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암살자의 전쟁 (2)
신성 제국 남부와 베네토 공화국 북부를 양분(兩分)하고 있는 밤하늘 산맥.
하지만 ‘밤하늘 산맥’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나이트워커 가문과 공화국 측의 입장에서 부르는 것일 뿐, 신성 로마누스 제국이 그곳 국경 산맥을 일컬어 부르는 이름은 달리 있었다.
「하얀 죽음(White Death) 산맥.」
인간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다.
세상에는 중요한 인간이 있고 중요하지 않은 인간이 있다. 함부로 죽어서는 안 될 인간이 있고, 죽어도 소모품처럼 얼마든지 대체될 수 있는 인간이 있다.
숨을 내쉴 때마다 새하얀 냉기가 흐드러지고, 살을 도려내는 듯한 강추위가 얄팍한 가죽 갑옷 속으로 스며드는 그들처럼.
그들은 얼마든지 죽어도 되는 인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험준한 산맥, 하얀 죽음이란 이명이 붙을 정도로 험준한 그곳을 넘는다는 것은 사실상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자살 행위’란 것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왜 이렇게 덥지……?”
정상을 향해 등정하고 있던 보병 하나가, 느닷없이 걸치고 있던 외투와 갑옷, 옷가지를 모조리 벗어 던지며 말했다.
동사를 앞둔 극도의 저체온 상황에서 뇌 기능이 손상되어, 살을 에는 추위를 덥다고 착각하는 환각과 착란 현상.
그러나 산을 등정하는 병사들 중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기울일 수조차 없었다.
쿵!
누군가는 더위를 느낄 새도 없이, 그저 영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절명(絶命)했다.
하나, 둘, 넷, 다섯, 일곱, 정상에 가까워질 때마다 숫자는 착실하게 줄어들고 있었다.
“뼈를 조각내고 불태워라.”
정신 착란을 일으키거나 갑자기 쓰러져 죽을 때까지, 누구 하나 관심을 두지 않던 병사들은 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죽은 다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사지를 찢고 뼈를 조각내고, 육체를 불태운다.
백야의 협곡을 지나, 머지않아 정상의 풍경이 그들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수천 명의 제국군 보병 중 살아남아 무사히 등정에 성공한 것은 5할도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제4, 제5기사단 소속의 기사 오백 명 중에서 죽은 자는 백 명 남짓. 일개 보병과 달리 비교적 전력을 온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상까지 도달한 제국군 중 누구도 등정의 끝에서 느낄 수 있는 환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보병도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묫자리를 향해 제 발로 걸어가는 듯한 절망과 체념이 존재할 뿐.
산맥 꼭대기에 있는 ‘그것’을 본 자들은,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달의 사원(Moon Temple)》.
밤하늘 산맥, 신성 제국은 ‘하얀 죽음 산맥’이라 부르는 그곳의 꼭대기에 자리 잡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성소.
바로 그 사원 앞을 지키는 그림자가 있었다.
별과 단검의 사신(死神)들이었다.
* * *
“으, 으, 으아아…….”
능선(稜線)을 따라 달의 사원에 가까워지는 제국의 병사들을 보고, 앨리스 나이트워커가 어쩔 줄 몰라 말을 더듬거린다.
“어, 어, 어쩌지? 적들이 엄청나게 모, 몰려오는데…….”
달그림자와 가시나무의 자세, 두 가지 검식을 완벽히 구사하는 하이마스터의 위엄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모습.
그런 그녀의 곁을 지키는 두 명의 대자녀(代子女)가 쓴웃음을 짓는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대모님.”
가문의 7식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와 더불어 이제는 노목(老木)급 가시나무를 체내에 심어둔 그녀의 대자가 말했다.
미하일 나이트워커.
평소 그에게서 볼 수 있는 능청스러움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이, 어느 때보다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며 앨리스의 곁을 지키고 있다.
“누구도 당신을 상처 입히게 놔두지 않을 테니까요.”
“고, 고마워, 미하일…….”
“섭섭하게 나 빼고 둘이서 그러기야?”
두 사람의 대화에 이자벨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까먹지 말고 좀 끼워주라.”
“이야, 우리가 설마 누님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그러자 방금까지의 태도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미하일이 이죽거렸다.
“누님 히스테리는 잊고 싶어도 못 잊죠.”
그 말과 함께 칠흑의 불꽃이 피어올랐다.
“다, 다들…… 정말 고마워.”
믿음직한 두 남매를 보며, 머뭇거리던 앨리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나는 상처 입을 거야.”
가시나무의 자세를 쓰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는 고슴도치와 같다. 함부로 가족을 포옹할 수도 없고, 자칫 사랑하는 가족에게 가시를 세울까 전전긍긍하며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벽을 쌓게 되니까.
동시에 그 가시로 누군가를 찌를 때마다, 자신 역시 똑같은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가문 내에서 가장 완벽한 ‘가시나무의 자세’를 구사하는 암살자가 각오를 다진다.
살을 에는 냉기 속에서 별과 단검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가죽 코트를 벗고, 그 아래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을 드러내며.
아름답고 새하얀 피부 같은 것은 없었다.
헤아릴 수 없는 끔찍한 흉터와 상흔이 빼곡하게 뒤덮여 있는, 그로테스크할 정도의 상처투성이 몸.
누군가를 죽일 때마다 자신도 상처를 입고, 그런 주제에 「대량학살장치」의 이명을 가진 가문의 암살자.
세상에서 가장 많은 상처가 새겨진 가시나무가 움직였다.
* * *
적과 싸울 때, 누군가는 상처를 입어야 한다. 그렇기에 앨리스는 기꺼이 자신이 ‘상처 입는 누군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 앨리스를 지켜보며 미하일과 이자벨이 아무리 슬퍼하고 각오를 다져도, 그녀를 대신해 상처를 입겠다고 아무리 말해도, 그때마다 가장 앞서서 상처를 입는 것은 늘 앨리스였다.
촤악!
그리고 그녀가 상처를 입을 때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들 역시 상처를 입는다.
가문 최속의 검식이라 일컬어지는 8식 달그림자의 자세를 통해, 어느덧 앨리스는 적진 속으로 쇄도해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도 들려 있지 않다.
그녀의 육체 그 자체가 무기였으니까.
촤악!
적들 속에서 그녀가 춤추듯 몸을 회전했다.
그러자 그녀의 발뒤꿈치를 찢고 튀어나온 칼날의 뼈가, 360도로 휘둘러지며 병사들을 두 동강 내버린다.
몸뚱이가 잘리고 창자와 내장이 흘러내려 쏟아지는 와중, 앨리스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의 등 뒤를 노리는 기사를 향해, 날개뼈에서 칼날의 뼈가 솟아 등 뒤에 있는 기사의 목젖을 꿰뚫었다.
칼날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마치 천사가 날갯짓하듯, 등을 찢고 튀어나온 강철의 날개가 휘둘러졌다.
동시에 열 손가락의 끄트머리를 찢고 또다시 칼날의 뼈가 튀어나왔다.
사출하기 위한 용도가 아니라, 마치 짐승의 손톱처럼 휘둘러 상처를 입히기 위해서.
그러나 더 이상, 그곳에 있는 ‘강철의 날개’는 앨리스 혼자의 것이 아니었다.
촤아악!
휘둘러지는 죽음의 거미줄 속에서, 미하일의 정장을 찢고 날개뼈가 튀어나왔다.
마찬가지로 죽음의 불꽃을 피워 올린 이자벨 나이트워커가, 4식 갈까마귀의 자세와 더불어 그녀의 전신에서 칼날을 뿜어내고 있다.
“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대모님.”
앨리스와 같은 칼날의 춤을 추며, 심지어 그 칼날에 가문의 7식 죽음의 거미줄을 걸고 응용하는 미하일이 말했다.
“당신의 상처를 제게 나누어 주세요.”
마찬가지로 가족을 위해 기꺼이 상처 입을 각오를 다진 채.
살갗을 찢고 칼날로 된 뼈가 끝없이 튀어나오며, 미하일의 몸에 새로운 흉터를 새겨넣는다. 이자벨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전부를 위해 앞다투어 상처 입기를 자처하며, 가족의 상처를 대속(代贖)하는 가시나무들.
그때마다 그곳에 있는 제국의 병사들이, 목이 잘리고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어깻죽지가 잘리고, 내장과 창자를 쏟아내며 새하얀 설산의 밑바닥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그것은 더 이상 전투라고 부를 수 있는 무엇조차 아니었다.
그저 완벽한 학살이었다.
* * *
“1차 원정군이 괴멸했습니다.”
죽어도 얼마든지 대체할 수 있는 무가치한 인간들의 죽음을 들었을 때, 그곳에 있는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으니까.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남단의 잘츠부르크 대주교령(Hochstift Salzburg).
나이트워커 공작령 기준에서 북쪽을 가로막듯, 그들 입장에서는 베네토 공화국으로 향하는 남쪽을 가로막고 있는 국경 산맥과 마주한 영지.
터무니없는 패전의 보고에도, 그 보고를 듣고 이야기를 나누는 ‘가치 있는 인간들’의 표정에는 일말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가치 있는 인간, 얼마 전 서거한 황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20살의 ‘젊은 황제’…… 막시밀리안 2세가 입을 열었다.
“그들의 죽음을 널리 알려라.”
“명령대로 각지에 파발(擺撥)과 전령을 보내 이미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심지어 1차 원정군이 아직 아무도 죽지 않고 산을 오르기 시작할 때부터─ 제국의 아들들이 숭고하고 명예로운 전투 끝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고 있었다.
“……실례하겠습니다, 폐하.”
바로 그때였다.
담담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곳에, 그림자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막, 생존자의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누가 살아 돌아왔죠?”
침묵하고 있던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의 말에, 그림자가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제4기사단의 기사단장을 비롯한 소수의 기사들이 협곡을 넘어 생환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모두 죽이세요.”
그 말을 듣자마자 빌헬미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의 희생이 ‘무가치’해지지 않도록.”
“이미 공안 부대가 움직였습니다, 아퀴나스 추기경 예하.”
“좋아요.”
그곳에서의 패배는 철저한 제국의 패배여야 했다.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하고, 모두가 명예롭게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은 처절한 패배.
좋은 이야기, 슬픈 이야기, 때때로 이야기는 그 자체로 어떤 그럴싸한 명분보다 강력한 명분이 된다.
특히 감동적이고 슬픈 이야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처절한 이야기는 더더욱 그렇다.
그리고 좋은 이야기를 연출하기 위해, 비극의 요소를 저해하고 감동을 줄이는 요소를 배제할 필요가 있다.
가령, 모두가 처절한 싸움 끝에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와중 낯짝 두껍게 살아 돌아온 생존자 따위들.
“이야, 사람 목숨이 아주 그냥 파리 목숨이네요.”
침묵하고 있던 교회군 총사령관이자 《피의 추기경》 체사레가 남의 일처럼 조소했다. 그곳에 있는 황제와 쌍두까마귀의 가족 앞에서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멀쩡한 제국의 아들들이 죽었으니, 다음 산 제물은 신성군단의 천사병 사단입니까?”
“그럴 리가요.”
그 말에 빌헬미나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신성군단과 천사병은 우리 제국의 소중한 자산이자 핵심 전력 중 하나랍니다.”
소중한 자산.
“그들의 희생은, 좀 더 의미 있고 값진 형태로 치러질 필요가 있겠지요.”
동시에, 자산은 결국 자산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