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럴듯한 계획 (1)
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그 시각, 밤하늘 산맥에서 패주한 기사들 틈에 섞여 ‘밤의 망령’들이 침입해 있는 제국의 영토─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주교좌 성당의 정례 예배가 끝난 뒤 하나둘씩 빠져나가는 신도들을 뒤로하고, 예배당 끝자락에 앉아 있던 빌헬미나가 몸을 일으켰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님.”
“아, 아퀴나스 추기경 예하…….”
제단 앞에서 대주교를 상징하는 자줏빛의 가대복 수단(Choir Cassock)을 입은 남자가, 빌헬미나의 모습을 보자마자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이런 소식을 전하게 되어 무척이나 유감이랍니다.”
“무, 무슨 소식입니까?”
칠흑의 베일을 쓴 그녀의 말에 대주교가 머뭇머뭇 되물었다.
“하얀 죽음 산맥을 등정하던 제국군이 몰살당하고, 그들의 시체가 영원히 이 대지를 방황하는 망자(亡子)가 되었다는 소식이죠.”
“오, 주님…….”
“게다가 그것뿐이 아니랍니다.”
“그, 그 말씀은…….”
“제가 설명해 드리죠, 누님.”
바로 그때였다.
빌헬미나의 말에,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림자 하나가 로브를 벗으며 말했다.
시체처럼 창백하고 핏기 없는 소년이다.
겉으로 보기에 나이는 열다섯 살 정도.
그러나 그 소년이 에인션트 리그에 소속된 여덟 마탑 중 하나를 이끄는 마탑주란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제국 제4마탑, 죽은 자를 기도하고 예를 차리며 의식을 치르는 「장송(葬送) 학파」.
공식적으로 그렇게 알려진 4마탑의 장의사들.
바로 그 마탑의 수장이자 「장송공(Lord Undertaker)」이라 불리는 소년이 그곳에 있었다.
아울러 그곳에 있는 빌헬미나가 추기경의 지위로 이곳에 온 게 아니듯, 그 소년 역시 마탑주의 입장으로 이곳에 온 게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쌍두까마귀의 가족’으로서 이 자리에 왔을 뿐.
“공안의 첩보에 의하면, 하얀 죽음 산맥에서 쓰러진 제국의 아들들이 ‘공화국의 뜻대로 움직이는 망자 군대’가 되어서 이곳 대주교령을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일찍이 사악한 흑마법에 눈이 멀어 신과 조국을 저버리고 공화국으로 도망친 이단자, 베르나르트가 손을 쓴 듯하더군요.”
장송공의 말에 대주교가 조용히 숨을 삼켰다.
“물론 대주교령에 주둔하고 있는 교회군을 비롯한 우리는, 이 땅과 아들들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싸울 것이라 맹세합니다.”
걱정하는 듯한 대주교를 향해 빌헬미나가 말했다. 이 나라, 제국의 힘을 아는 대주교에게 있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럽게 들리는 말이었다.
“그, 그럼 즉시 영지 내의 상비군과 기사 전력을 소집하겠습니다.”
“아, 그것참 고마운 말씀이네요.”
대주교의 말에 빌헬미나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슬슬 망자들의 침공에 대비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럼 망자들은 지금쯤 어디에 있는 겁니까?”
“아직은 없답니다.”
“예?”
각오를 다진 대주교를 향해 빌헬미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에 대주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장송공이 남의 일처럼 대답했다.
“─이제 되살려야죠.”
* * *
그로부터 얼마 후.
사악한 사령술사 베르나르트가 나이트워커 가문과 손을 잡고 펼친 흑마법─ ‘불사병’이 퍼졌다는 이유로 잘츠부르크 대주교령 전체에 봉쇄령이 내려졌다.
주교의 영지 하나를 통째로 제물 삼아, 그곳에 쥐새끼처럼 숨어든 ‘밤을 걷는 자들’을 모조리 소탕하기 위해서.
* * *
하늘이 무척이나 검고 어두웠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그곳 일대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무너진 지옥이었다.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는 인간이 같은 인간을 물어뜯고, 상처 입은 인간 역시 머지않아 ‘감염자’가 되어 같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구시대의 흑마법사들이 되살린 구울도, 그렇다고 좀비나 스켈레톤조차 아니었다.
지금까지 감히 본 적 없는 기괴하고 끔찍한 형태의 괴물, 그저 감염자(Infecter)라 불리는 그들의 정체를 모를 시엔이 아니었다.
‘제국 놈들, 설마 자기 영토에…….’
두말할 것 없이 그것은 결코 사악한 사령술사 베르나르트의 작품이 아니었다. 애초에 베르나르트 후작의 암흑물질 학파는 이런 부정하고 사악한 마법 따위와 거리가 멀었으니까.
「불사의 역병」.
이런 저주받은 마법을 병기용으로 개발하고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이들의 정체는 오직 하나였다.
제4마탑, 장송 학파가 쌓아 올린 금기의 마법.
그리고 그 마법을 펼친 장소는 적국의 영토 따위가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들의 땅이었다.
─사방에서 죽여도 죽지 않는 불사자가 끝없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곳에 아직 남아 있는 생자(生者)의 냄새를 맡고.
“이야, 살다 살다 이런 미친놈들을 다 보네.”
휘몰아치는 죽음의 거미줄 속에서 미하일이 속삭였다.
이 영지의 살아 있는 인간 전부가 괴물이 되어버린 이상, 그들에게 이곳 도시는 결코 몸을 숨기기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저주받은 역병이 퍼져나가는 일대를 포위한 채, 도시를 정화하는 자들이 있었다.
신성 제국 국교회가 자랑하는 교회군.
그들 군단이 대주교령 일대를 포위하고 천사의 형태를 강림시켰을 때, 그곳에 있는 밤을 걷는 자들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무엇보다도 괴물 같은 천사.
“음, 보기 좋게 걸려들었는걸.”
저것은 당초 나이트워커 가문이 파악하고 있던 제4나 제5, 제8군단 따위의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제국 공안이자 이단심문관 이상으로 광기 어린 신앙을 갖고, 신의 뜻을 수행하는 병사들.
제국 국교회 제1신성군단, 군단명 「데우스 불트(DEUS VULT)」.
고대 제국어로 ‘신께서 전쟁을 바라신다’는 의미를 가진 경구였다.
* * *
누구나 다 계획을 세운다.
밤을 걷는 자들이 도망치는 기사들 속에 숨어 제국의 영토로 잠입했듯이.
제국 역시 그들 하이마스터를 함정에 빠뜨려 일망타진하고, 핵심 전력의 공백을 틈타 ‘모든 도시의 여왕’ 베네토에 숨어들어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주려는 것처럼.
베네테 공화국의 국영은행장, 메디치 디 샤일록이 거주하는 메디치 가문의 별저.
바로 그 저택의 침실을 향해, 그 누구보다 암살자답게 잭 더 리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린 달빛 속에서 모노클의 유리를 섬뜩하게 빛내며, 그 무엇보다 정중하기 이를 데 없는 말투와 자세로.
“처음 뵙겠습니다, 돈 메디치.”
샤일록 디 메디치.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를 향해 잭이 말했다.
“가난한 자의 고혈(膏血)을 탐하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채워질 리 없는 탐욕에 황금을 쏟아붓는 어리석은 수전노시여.”
“……뭐냐.”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그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고, 메디치 공작이자 샤일록이 나지막이 표정을 찌푸렸다.
“제국의 암살자냐.”
잭과 같은 모노클을 쓴 채 탁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서류를 처리하며. 세상에서 가장 사무적으로 들리는 목소리를 내며.
“나는 바쁜 몸이다. 볼일이 있거든 빨리해라.”
황금과 그림자, 바다.
나이트워커 가문, 서펀트 가문과 함께 이 나라의 기둥을 지탱하는 공화국 최고 고위층 중 하나.
“호오, 달리 믿는 구석이 있는 겁니까?”
“없다.”
샤일록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유감스럽게도 내 경호 중에 네놈 정도의 암살자를 쓰러뜨릴 자는 없으니까.”
“흠, 그것참.”
젠틀맨 잭이 흥미롭다는 듯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럼 ‘그 이외의 경호’가 있다는 뜻이군요.”
“물론입니다, 미스터 잭.”
그림자 속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척 낯이 익은 노신사의 목소리였다.
“다시 뵙게 되어 기쁘네요, 돈 루치아노.”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
그 목소리를 듣고 잭은 당황하지 않았다. 앞서 샤일록이 그랬듯이.
“역시, 메디치 공작 정도 되는 자를 지키기 위해서는 ‘13계단’이 움직일 필요가 있겠지요.”
나이트워커 가문이 자랑하는 최고 전력, 13명의 하이마스터.
그중 호수의 암살자, 웃는 남자, 밴시 3명이 ‘제국의 영토’에서 작전을 수행하고 있다.
그 외에 제국의 첩보력을 통해 대륙 각지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하이마스터 일곱을 파악했고, 다시 말해 13명의 하이마스터 중 ‘세 명’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세 명 중 하나가 메디치 디 샤일록의 저택에 있다.
이걸로 공화국에 남아 있는 남은 하이마스터의 숫자는 둘.
그리고 그 두 명조차, 아마 ‘서펀트 가문의 인간’들을 수호하기 위해 임무를 수행하고 있을 것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13계단, 하이마스터의 숫자와 위치를 파악하고 나서 잭이 미소 지었다.
딱히 신호를 보낼 필요조차 없었다.
그들이 노리는 것은 애초에 공화국의 심장이자 수도, 베네토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메디치나 서펀트 가문을 향하는 암살 위협조차 눈속임에 불과하다.
오히려 젠틀맨 잭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정보를 흘림으로써 수도 베네토의 핵심 가문과 요인(要人) 경호를 강화하도록 강요한 것과 다름없었다.
공화국에 숨어든 쌍두독수리의 가족이 진짜 노리는 것은 달리 있었다.
이 도시는 결코 이 나라의 심장이 아니다.
진실로 이 나라를 지탱하는 심장이자 뇌이며 척수(脊髓)를 자처하는 것은 달리 있으니까.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
쌍두독수리의 가족이 세운 그럴싸한 계획대로 하이마스터 대다수의 전력이 곳곳에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사이,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숫자의 ‘쌍두까마귀 가족’과 제국의 고위 전력들이 집결해 그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 나라의 진짜 심장을 도려내기 위해서.
* * *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그 시각, 나이트워커 공작령의 저택.
테이블에 앉아 포도주를 들이켜며, 가문의 가장 지혜로운 자 루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렇게까지 고독할 정도로, 이 저택에 우리 둘이 남겨져 있는 것이.”
“모두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으니까요.”
그녀와 함께 포도주를 들이켜며 라일라가 웃었다.
“우리가 지켜준 아이는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되어 다시금 새로운 아이들을 지켜주겠죠.”
아홉 살의 시엔, 아홉 살의 비고, 아홉 살의 미하일, 심지어 아홉 살의 자기 자신이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라일라가 미소 지었다.
그들 모두가 과거에는 지켜져야 할 어린아이였고, 이제는 커서 새로운 아이들을 위해 저마다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꼭 오늘 밤이라도 죽을 사람처럼 말을 하는구나.”
그 말에 루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의 곁에는 늘 죽음이 있답니다, 루나 님.”
“죽음이 썩 달가운 손님은 아니지.”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적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는 듯하더군요.”
더 이상 기척을 숨기지 않는다.
어느덧 두 사람의 주위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그림자 기사들 같은 어중이떠중이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짜 강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대 제일의 강자 중 하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기둥이라 할 수 있는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암살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