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26화 (126/200)

126화. 암살자의 전쟁 (3)

제국의 아들들이 ‘좋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던 그 시각, 달의 사원.

나이트워커 가문이 쌓아 올린 역사가 기록된 성지(聖地).

바로 그곳을 향해 제국군 부대가 일방적으로 침략을 감행하고 있는 와중, 그들 가문의 성지를 지키는 이들이 고작 세 명의 가족이 전부일 리는 없다.

그곳에서 기꺼이 상처 입는 누군가가 되기를 자청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시엔이 입을 열었다.

“미하일 형님과 이자벨 누님께서는…… 진작에 가시나무의 자세를 마스터하고 있었군요.”

각각 가문의 7식 검은 과부거미의 자세와 4식 갈까마귀의 자세를 통달한 그들이, 그곳에 있는 하이마스터 앨리스와 함께 또 하나의 검식─ 전신의 ‘가시나무’를 전개하며 적들을 도륙하고 있다.

기존에 마스터하고 있는 검식과 무엇 하나 상충되지 않고, 완벽할 정도의 조화를 이루며.

“그래, 그들은 이미 지혜의 고리 속에서 ‘성품성사’를 치렀단다.”

마찬가지로 사원 안에서 원경(遠鏡)을 통해 가족들의 전투를 지켜보던 루나가 대답했다.

“그러나 가시나무의 자세는 그저 이치를 통달했다고 해서 펼칠 수 있는 검식이 아니지.”

200개 남짓한 전신의 뼈를 칼날로 교체하는 것조차, 5식에 있어서는 아주 기초적인 수준의 이식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더 높은 경지의 완전한 5식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기존에 있던 뼈를 교체하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당장 그들이 펼치고 있는 칼날의 날개처럼, 인간의 굴레를 뛰어넘는 괴물의 골격과 뼈를 물리적으로 이식해야 하니까.

세례성사를 마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조차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천만한 수술.

“앨리스는 아직 그 아이들이 노목(老木)급 가시나무로 거듭나기에 이르다고 생각했단다.”

그녀, 앨리스의 전신을 빼곡하게 뒤덮은 흉터와 상흔을 떠올린다.

누군가를 찌르기 위해 반드시 자신을 찔러야 하는 양날의 검.

루나가 씁쓸한 듯이 말을 잇는다.

“자신의 아이들이, 자신과 같은 상처를 입고 고통받기를 바라는 어미는 없는 법이거든.”

“그래도 형님과 누님께서는, 같은 고통을 짊어지길 택했죠.”

그럼에도 그들 남매는 기꺼이 그들의 대모, 앨리스와 똑같은 상처를 입고 고통받기를 택했다.

훗날 3식 명경지수와 더불어, 5식 가시나무의 자세를 마스터하게 될 흑조(Black Swan) 티아 나이트워커와 마찬가지로.

* * *

기사가 바라는 것은 명예로운 죽음이지, 아무런 가치도 없는 개죽음이 아니다.

그렇기에 사실상 ‘하얀 죽음 산맥’을 넘어 공화국 북부, 나이트워커 공작령으로 향하란 원정 명령을 들었을 때. 제국의 기사들은 자기 귀를 의심해야 했다.

그들 역시 바보가 아니다.

이런 터무니없는 원정이 성공할 리도 없고, 제국 역시 처음부터 성공을 기대하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이 바란 고결하고 명예로운 희생이 아니었다. 아무 가치도 없는 개죽음, 그저 위정자(爲政者)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쓰고 버려지는 무가치한 죽음이었다.

─그래서 퇴각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괴물’들이 제국군을 도륙하고 돌이킬 수 없는 패색이 짙어졌을 때.

제국의 기사들은 살기 위해서 도망쳤고, 그들이 등정했던 하얀 죽음 산맥을 거꾸로 거슬러 내려갔다.

어쨌든 등정(登頂)에는 성공했고, 달의 사원도 목격했으며, 실제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과 싸웠다는 최소한의 구색과 명분도 갖추었다.

그렇게 실낱같은 희망과 함께 살아남아 하산하고 있는 기사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나 그림자 기사, 심지어 산맥의 망자들조차 아니었다.

매끄러운 가죽 재질의 검정 트렌치코트 위로, 핏빛 바탕에 흑색의 갈고리 십자가를 완장으로 찬 제복 차림의 무리였다.

그 칠흑의 제복이 갖는 의미를 모를 기사들이 아니다.

“…….”

신성 제국의 상급 공안 부대.

“형제님들, 어째서 살아 돌아왔습니까?”

알기 쉬운 환대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을 이끄는 남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갸웃거렸다.

“왜 그곳에서 명예롭게 순교(殉敎)하지 않고, 추하게 살아남아 목숨을 부지하신 겁니까?”

왜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나.

그 물음에 부하를 데리고 퇴각을 명령했던 기사들의 수장, 제국 제4기사단장이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우리더러 그곳에서 아무 의미 없는 개죽음을 당하란 것이냐.”

“아무 의미도 없는 개죽음이라니, 그럴 리가요.”

기사단장의 말에 공안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약속드리죠. 형제님들의 희생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그들은 이곳에서 희생될 필요가 있었다.

희생을 위한 희생.

바로 그때, 기사들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바로 제국의 방식이로군요.”

“!”

같은 기사들조차 그 이질적이고 낯선 목소리에 당황했다.

어느 틈에 자신들의 무리 속에 섞여 들어온 ‘망령’을 보는 것처럼─.

“……!”

그 의미를 헤아린 순간, 제국 공안을 이끄는 부대장의 표정 역시 창백하게 질린다.

그곳에 있는 제국 기사나 보병 따위는, 얼마든지 죽어도 되는 무가치한 인간들이다.

그러나 이곳에 있는 ‘제국 공안 부대’는 달랐다.

아무리 제국 공안이 자신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내버리는 광신의 괴물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코 그들의 목숨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내버릴 수 있는 그들이야말로, 오히려 제국과 교회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가치 있는 장기 말이니까.

적어도 그들 스스로는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확실히, 기사들의 희생에는 의미가 있었죠.”

패주 기사들 속에 섞여 있던 실루엣 하나가, 거추장스러운 투구와 흉갑을 벗어던진다.

《호수의 암살자》 시엔 나이트워커.

“답답해서 죽는 줄 알았네.”

그 외에도 시엔의 형 ‘비고’를 포함해 가문의 암살자는 물론, 그들과 함께 직접 전투를 수행하는 휘하의 그림자 기사들까지.

“아, 아…….”

무사히 온존(溫存)했다고 생각한 제국 기사는 오히려 극소수에 불과했다. 그곳에 있는 대다수는 처음부터 제국 제4기사단의 생존자 따위가 아니다.

산 자들 틈에 섞여 숨죽이고 있던 망령의 행렬이었다.

기사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던 것은, 처음부터 제국 공안이나 그들 사이에서 위장하고 있던 나이트워커 가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검이 휘둘러졌다.

“남의 영토에 함부로 발을 들였으니, 대가를 치러야지.”

여기는 밤하늘 산맥이 아니다.

제국과 공화국, 두 나라를 양분하는 와중 ‘제국의 영토’ 내에 속해 있는 그들의 땅이다.

그리고 일부러 살려 보내준 기사들과 함께, 어느덧 그들 속에 섞여 있던 나이트워커 가문의 망령들이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 도망쳐서 이 사실을 전달─”

말을 끝맺을 틈도 없다.

여전히 갑주를 벗지 않고 투구를 쓴 기사 하나가, 그대로 쇄도하며 일검을 휘둘렀다.

전신 갑주로 무장하고 있어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칼끝에서 빛나는 시린 월광을 보자마자, 모두가 그 의미를 이해했다.

《웃는 남자》 요한 나이트워커.

깨달을 틈조차 없이 제국 공안의 시체가 두 동강이 나서 사선으로 비스듬하게 잘린다.

마찬가지로 투구 속에서 칠흑의 붕대로 눈동자를 가린 검객이 칼을 휘둘렀다.

밴시 린.

“흠, 이것 참 유감스럽게 됐네요.”

끝으로 가문의 새로운 하이마스터이자 비고의 대부…… 《가시 인형》 미하일 나이트워커까지.

“댁들의 희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개죽음이 될 예정이라서 말이죠.”

어깨를 으쓱이며 미하일이 손가락을 튕겼다.

“비고.”

“알겠습니다, 대부님.”

완벽하게 7식을 구사하는 두 부자(父子)의 손끝에서, 도망칠 수 없는 죽음의 거미줄이 일대를 집어삼켰다.

순백의 성광이 내려앉으며 순교자의 자세를 취하려는 공안들이, 미처 천사를 강림시킬 틈도 없이 피를 흘리기 시작했다.

설산의 밑바닥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흘러넘치는 피바다 속에서, 상반신이 두 동강 나서 죽어가는 제국 공안이 기도하듯 읊조렸다.

“우, 우리의 죽음이 가치 있기를…….”

“아이고, 가치 같은 소리 하시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미하일이 조롱했다.

“뭐,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지.”

감정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댁들이 여기서 멍청하게 죽어준 덕에, 우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네.”

* * *

그 시각,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의 주교좌 성당.

“……공안 부대의 소식이 두절되었습니다.”

실루엣의 보고에 예배석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제국 공안의 정점이자 감찰성성의 장관 추기경,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을 새겨넣은 제복 차림을 한 여성이었다.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수색대가 그들의 행방을 찾고 있고, 아울러 산 중턱에서 제국 제4기사단의 시체와 갑주가 발견되었습니다.”

“생존자가 있나요?”

“……갑주와 시체의 숫자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빌헬미나의 물음에 실루엣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망령이 섞여 들어왔군요.”

죽음의 성모가 놀랄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죽은 형제님들의 순교에 기도합시다.”

대답하고 나서 빌헬미나가 미소 지었다.

오히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곳에 있던 제국 공안 부대의 희생은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비록 장기 말에 지나지 않는 그들이, 빌헬미나와 제국 상층부의 ‘진짜 계획’을 알 리는 없었지만.

알 필요도 없었다.

제국 공안 역시, 결국에는 조금 값비싼 도구에 지나지 않으니까.

* * *

그 시각, 제국의 기사들 속에 섞여 밤을 걷는 자들이 제국의 영토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에 발을 들였을 무렵.

모두의 시선이 밤하늘 산맥의 전장(戰場)에 쏠려 있는 와중, 마찬가지로 적의 영토에 발을 들이는 자들이 있었다.

제국의 적, 베네토 공화국의 심장에.

“이것 참 아름다운 도시로군요.”

쏟아지는 달빛을 등진 채, 단안경을 쓴 남자가 나직이 몸을 돌렸다.

「잰틀맨」 잭 더 리퍼.

발밑에는 갈가리 찢겨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누군가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다. 정장 차림의 잭이 까마귀 부리 모양의 지팡이를 고쳐 잡고 휘파람을 불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최고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하이마스터 대다수가 자리를 비운 사이, 그 틈을 노리고 공화국의 심장에 비수(匕首)를 꽂아 넣기 위해.

그리고 공화국의 수도이자 「모든 도시의 여왕」이라 불리는 그곳 베네토에 있는 ‘쌍두까마귀의 가족’은, 잭 하나가 아니었다.

누군가 계획을 세울 때, 상대 역시 계획을 세운다.

나이트워커 가문이 이 틈을 이용해 함정을 파고 계획을 세운다고 생각하는 사이, 그들의 적 역시 함정을 파고 똑같은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어느 쪽의 계획과 함정이 더 정교하게 맞아떨어질지는, 오직 결과가 증명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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