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29화 (129/200)

129화. 그럴듯한 계획 (3)

열두 명의 최고위 천사, 일곱 명의 쌍두까마귀.

나이트워커 공작과 가장 지혜로운 자.

수적 차이는 이미 압도적이란 말조차 부족하다. 제아무리 한 명의 강자가 일백을 능가하는 세상이라지만, 이것은 그런 수준조차 아니다.

애초에 그곳에 있는 19명은 결코 어중간한 강자 따위가 아니다. 설령 암살자들의 어머니라 하더라도, 순수한 물량과 수적 우위로 압도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의 격차.

설령 그 곁에 콘실리에리 루나가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눈부신 성광을 흩뿌리며 강림하고 있는 최고위 천사들을 거느린 채, 순백의 코트 위에 태양과 까마귀를 새겨넣은 남자가 말했다.

“우리는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일 겁니다.”

장녀 빌헬미나와 함께 그들 가족을 지탱하는 장남으로서.

“설령 그 어떤 희생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황실 서기관(Royal Secretary)》 프란츠 카프카.

“빌헬미나가 무척 슬퍼하겠는걸.”

“누님을 위한 일입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상냥함처럼 고통스러운 것도 없는 법이지.”

라일라가 남의 일처럼 미소 짓는다. 그 말을 끝으로 그곳에 있는 쌍두까마귀의 가족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촤아악!

각자의 무구와 검식(劍式), 일찍이 밤을 걷는 자들의 전유물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가문의 자세들이 펼쳐진다.

망령, ■■■, 명경지수, 갈까마귀, 가시나무, 나락, 검은 과부거미, 달그림자, 크라켄에 이르기까지.

“적의 영토에 발을 들일 때는, 늘 그에 맞는 각오가 필요한 법이란다.”

심지어 그들 외에도 제국 국교회가 자랑하는 열두 명의 최고위 이단심문관을 상대로 두고도, 라일라는 절대 주눅 들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죽음을 각오한 자의 체념이나 좌절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곁에 있는 루나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여기는, 그들 밤을 걷는 자의 대지였다.

가문 최고 원로이자 콘실리에리─ 루나 나이트워커가 입을 열었다.

“《지혜의 고리》.”

중얼거림과 동시에 딛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 뒤틀렸다.

“제4의 고리, 【이상】.”

절그렁.

사슬 소리가 났다. 물리적 제약이나 구속마저 초월해, 영혼 그 자체에 걸리는 것 같은 사슬이.

“당신들은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오만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지만…….”

어느덧 그곳 일대를 덧씌우는 지혜의 세계 속에서, 라일라가 즐거운 듯 말을 잇는다.

“당신들은 ‘우리 가족’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답니다.”

“─!”

“우리가 당신들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깨닫고 보니, 그곳에 더 이상 지혜로운 자 ‘루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대신, 루나의 지혜 속에서 정교하게 재구성된 또 하나의 라일라가 그곳에 있었다.

지혜와 사상의 결계 속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실제 세계’에.

훗날 시엔이 기억하는 실패의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경우의 수.

그날, 시엔의 계략에 의해 쌍두까마귀의 가족들이 베일 속에서 존재를 과시하고 드러냈던 날부터, 바로 이날을 대비해 콘실리에리 루나의 지혜 속에 새겨넣은 또 하나의 자신.

새롭게 바뀐 미래가 그곳에 있었다.

“!”

어떤 의미에서는 진짜보다도 완벽한, 문자 그대로 「이상의 형태」로 구성된 또 하나의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함께.

* * *

시엔 일행을 포위한 채 쇄도하는 천사병들의 군세 속에서, 흑발의 귀공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주 위로 순백의 서코트와 흑색의 철십자를 새겨넣은 소수의 기사들이 그 곁을 따랐다.

여덟 개의 신성군단 중에서도 정점에 서는 제1신성군단, 군단명 ‘데우스 불트’를 이끄는 제1군단장.

아울러 여덟 신성군단 모두를 아우르는 최고 군단장.

「로드 템플러(Lord Templar)」 콘라트 크론베르크.

심지어 그 남자의 전신을 덧씌운 미스릴 중장갑주는, 시엔의 ‘왕 시해자’와 같은 칠흑의 미스릴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희소하다 일컬어지는 미스릴, 흑진은(黑眞銀).

바로 그 블랙 미스릴로 이루어진 흑갑과 흑검.

─거기에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린 천사의 모습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더없이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형태의 기사가 있을 따름이었다.

하품의 7품, 권품천사.

도읍과 나라와 왕들을 수호하는 천사.

─로드 템플러는 이미 강림을 마친 상태였다. 그러나 권품(權品)의 천사를 강림시켜도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없다. 심지어 날개조차 돋아나지 않았다.

콘라트를 비롯한 휘하의 나머지 군단장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군단장들인가.”

그들의 존재를 보자마자 밴시 린이 나직이 표정을 찌푸렸다. 눈동자를 가린 칠흑의 붕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그들이 내뿜는 위압감을 확실하게 인식하며.

“체사레…….”

아울러 그들과 함께 교회군 총사령관, 순백의 모피 코트를 걸친 흑발의 귀공자가 그곳에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시엔 나이트워커.”

체사레가 차가운 미소와 함께 서슬 퍼런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는다.

“─그리고 경애하는 밤을 걷는 분들이시여.”

거기에 있는 것은 더 이상 나이트워커 가문에 고개를 조아리는, 권세도 뒷배도 없는 늙은 밤의 괴물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강대한 제국의 권력자였다.

총사령관으로서 체사레가 거느린 휘하 신성군단장들이 차례대로 전투 태세를 갖추었고, 바로 그때였다.

소리가 멈췄다.

사방에서 끝없이 쇄도하고 있던 천사들의 괴성이 멈춘다. 움직임이 멈춘다.

지성도 무엇도 없는 천사란 이름의 괴물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고 무릎을 꿇는다.

마치 그곳에 있는 그들의 ‘주인’을 알아보고 예를 갖추듯이.

“흠, 이것 참. 개도 기르는 주인은 알아본다는 건가.”

그 모습을 보며 미하일이 남의 일처럼 조롱했고,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등을 맞대며 그곳에 있는 강자들을 마주했다. 이윽고 깨달았다.

그곳에 있는 모두를 합친 이상으로 커다란 위압감을 가진 남자를.

“여기 있었구나, 나의 아들딸들아.”

위압감? 아니다. 그런 말조차 부족했다.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에게 새겨진 본능과 유전자가 호소하고 있었다.

─절대로 거역할 수 없는 아버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제국의 새로운 황제, 막시밀리안 2세.

겉보기에는 이제 겨우 스물이 된 애티 어린 남자가, 그곳에 있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세월의 층첩(層疊)에서 비롯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다.

그저 황실의 핏줄, 제국의 황제란 이유 하나로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저 남자의 육체 속에 깃들어 있는 정체는 ‘막시밀리안 2세’조차 아니다.

이 모순을 납득시킬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밖에 없다.

“밤의 아버지─.”

최초의 밤을 걷는 자, 초대 가주 카산 나이트워커.

막후(幕後) 속에서 이 세계를 다스려온 제국의 진짜 지배자가 그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 나의 아이들아.”

남자가 말했다.

막시밀리안 2세, 카산 나이트워커, 하산 사바흐, 그리고 천마(天魔)─.

그 형상이 끝없이 부서지고 다시 형성되기를 거듭하며 살아온 진짜 밤의 망령.

‘…….’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마자 시엔은 기이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의 뺨 위에 새겨져 있는 하나의 상흔.

그제야 남자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부서지고 형성되기를 거듭해도 저주처럼 자신을 따라오는 이 상흔이, 비로소 ‘누구의 손’에 의해 새겨진 것이었는지.

“……그랬었나.”

깨닫고 나서 남자가 미소 지었다.

“시엔 나이트워커, 나의 가장 커다란 과오(過誤).”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다시 보게 되어 기쁘구나, 영겁의 밤에 걸쳐 나를 속박하고 있는 저주의 아이야.”

“우리가 본 적이 있었나?”

“그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나의 아들아.”

남자가 말했다.

“……나는 너의 아들이 아니다.”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린 증오를 가까스로 억누르며.

“나를 아들이라 부를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오직 한 명,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걸음을 내디뎠다. 설명할 필요조차 없이, 눈앞의 남자와 맞서는 것은 오직 시엔 혼자의 몫이란 것처럼.

“체사레는 내가 맡지.”

그 의미를 헤아린 《웃는 남자》 요한이 순백의 모피 코트를 걸친 귀공자를 마주했다.

밴시 린과 미하일, 비고가 함께 그곳에 있는 로드 템플러를 비롯한 군단장들을 마주했다.

그곳에 있는 것은 버려도 되는 소모품이 아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이 나라, 제국을 지탱하고 있는 핵심 전력이자 기둥들이다.

그리고 당초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이곳에 온 이유 역시 하나였다.

소모품이 아닌 자들을 죽이기 위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돌고 돌아 모든 계획은 다시금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과 적들이 바란 형태로 맞물렸다.

그리고 각자의 그럴싸한 계획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이제부터 그들 하기 나름의 일이었다.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일찍이 헨젤과 그레텔 남매가 준 칠흑의 애검(愛劍) ‘왕 시해자’를.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의 아들로서.

그리고 《암살자들의 아버지》로서.

* * *

빌헬미나가 그곳에서 목격한 것은,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었다.

“프란츠…….”

밀랍으로 된 얼굴처럼 생기와 감정 없는 표정을 가진 남자.

섬뜩할 정도로 작위적이고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남자.

그러나 빌헬미나는 알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결코 밀랍으로 된 것도 아니고, 감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저 미소 짓는 법에 서투른 것뿐이었다.

바로 그 남자가, 진짜 밀랍 인형처럼 차갑고 싸늘한 시신이 되어 널브러져 있었다.

누구도 아니고, 사랑하는 자매의 손에.

─최고위 이단심문관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다수가 찬란한 순백의 날개를 찢고 피투성이가 되어 추락해 있다. 설령 세상의 이치를 벗어나 있는 그들 초월자의 힘조차,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휘두르는 칼날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듯이.

“어서 오렴, 빌헬미나.”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상처를 입고,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과 함께─ 그럼에도 기꺼이 그곳에 있는 이들을 굴복시키고 있는 당대 제일의 최강자 중 하나로서.

그녀의 곁을 지키는 또 하나의 ‘이상적인 암살자들의 어머니’와 함께.

“……그렇구나.”

그 모습을 보며 빌헬미나가 쓴웃음을 지었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상냥함이 가져온 파국을 목격하며.

“부상을 입고 살아남은 자들을 데리고 돌아가렴.”

바로 그곳에서, 라일라가 말했다.

이 이상의 싸움은 바라지 않겠다는 듯이.

아니, 아마 저쪽도 이 이상 전투를 치를 여력이 없는 거겠지. 실제로 그녀의 상처는 적지 않다.

어쩌면 이후 평생을 더 이상 이전처럼 싸울 수 없을 정도의 상처를.

그러나 그녀가 입은 것은 고작 상처다.

그런데 그곳에 있는 빌헬미나의 가족들은 그렇지 않았다.

“누님……!”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는 쌍두까마귀의 가족들이 있다.

“물러나자꾸나, 디트리히.”

그녀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가족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비로소 빌헬미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사랑하는 언니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언니를 사랑하는 동생 역시, 이제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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