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미궁 속으로 (2)
시엔과 루치아노, 티아와 비고, 끝으로 라힘.
어엿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핵심 전력이자, 밤을 걷는 자로서 이름을 떨치는 다섯 명의 암살자.
그들 중 누구 하나도 이제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지켜져야 할 가족이 아니었고, 그것은 라힘이나 비고는 물론 티아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제국이 꾸린 대규모 조사대가 피라미드에 들어가고 나서 얼마 후.
조사대의 가장 끝자락이 4계층에 진입했다는 첩보를 듣자마자, 시엔 역시 망설이지 않고 움직였다.
피라미드의 입구, 1계층으로 향하는 길은 평범한 통로 따위가 아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빛무리로 이루어져 있는, 아직 이 시대의 마법이나 기술로도 그 정체를 이해할 수 없는 이동 장치─ 일명 「올드 포탈(Old Portal)」.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딛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수천 년 전에 세워진 그들 제국은, 그런 터무니없는 기술을 아무렇지도 않게 미궁의 입구에 세워두고 있었다.
“준비됐지, 티아?”
“다른 가족이 준비가 됐다면, 저도 된 거예요.”
걱정스러운 듯한 시엔의 물음에, 티아가 조금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에 시엔이 쓴웃음을 흘린다.
“그렇겠지.”
아무래도 걱정이 지나쳤던 모양이다. 로브를 두른 시엔이 멋쩍은 듯 고개를 긁적거리며, 포탈 앞에서 북적거리는 인파를 가로질렀다.
포탈 너머로 한 걸음을 내디디는 순간, 끝없는 순백이 시엔의 주위를 휘감았다.
찬란한 빛이 휘몰아치고 나서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축축하고 음습하기 이를 데 없는 석굴이다. 비로소 신대 제국을 다스리던 황제의 무덤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미 적지 않은 모험가가 3계층까지 탐험을 끝냈다. 심지어 제국 조사대는 이미 4계층에 이르렀고 선두의 강자들은 5계층까지 진입했을 것이다.
하지만 시엔 일행이 들어선 그곳은, 수천 년이 넘는 까마득한 세월 동안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고대의 무덤 그 자체였다.
아직 그 누구의 손길조차 닿지 않은 것처럼.
실력 있는 모험가들의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3계층은 그렇다 쳐도, 실력 없는 삼류 모험가나 도굴꾼 따위가 불나방처럼 모여들어 구석구석 뒤진 1계층에 이렇게까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장소’가 존재할 리 없다.
그런데 존재하고 있다. 그게 바로 이곳 피라미드가 ‘보물이 마르지 않는 던전’이라 불리는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슈욱!
시엔 일행이 실내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내달리는 섬뜩한 파공음 역시 마찬가지다.
수천 년이 지나도록 보존되고 있는 이 공간에, 살아 있는 생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상대는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었다.
영원히 움직이는 망령된 해골, 그것도 신대 제국의 마법으로 움직이고 있는 아주 강력한 스켈레톤이다.
그렇다고 해도 결국 1층을 지키는 피라미 수준에 불과했지만.
“티아.”
능숙하게 스켈레톤의 칼날을 받아 넘기며, 시엔이 말했다.
“오러와 마법을 쓰지 않고, 단검 한 자루로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겠어?”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에게, 이 정도는 위협이라고 부를 가치조차 없다. 그렇기에 시엔이 말했다.
“내가 전에 가르쳐준 대로.”
“알겠어요.”
이런 데서까지 자신을 가르치려는 시엔의 태도가 조금 못마땅한 듯하면서도, 마지못해 티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에 들린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일찍이 시엔이 가르쳐준 깨달음을 되새기며.
고결한 기사, 이름 없는 암살자, 천한 백정, 심지어 그 이상으로 천대를 받는 처형집행자들에 이르기까지─.
직업의 귀천을 막론하고 「칼잡이」들이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진실된 경지가 있다.
끝도 없이 사람을 베고, 짐승을 도축하고, 참수를 집행하는 자들은 어느 순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
이상하리만치 칼날이 ‘유독 잘 드는 곳’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관절과 근육의 위치를 파악하고, 어디 칼집을 넣어야 인대가 잘 끊어지는지 등의 해부학적인 지식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것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끝도 없이 무언가를 베는 일을 거듭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이론을 초월하는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된다.
논리나 이치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오직 정신만으로 볼 수 있는 어떤 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티아에게 가르침을 준 시엔 역시 그것을 보았다.
그러나 시엔에게 그 가르침을 준 것은 위대한 소드마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심지어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도, 그들에 필적하는 전력을 가진 제국의 괴물들조차 아니었다.
그저 이름 없는 천한 백정이었다.
시엔이 별다른 일조차 없이 베네토의 거리를 걷다가 만난, 마침 도살장에서 소를 잡고 있던 백정.
오러 블레이드는커녕 오러조차 다룰 줄 모르는 그 백정은, 어깨를 기울이고 무릎을 구부리며 칼로 소를 해체하는 동작에 일말의 거리낌도 없었다.
‘제가 처음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보여 손을 댈 수 없었으나, 3년이 지나자 어느새 소의 온 모습은 눈에 띄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즘 저는 정신으로 소를 대하지 눈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과거의 시엔이 무의식적으로 느꼈던 그 경지가 비로소 깨달음이 되었다.
그 깨달음이, 당시 6식의 마스터였던 시엔에게 명경지수의 자세를 깨우치게 하고 하이마스터의 경지를 안겨주었다.
‘솜씨 좋은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것은 살을 가르기 때문입니다. 형편없는 소잡이는 달마다 칼을 바꾸는데, 이는 무리하게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그 백정과의 만남은 아무런 전조도 계기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기연(機緣)이었다.
‘그렇지만 제 칼은 19년이나 되어 수천 마리의 소를 잡았는데,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그 까닭을 아십니까? 저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시엔은 그저 놀란 듯 숨을 삼키며 그의 말을 경청할 뿐이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칼날을 움직이는 데도 여유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19년이 되었어도 칼날이 방금 숫돌에 간 것과 같습니다.’
설령 그것이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기사든, 괴물이든, 심지어 뼈밖에 남지 않은 신대의 스켈레톤이라고 해도 다를 것은 없었다.
촤악!
티아의 손에 들린 단검이 휘둘러졌다. 오러조차 덧씌우지 않은 칼날이, 상식적으로 스켈레톤의 뼈를 베어낼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베는 것은 뼈가 아니다.
‘천리(天理)를 따라 쇠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와 빈 곳에 칼을 놀리고 움직여 소의 몸이 생긴 그대로 따라갑니다.’
하늘의 이치 그 자체다.
슈욱!
힘줄과 뼈의 틈새를 가르고 뼈마디 사이로 칼을 놀린다. 뼈밖에 없는 해골이라면 오히려 더 수월하다. 오히려 더욱 번거로운 것은, 인공의 이치로 쌓고 주조한 판금 갑옷 따위니까.
백정은 이 지점을 일컬어 「긍경(肯綮)에 닿는다」고 일컬었다.
쉽게 베일 리가 없는 스켈레톤의 위팔뼈─ 상완골이 그대로 떨어져 내린다. 심지어 티아의 칼날에는 오러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쥐고 있는 검이 츠바이헨더 같은 묵직한 양손검도 아니다.
그러나 티아의 일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뼈가 잘린다. 너무나도 부드럽고 맥없이. 뼈가 부러지는 소리조차 울려 퍼지지 않았다. 마치 연한 고기나 두부를 써는 것처럼 부드럽고 막힘없는 칼질이었다.
물론 팔뼈 하나가 잘렸다고 해서 스켈레톤은 멈추지 않는다. 티아 역시 멈추지 않았다.
상완골, 대퇴골, 척추뼈, 골반에 이르기까지 완전히 기동이 불가능할 정도로 칼날을 휘두른다.
한 마리의 스켈레톤이 침묵한다.
그곳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스켈레톤들이 남아 있었다.
칼자루를 빙글 돌려서 고쳐 잡고, 티아가 고개를 들었다.
보자마자 직감할 수 있었다.
“아직 더 해야 해요?”
“아니, 됐어.”
이 순간, 티아 나이트워커는 ‘견진성사’를 통과했던 당대 그 어떤 마스터보다 높은 경지의 3식의 이해도에 이르러 있음을.
“그럼 이제는 졸자의 차례겠군!”
“아니, 삼촌에게는 딱히 가르칠 게 없는데요.”
“음, 방금 티아가 보여준 것으로 충분하다오!”
멋쩍은 듯한 시엔의 말에 라힘이 개의치 않고 소리를 높였다. 두 주먹을 맞부딪치며, 어느덧 사방에서 쇄도하는 스켈레톤을 향해 일격을 내리꽂으며.
거의 제로에 가까운 거리에서, 티아와 마찬가지로 오러를 싣지 않은 라힘의 주먹이 내리꽂혔다.
아무리 라힘이 강하다 해도 오러 없이, 그저 순수한 주먹의 힘만으로 저 정도의 스켈레톤을 무력화할 수 있을 리 없다.
콰직!
“!”
쩌적, 쩍!
그러나 라힘의 정권과 함께, 주먹에 부딪힌 스켈레톤의 갈비뼈가 거북이 등딱지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발경(發勁)」.”
부서져 내리는 스켈레톤의 유해를 뒤로하고 라힘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말을 듣고 시엔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다들, 정말로 준비가 된 것 같네요.”
* * *
이전에 아무리 많은 이들의 손을 타고 파헤쳐진 곳이라 해도─ 누군가 발을 들일 때마다 그곳은 완전히 ‘새것’이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쓰러뜨렸다고 생각한 괴물, 발굴됐다고 생각한 보물 상자. 모두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전에 보물이 있었던 장소에 보물이 없을 때도 있고, 이전에 쓰러뜨렸던 괴물이 아니라 다른 괴물이 그곳에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마치 무덤 자체가 끝없이 형태를 바꾸고 쇄신하는 ‘하나의 생명’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하물며 비교적 정체가 많이 알려진 1계층이나 3계층에 비해, 지금 제국 조사대가 최전선을 뚫고 있을 아래 계층은 더더욱 많은 것이 의문에 싸여 있다.
오직 한 사람, 시엔을 제외하고.
‘지금 여기 있는 가족의 전력으로도 충분히 9계층은 돌파할 수 있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굳이 제국 조사대에 어설프게 손을 대지 않고, 이곳에 있는 가족들과 함께 9계층을 직행해 ‘검은 파라오의 서’를 손에 넣는 방안을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좀 더 천천히 제국 조사대의 행방을 지켜보며 그들에게 ‘최대의 피해를 줄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리고 제4계층.
감시가 있든 없든, 설령 그게 함정이든 아니든 개의치 않는다. 아마 제국 역시 모를 리 없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이 도시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이, 자신들 조사대를 결코 순순히 방관하고 있지는 않을 거란 사실을.
그리고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감정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인간들.
“인형이야.”
그냥 인형이 아니다.
자동인형(오토마타)이다.
─시엔이 13계단의 시험을 치를 당시 쓰러뜨렸던 감정 없는 암살자이자 인형(人形), 히트맨 로베르트와 무척이나 흡사한 분위기를 가진.
놈들이 어떻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을 모방하고 있는지, 이제는 더 이상 의문조차 아니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과 함께 마지막 순간까지 정체를 숨겼던 저 인형의 존재 역시, 이제는 숨길 이유가 없었으니까.
“대부님, 저건……!”
“조심하십시오.”
티아의 말과 함께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가 그녀의 앞을 지키듯 가로막는다.
“……저 인형들은, 우리 가족의 흉내를 낼 테니까요.”
한여름 밤의 인형(Night Do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