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미궁 속으로 (1)
웃는 남자, 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는 데 서툴렀다. 그런 그에게 ‘가족’이 되겠냐고 누군가 손을 내밀었을 때, 요한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손을 잡는 쪽이, 이런 시궁창 같은 곳에서 혼자 썩어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래서 손을 잡았다.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요한이 나이트워커 공작령에 발을 들였을 당시, 저택에 있던 밤의 아이들은 가문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찬란히 빛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라일라와 요한, 헨젤과 그레텔.
훗날 나이트워커 가문을 떠받치는 기둥이자 ‘빛나는 밤의 세대’라 불리게 될 네 명의 아이들.
수련생 시절 가장 두각을 드러냈던 것은 라일라였다.
태어날 때부터 아퀴나스 가문의 인간으로서 ‘이단심문관장’의 운명을 타고나고 훈련받은 그녀는, 저택에 온 시점에서 이미 어지간한 그림자 기사조차 압도하는 실력을 갖고 있었다.
다음은 요한이었다.
그리고 그레텔은 도무지 어떻게 저런 아이가 ‘밤의 아이’가 될 수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울보에 겁쟁이였고, 아무도 그녀가 세례성사를 통과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 그레텔의 응석을 받아주고 달래주며 곁을 지키는 것은 늘 헨젤의 역할이었다.
자연스레 당대 제일의 천재, 라일라의 보조를 맞추는 것은 요한의 몫이 되었다.
* * *
세례를 마친 뒤, 어엿한 가문의 암살자가 되어 함께 임무를 수행할 때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뭘 위해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니?”
“무슨 말이죠, 요한 오라버니?”
촤악!
“너는 나랑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거든.”
“무슨 얼굴인데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
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기사의 갑주 틈새로 스틸레토를 꽂아 넣고, 발악 끝에 싸늘하게 숨이 멎는 것을 기다리며 요한이 말했다.
“너는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 않아.”
“위험한 말씀이시네요, 요한 오라버니.”
“그래? 나도 딱히 우리 가족을 사랑하지는 않거든.”
“…….”
“그저 사랑하는 척을 할 뿐이지.”
일순, 라일라의 눈이 요한조차 섬뜩할 정도로 차갑고 시린 서슬을 머금었다.
“그럼 어째서 가문이 내미는 손길을 잡으셨나요?”
“사랑하는 척만 하면, 이 가문은 뭐든지 주거든.”
요한이 차갑게 조소했다.
“너랑 똑같지.”
라일라는 웃지 않았다.
가문 내에서 라일라가 ‘아퀴나스 가문의 인간’이란 사실을 아는 자는 많지 않다. 당대 가주와 콘실리에리, 언더보스(당대는 루치아노였다) 정도를 제외하면 사실상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일라의 곁에서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요한을 제외하고.
라일라와 요한은 특별했다.
세례를 통해 다시 태어날 당시, 그들 가문을 이어주는 세뇌에 가까운 ‘무형의 결속’조차 두 사람의 세계관을 바꾸지는 못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는 가족.
“딱히 우리 가족이 싫은 것도 아니고, 사랑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야.”
요한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아직도,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모르겠거든.”
* * *
“아무것도 아닌 것의 헛소리를 들어주고 있을 정도로, 나는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서 말이지.”
《웃는 남자》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를 상징하는 애검이자 나이트워커 가문을 상징하는 신기급 무기, 월광검(月光劍)의 창백한 서슬이 빛을 흩뿌렸다.
요한이 무기의 새로운 주인이 되기 전까지는, 대대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주를 상징했던 시린 달빛의 검.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듯하네요.”
빌헬미나가 대답했다.
마찬가지로 어디서 꺼냈는지 칠흑의 서슬을 흩뿌리는 사신의 낫을 고쳐 잡고.
“우리는 당신들과 전쟁을 하기 위해 온 게 아니랍니다.”
어쨌거나 이 세계는 명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곳은 공화국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의 땅이다. 아무리 제국이라 해도 이곳에서 더 이상 횡포를 부렸다가는, 그렇지 않아도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는 와중 더더욱 적들의 결집을 부추길 여지가 있다.
그렇기에 빌헬미나는 더 이상 항전의 의지가 없음을 드러내고 조용히 걸음을 물렸다.
그녀의 등 뒤에 있는 제국의 전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위 이단심문관과 군단장급 천사군(天使軍)까지 끌고 와놓고, 싸울 의지가 없다고?”
그 말에 요한이 조소했다.
“아무 대책도 없이, 혼자 나이트워커 가문의 땅에 발을 들이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거든요.”
“전쟁을 하러 온 게 아니라면, 뭘 위해 온 거죠?”
침묵하고 있던 라일라가 입을 열었다. 새빨간 타인을 보는 듯한 감정 없는 눈동자를 하고서.
“전쟁의 시작을 알리러 왔죠.”
“전쟁을 하러 온 게 아니라더니, 그럼 전쟁 이야기나 하려고 오셨나?”
“그런 셈이랍니다.”
그것은 결코 제국 국교회의 인간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옷에 새겨진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 제국 황제의 의지를 대행하는 특사(特使)로서 전하는 말이었다.
“우리 신성 로마누스 제국은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에 이하의 만행과 이단 혐의를 내걸어,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알리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답니다.”
어느덧 빌헬미나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단심문관 하나가 터무니없는 두께의 양피지 두루마리를 내밀었다.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온갖 죄악과 이단 혐의가 씌워져 있는 대문서였다.
실제로 그들이 저지른 죄, 실제로 저질렀지만 증명할 수 없는 죄, 저지르지 않은 죄, 그 모든 것이 엉망진창으로 뒤섞여 있는.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드리는 마지막 기회죠.”
“우리는 제국의 어떤 불의(不義)에도 응할 뜻이 없답니다.”
“신중하게 말을 골라야 할 거야, 라일라 언니.”
빌헬미나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여전히 언니는 나에게 소중하지만, 나 역시 이제는 언니만큼 소중한 것들이 많거든.”
“그럼 더 이야기할 것도 없겠구나, 빌헬미나.”
라일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너의 전부를 위해 싸우렴.”
“나 역시, 나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싸울 테니.”
그녀의 그 어떤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저 타인을 내려다보는 것처럼 감정 없는 눈동자를 하고.
서로가 서로의 전부였던 두 자매는 이제 없다. 라일라가 그렇듯 빌헬미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
그랬어야 했다.
빌헬미나의 몸에 희미하게 떨린다.
“……나는 당신의 전부를 빼앗을 거야.”
침묵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빌헬미나가 말했다.
“이 나라도, 나이트워커 가문도, 언니가 사랑하는 그 아이도, 이 땅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빼앗을 거야.”
숨길 수 없는 증오와 함께,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는 회한(悔恨)의 감정이 깃든 목소리로.
두 자매의 이야기, 그리고 나이트워커 공작과 아퀴나스 추기경의 이야기, 공화국과 제국의 이야기 역시 거기까지였다.
* * *
그 시각, 미궁도시 오지만디아스.
“시엔.”
“비고 형.”
낯익은 정장 차림의 남자가 시엔 앞에 나타나자, 시엔이 미소 지으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돈 루치아노.”
마찬가지로 비고의 곁을 지키는 늙은 암살자 앞에서 경의를 표하며.
“지금 막 코스탄티니예에서 돌아온 참이야.”
“고생했어, 형.”
사라센 제국의 수도이자, 이곳 미궁도시에서 원활한 사업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살라딘과의 협상.
“티아랑 라힘 삼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
어려운 협상을 마치고 돌아온 비고를 보며, 가장 먼저 시엔이 입에 담은 것은 곁에 있어야 할 가족들의 이름이었다.
“다들 무사하니까 걱정할 것 없어. 아직 네가 왔다는 소식을 모르고 쉬는 중이거든.”
비고의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려운 강행군이 됐으니까, 조금 정도는 쉬어두는 편이 좋겠지.”
“그래.”
그리고 이곳에 시엔이 직접 온 것처럼, 그들 역시 이곳에 아무 이유 없이 보고나 하려고 온 게 아니다.
“그래서, 살라딘과의 협상은 어떻게 됐어?”
시엔의 말에 비고가 말을 흐렸다. 그 말을 받아 루치아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이 무덤에서 훗날 발굴될 보물 중, 가장 가치 있는 보물 하나.”
‘그때와 같군.’
“그것을 자신에게 준다면, 이 도시에서 우리 공화국이 어떤 사업이나 돈 놀음을 벌이든 개의치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약 그 보물을 제국이나 샤를마뉴 왕국이 손에 넣으면?”
“그들에게는 힘으로 빼앗을 거라더군요.”
“그렇군요.”
얼핏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조건이지만, 동시에 공화국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조건이기도 했다.
공화국 측이 바라는 것은 미궁의 보물이 아닌, 이 미궁을 둘러싸고 창출되는 돈의 흐름 그 자체였으니까.
‘……훗날, 9계층에서 검은 파라오의 서가 발굴되고도 살라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그조차 충분히 가치 있는 보물로 느끼지 않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지금 당장 9계층에 있는 검은 파라오의 서를 손에 넣는다 해도 살라딘과 사라센 제국이 그것을 요구할 일은 없다.’
그때조차 여전히 사라센 제국은 이 대륙의 최강대국 중 하나였다. 아니, 오히려 지금 이상이었다.
성을 함락하기 위한 공성 대포는 물론, 아퀘버스(화승총)에 이어 머스킷(Musket)을 제식 무기로 전장에 본격적으로 채용한 최초의 제국.
미래의 시엔 역시 그들 사라센 제국이 자랑하는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Janissary)의 위용은 잘 알고 있었다.
아마 훗날 이 대륙을 평정하는 것은 그 어떤 인간들의 나라도 아니고, 바로 그들 사막 엘프들의 나라일 것이다.
당장 신성 제국의 위협 앞에 시달리는 시엔이 걱정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저 눈앞의 문제에 신경 쓸 뿐이다.
“우리 역시 마다할 게 없는 제의군요.”
그렇기에 시엔이 협상의 결과를 갖고 돌아온 가족들 앞에서 예를 표했다.
“휴식을 마치는 즉시, 우리 역시 미궁으로 진입할 겁니다.”
“미궁의 탐사를……?”
의외란 듯한 비고의 물음에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우리는 보물을 노리러 가는 게 아니야.”
얼마 전, 자신의 앞을 지나쳤던 일군의 무리를 떠올리며.
“우리는 아직 피라미드에 무슨 위협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걸 감수할 가치가 있는지도 알지 못하니까.”
“그럼 무슨 이유로?”
“쌍두까마귀의 가족 ‘디트리히’가 거느린 제국 조사대가 미궁에 진입했거든.”
루치아노와 비고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제국 놈들이 벌써 조사대를…….”
“하지만 그들도 이 미궁 속에 뭐가 잠들어 있는지는 모르겠지.”
시엔이 시치미를 떼며 말했다. 그 의미를 헤아린 루치아노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확실히, 그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들 그들로서는 알 도리가 없겠지요.”
늙은 암살자, 콘실리에리 루나의 뒤를 이어 가장 오랫동안 나이트워커 가문을 지켜본 노신사가 말했다.
“제국 역시 그 사실을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닐 테고요.”
“쉬운 싸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시엔 역시 알고 있었다.
“각오는 되어 있답니다, 돈 시엔.”
하지만 물러날 이유도 없었다.
그들 가족을 부정하고 공화국을 위협하는 적, 쌍두까마귀의 가족이 그곳에 있는 이상.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움직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