
동시에 우자(愚者)는 결코 현자의 지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설령 이해했다 쳐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살아가는 이 순간의 진실을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유감스럽지만, 진실은 언니의 특권이 아니야.”
“그럼 누구의 특권이지?”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강자.”
─어느덧 그녀의 등 뒤에서 저마다의 기척을 뿜어내고 있는 괴물…… 제국 국교회의 사도와 신성군단을 거느린 채 《죽음의 성모》가 말했다.
“우리 당(黨)이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 진실이거든.”
쌍두까마귀의 가족, 황금여명회, 패밀리(가족), 이런저런 이름으로 뭉쳐 있는 그들이 자신을 지칭하는 진정한 이름은 그저 하나였다.
당(黨).
“당이 진실이라고 하면, 그것은 진실이 되는 거야.”
빌헬미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 나는 당의 의지에 따라, 무슨 대가를 치르는 한이 있어도 언니를 향한 나의 사랑을 ‘진실’로 만들 거야.”
감히 그 누구도 감히 손댈 수 없었던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저택에, 그녀가 거느린 병력을 대동하고 노골적인 전투 태세를 갖추며.
“그것은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란다, 빌헬미나.”
라일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곁을 지키는 늙은 집사장과 그림자 기사단장, 끝으로 그녀의 한명밖에 없는 오라버니와 함께.
‘《웃는 남자》!’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가 당황했다. 그 남자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는 정보를 바탕으로 제국의 모두가 여기 모였고,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니까.
이제는 아니었다.
“설마 처음부터 역정보를……!”
“어려운 이야기는 이쯤 합시다. 대충 비극의 주인공쯤 되는 가엾은 동생 씨.”
빌헬미나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요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을 정도로,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
동시에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