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함정 (3)
가족이 전부라고 해서 결코 그 외의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될 수는 없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 역시 인간이고, 그들 또한 인간의 삶을 살아가며 저마다의 소중한 무엇을 찾게 될 테니까.
하지만, 가족을 위협하는 존재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악(惡)이다. 없애야 할 악.
“너희에게 아무래도 진짜 고통을 알려줘야겠네.”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는다.
동시에 칼날 위에 깃들어 있던 칠흑의 마력, 네버모어가 사라졌다.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라.”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종 여유를 가장하고 있던 금발 소년과 소녀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의 감정이 깃든다.
“쉽게 죽이지도 않을 테니까.”
시엔이 말했다. 닿는 순간 죽음에 이르는 검, 네버모어조차 그들에게는 사치란 듯이.
청백색의 초점 없는 눈동자, 뇌신(雷神)의 눈동자로 쌍둥이 남매를 바라보며.
아직 그들 남매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훗날, 그들 남매가 헨젤과 그레텔에게 안겨줄 고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레텔의 일부를 산 채로 조금씩 잘라서, 조롱의 말과 함께 나이트워커 가문에 보내온 서신을. 그때마다 잘린 사랑하는 누님의 손가락, 혀, 귀를 보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지옥 같은 증오와 무력감을.
그들이 쌍두까마귀의 가족을 자청하는 이상, 시엔의 형제자매에게 위협이 될 1할의 가능성이라도 존재하는 이상, 그들은 악(惡)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죽여 없애야 할 악.
콰직!
다시금 소녀가 공전하고 있는 짚신 인형들 위로 대못을 내리꽂았다.
그러나 시엔은 미동조차 없이, 눈썹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그저 담담히 한 걸음, 한 걸음씩.
“어째서……!”
“그만둬, 레나. 저 녀석에게 ‘살 날리기’는 통하지 않아.”
다가오는 시엔을 보며 금발의 소년이 단검을 고쳐 잡는다.
“알겠어, 레너드 오빠.”
금발의 소녀 역시 주위를 공전하고 있던 저주 인형을 마력의 입자로 되돌리고, 다시금 두 팔을 뻗었다.
“─그럼 진짜 고통을 느끼게 해주는 수밖에.”
그러자 이제는 ‘확실한 물리적 실체’를 가진 헤아릴 수 없는 염력의 칼날이 벼려져, 그녀의 주위를 재차 공전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9식 「크라켄의 자세」.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검식이지만, 거리를 좁히는 것으로 손쉽게 파훼되는 검식.
그렇기에 금발의 소년 ‘레너드’가 시엔의 앞을 막아섰다. 결코 소녀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절대 사랑하는 가족을 다치게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런가.’
어떤 극악무도한 악인(惡人)이라 해도, 저마다 소중한 것이 있는 법이다.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이 그러하듯, 쌍두까마귀의 가족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은 적이지만, 한편으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거울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것,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잔학무도한 짓도 스스럼없이 저지를 수 있는 괴물.
그들에게는 필시 가족이 전부일 테고, 그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사로잡은 그레텔에게 그런 지옥 같은 고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안겨준 것처럼.
깨닫고 보니─ 시엔을 집어삼킬 듯 이글거리는 업화(業火)가 사라졌다.
더 이상 거기에 알기 쉬운 증오나 원념의 불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
거리가 좁혀진다.
그리고 시엔이 거리를 좁히는 와중, 사방에서 폭격처럼 내리꽂히는 사이킥 나이프는 결코 몸을 스치지도 못했다.
염력으로 벼린 칼날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보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시엔이 가진 신기 묠니르의 힘, 뇌신의 눈동자가 보는 것은 공간 그 자체였다.
극도로 발달된 전기적 감지 능력(Electroreception)을 통해 일대의 전기장에 감응하고 그 흐름을 읽으며, 그저 시각이 아니라 다섯 개의 감각 모두가 유기적으로 융합된 공감각의 형태로 세계를 보고 있다.
이 순간, 시엔은 신기 묠니르를 통해 진정한 ‘뇌신의 눈’을 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더 이상 불꽃은 없다. 아무것도 타오르지 않는다.
오로지 가장 순수한 뇌전의 정수가 존재할 뿐.
파지직!
마치 시엔의 몸이 번개처럼 번쩍이며 찰나의 순간에 거리를 좁혔다.
그 상태로 거리를 좁힌 시엔이 금발의 소년, 레너드와 왕 시해자를 맞부딪쳤다.
맞부딪친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극도로 묠니르의 힘을 끌어내고 있는 시엔이, 상대의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온갖 형태의 생체 전류를 읽고 해독하며─ 마치 마음 그 자체를 들여다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 정도였으니까.
‘그런가.’
또다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 역시 지켜야 할 것을 위해 싸운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 싸운다. 본질적으로 쌍두까마귀의 가족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무엇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할 때마다, 명경지수의 자세를 통해 피워 올린 지옥 같은 업화가 사그라진다.
더 이상 시엔의 마음은 불타지 않았다.
그저 멈춰 있는 호수처럼 고요했다.
얼핏 보기에는 무해하기 이를 데 없는 맑은 물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 물에 손가락 하나라도 담갔다가는, 호수 속에서 고요하게 휘몰아치는 뇌전에 감전되어 그대로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이다.
업화를 넘어서 새롭게 손에 넣은 명경지수의 자세 ─ 뇌수(雷水).
새로운 호수를 손에 넣은 《호수의 암살자》 시엔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그들을 이해한다.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시엔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간 것처럼, 이제는 시엔이 그들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앗아갈 차례였다.
타오르는 증오나 원한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거나 악인이라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레너드와 칼날을 맞부딪친 상태에서, 시엔이 또 하나의 손을 뻗었다.
파지직!
그리고 묠니르의 힘을 통해 일대의 자기장을 뒤틀고, 시엔에게 폭격처럼 내리꽂혀야 할 금발 소녀의 ‘사이킥 나이프’가 그 자리에서 멈춘다.
멈춘 뒤에는, 사이킥 나이프가 반전(反轉)된다.
“레나, 당장 사이킥 나이프를 해제해!”
그 의미를 헤아린 금발 소년의 표정이 사색으로 얼어붙었다. 소녀 역시 그 의미를 모를 리 없으리라.
자신의 통제 속에서 움직여야 할 수백 자루의 사이킥 나이프가, 거꾸로 자신을 향해 칼끝을 들이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통제할 수 없었다.
사념(思念)조차 뇌의 전기적 상호작용을 통해 벌어지는 행위다. 강력한 염을 위해 뉴런과 시냅스에서 벌어지는 생체 전류.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통제하는, 말 그대로 뇌신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 남매는 강했다. 적어도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에 준하는 전력이라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정정당당한 싸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헨젤과 그레텔조차 결국 그들 남매와 ‘협력자’들의 손에 패배해 사로잡혔으니까.
하지만 이 순간, 훗날 암살자들의 아버지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를 가능성을 품은 ‘그랜드마스터’ 시엔의 앞에서는 아니었다.
마치 패왕 아서가 홀로 샤를마뉴의 12기사들을 압도하듯, 마찬가지로 검성 롤랑이 원탁의 기사들을 압도하듯,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가 내로라하는 헤아릴 수 없는 강자들을 압도하듯이─.
어느덧, 시엔 나이트워커는 그들과 같은 당대(當代) 제일의 강자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제기랄……!”
금발의 소년이 재차 칼자루를 다잡고 또 하나의 자세를 펼친다.
「나락의 자세」.
시엔의 존재를 나락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기 위한 추락과 압박의 6식.
그 모든 움직임이, 시엔의 눈에는 너무나도 훤하게 보였다.
여전히 시엔의 눈동자는 초점 없는 청백색의 스파크로 일렁이고 있다.
지금의 시엔은 ‘앞을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볼 필요도 없었다.
마치 이 공간 일대가, 시엔의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카앙!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지는 6식의 1초식, 나락베기.
그 베기를 맞받아치는 척하면서 미끄러지듯 칼날을 타고 옆으로 비껴가, 측면을 무너뜨린다. 금발 소년의 자세가 무너져 내린다.
동시에 팔을 뻗은 시엔이, 일대에 생성된 수백 자루의 사이킥 나이프를 움직였다.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하고 완벽한 경지에 이른 가문의 9식─ 「크라켄의 자세」.
심지어 시엔의 것조차 아닌, 금발 소녀가 벼린 염력의 칼날들이 내리꽂혔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 그녀의 전부를 향해서.
“레너드 오빠!”
절규에 가까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딱히 그들에게 고통을 줄 생각은 없었다. 더 이상 그들을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시엔의 행동은 그들에게 있어 세상 무엇보다 끔찍한 고통이었다.
자신이 벼린 칼날에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사랑하는 오빠가 그곳에 있었으니까.
“오빠, 오빠, 오빠, 오빠아……!”
금발의 소녀가 평정을 잃은 채 절규하듯 소리쳤다.
“나,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칼날에 꿰뚫린 소년, 레너드가 흐르는 핏물을 닦으며 말했다.
최후의 힘을 쥐어짜 시엔의 앞을 가로막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지켜야 할 등 뒤의 소중한 가족을 향해서.
“도망, 쳐……!”
그리고 말을 마칠 틈도 없이 칼날이 휘둘러졌다.
《호수의 암살자》가 휘두르는 감정 없는 일검.
왕 시해자의 칼날이 레너드의 목젖을 따라 내리그어졌고, 피가 흩뿌려졌다.
이해할 필요는 있으나 용서할 필요는 없다. 살려둘 수도 없었다.
가족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惡)이니까.
마찬가지로, 그들이 보기에는 시엔이야말로 가족을 상처 입히고 위협하는 악이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초점 없는 청백색의 눈동자, 뇌신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절규하는 여동생의 슬픔과 원념, 그 고통의 무게는 결코 자신들의 그것에 뒤처지지 않는 것임을.
제아무리 극악무도한 악인이라 해도, 누구나 소중한 것이 있는 법이다.
촤악!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섬광처럼 쇄도한 시엔의 왕 시해자가, 어느덧 타오르는 청백색의 전류를 휘감고 소녀를 향해 휘둘러졌다.
벼락의 호수가 퍼져나갔다.
파지직!
비명을 지를 틈조차 없다. 네버모어는 아니나, 시엔의 칼날에 깃든 고압의 전류는 스치는 것으로 상대를 절명에 이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설령 그것이 쌍두까마귀의 가족이라 할지라도.
죽기 전에 죽인다. 빼앗기기 전에 죽인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타인의 소중한 것을 빼앗는다.
그게 바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방식이자,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고, 세상 사람들은 그 방식을 일컬어 이렇게 부른다.
악(惡).
이제 와서 남을 이해하고 사람 좋은 행세를 하기에, 세상에 피어난 ‘악의 꽃’은 너무나도 거대했다.
* * *
두 남매, 쌍두까마귀의 가족이 스러졌다.
흩뿌려진 죽음의 거미줄을 거두고, 젠틀맨 잭이 거리를 벌렸다.
“아, 이런…….”
휘둘러지는 루치아노의 단검을 지팡이로 맞받아친 잭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자비로운 주여, 가엾은 두 아이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희대의 살인귀라고 믿을 수 없는 진심 어린 슬픔의 목소리와 함께, 마른 눈물이 단안경을 쓴 뺨 밑으로 흘러내린다.
“당신들은…… 정말로 잔인하군요.”
흐르는 눈물과 함께 잭 더 리퍼가 말했다. 누구도 아니고, 일찍이 칠왕국 군도에서 가장 악명 높았던 쾌락 살인마의 입에서.
“어째서 이렇게 잔인한 짓을 하는 거죠……?”
그 말에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가 대답했다.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 있는 법이지요, 미스터 잭.”
감정 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저 우리의 소중한 것이, 그대들의 소중한 것보다 ‘좀 더 소중할’ 뿐입니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군요.”
그 말에 실크 햇을 고쳐 쓰며 젠틀맨 잭이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기억하는 게 좋을 겁니다.”
쿠웅!
딛고 있는 무덤 일대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균열 속에서.
깨닫고 보니 미궁의 천장 일대가 붕괴하고 무너져 내리며, 기다렸다는 듯 젠틀맨 잭이 땅을 박차고 물러났다.
“자신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전부를 빼앗을 수 있는 자들이, 이 세상에 나이트워커 가문밖에 없는 것은 아니랍니다.”
붕괴하는 천장 속에서 어느덧 잭의 모습은 사라졌고, 그것은 티아 일행과 맞서고 있던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싸움은 끝이 났다.
그리고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그저, 일찍이 누군가의 전부였을 두 남매의 시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