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구역질 나는 악 (1)
‘당신에게 제가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알고 있어요.’
무심코 그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이제는 기척조차 나지 않을 정도의 빛바랜 옛 추억.
나이트워커 가문 역시 필요에 따라서는 정략적 목적 등을 이유로 혼약을 맺고 유력 가문과의 다리를 놓는다.
그 시절, 루치아노 역시 필요에 의해 칠왕국 군도의 귀족 출신 ‘소피아’와 결혼하고 부부가 되었다.
여전히 루치아노에게는 가족이 전부였고, 가족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저에게는 당신이 전부예요, 루치아노.’
그렇기에 그녀, 소피아가 ‘잭 더 리퍼’라 불린 칠왕국의 어느 살인귀에게 당해 숨이 끊어졌을 당시─ 루치아노는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어느덧 「늙은 암살자」가 되어 자신 안의 감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노련함을 갖췄으므로.
그러나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촤악!
단안경을 쓴 살인귀, 잭 더 리퍼의 지팡이 끝에 달린 칼날이 루치아노의 몸을 꿰뚫었다. 목에 걸린 펜던트가 바닥에 떨어져 열리고, 그 속에 들어 있는 아내의 초상(肖像)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두둑.
그 위로 피가 떨어져 내렸다.
그는 늙은 암살자였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치고 지나칠 정도로 오래 살았다. 이제 와서 삶에 남겨질 후회 따위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에 이르러, 아내에게 선의의 거짓이라도 말해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니, 애초에 그것은 처음부터 거짓말조차 아니었는데도─.
“흠, 이것 참. 역시 쉬운 상대는 아니었네요.”
늙은 암살자가 쓰러졌고, 신사는 살아남았다.
“신사로서 마땅히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돈 루치아노.”
모노클에 묻은 피를 닦으며 ‘젠틀맨’ 잭이 말했다.
“그나저나, 도망치지 않으십니까?”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는 암살 대상, 세상에서 가장 악명 높은 고리대금업자를 향해서.
“돈 루치아노가 죽은 시점에서, 살아남을 방법 따위가 있을 리 없겠지.”
샤일록 디 메디치가 남의 일처럼 담담히 읊조렸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가 등 뒤에 있는 와중에도, 개의치 않고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서류 더미를 결재하며.
남자는 돈에 미친 늙은이였다.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나.”
“설마 추하게 목숨이라도 구걸할 생각입니까?”
“흥, 그럴 리가.”
샤일록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나를 죽여도, 부디 여기 있는 서류는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있겠나.”
“유서라도 쓰신 겁니까?”
그 말에 잭이 흥미로운 듯이 되물었다.
“아니, 내일까지 결재해야 할 은행의 문서들이다.”
“흠, 그 정도는 들어주기 어렵지 않네요.”
“빌어먹게 고맙군.”
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마지막 서류에 깃펜을 휘갈겼다.
촤악!
그와 함께 샤일록의 심장, 살 1파운드가 도려내졌다.
일찍이 샤일록이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준 것과 똑같은 최후.
돈에 미친 늙은이의 최후였다.
* * *
아퀴나스 가문의 핏줄에서 대대로 발화되는 특수 능력, 진실의 눈.
바로 그 눈동자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실’을 비추고 있었다.
두 자매는 더 이상 서로의 전부가 아니란 것을.
서로의 가장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빼앗은 증오스러운 적수임을.
돌이킬 수 있는 것 따위는 없었다.
라일라 나이트워커와 빌헬미나 아퀴나스는, 이제 서로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으니까.
* * *
밤의 아버지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이자 ‘암살자들의 아버지’ 시엔 역시 그곳에 있었다.
미래의 어리석은 실수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 바로 눈앞의 남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다.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지금의 나는 이 남자를 쓰러뜨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강해졌나?
알 수 없었다.
그저 한 가지 바뀌지 않는 진실은, 눈앞의 남자를 쓰러뜨리지 않는 이상 절대 가족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엔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블랙 미스릴로 된 그의 애검, 왕 시해자(Kingslayer)를.
동시에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낡고 녹이 슨 단검을 바라보았다.
찰나의 순간, 바로 그 단검이 거리를 좁혀왔다.
카앙!
바로 시엔의 코앞까지.
신기 묠니르의 힘을 이용해 뇌신의 눈동자를 개안하고 있는 시엔의 초점 없는 청백색 눈조차, 사전에 아무 전조를 파악하지 못했다.
가문의 시조가 펼치는 최초의 식, 망령의 자세.
가장 완전한 망령이 그곳에 있었다.
“영야(永夜).”
그와 함께 남자와 시엔이 딛고 있는 일대를 중심으로, 끝나지 않는 밤의 어둠이 내려앉았다.
“백야(白夜).”
마찬가지로 시엔 역시, 끝나지 않는 밤을 끝내기 위해 새하얀 밤을 덧씌운다.
각자의 등 뒤로 저마다 흑백의 밤을 거느린 채, 두 명의 아버지가 격돌했다.
밤의 아버지와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나의 검으로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일격 끝에 밤의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주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주인의 검으로 주인을 찌를 수 있겠느냐?”
마치 철없는 아들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눈동자를 하고서.
“그것은 몸의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데 몸의 손이 멋대로 움직여 자기 목을 조르는 것과 같다.”
마치 그곳에 있는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그저 자신의 것이자 소유물이며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듯이.
“그럼 자신의 손 하나 뜻대로 어쩌지 못하는 네놈이 ‘주인’을 자처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네놈들은 썩어 문드러진 몸이니까.”
밤의 아버지가 말했다.
“나의 일부이자, 나의 몸을 좀먹는 썩어 문드러진 부패(腐敗)이며, 나의 육신을 갉아먹는 종양이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었다.
“몸의 주인이라 해도 자신의 썩어 문드러진 팔다리를 자르고, 몸에서 자란 종양을 도려내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게 바로 아버지가 그의 아들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러나 마땅히 썩은 것은 잘라내고, 종양은 도려내야 할 것이다.”
썩어 문드러진 팔과 다리. 육신을 좀먹는 종양.
그 사실이 참을 수가 없었다.
‘살아, 시엔.’
사랑하는 가족이, 형제자매가 죽어가는 미래, 지켜주지 못한 가족들이 흘린 핏속에서 시엔이 홀로 살아남아 있는 와중에도, 남자는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시엔의 사랑하는 것들이 죽을 때마다, 자신의 썩어 문드러진 팔을 절단하고 종양을 도려내는 것이라고.
“도려내야 할 종양은 네놈이다.”
아무 감정조차 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남자의 모습을 상상하니, 용서할 수가 없었다.
땅을 박찬 시엔이 칼을 휘둘렀다. 칼날이 부딪쳤고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다.
끝없는 무음(無音)의 세계, 얼어붙을 정도의 고요함과 침묵 속에서 《호수의 암살자》가 쇄도했다.
그 어느 때보다 맑고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 속에, 이 세상의 전부를 잿더미로 불태울 불과 벼락을 감추며.
파지직!
잔잔하게 일렁이는 호수의 고요함은 아주 찰나였다.
고요함 끝에, 시엔의 눈동자가 다시금 초점 없는 청백색의 빛을 머금고 뇌전을 육체에 덧씌운다.
“네놈은 죽어 없어져야 할 악이다.”
명경지수의 자세, 뇌수(雷水).
“자신의 악(惡)은 돌아보지 못하매, 남에게서 자신의 허물을 찾아내어 손가락질하기 바쁘구나.”
밤의 아버지, 그리고 천마가 조롱했다.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이 사랑하지 않는 것, 그들의 이익을 위해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저지른 죄악을 되새기며.
“너희가 옳고 그름을 떠들며 선악을 논할 정도로 옳은 자들이더냐?”
맞는 말이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렇기에 시엔이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우리 가족을 위협하는 모든 것은 악이다.”
눈앞의 남자를 죽여야 할 진짜 이유.
“그리고 그게 네놈이 없어져야 할 이유다.”
그가 악이라서도 아니고, 그릇된 존재라서가 아니다. 그저 나이트워커 가문에 위협이 되고 있다는 이유.
자기들밖에 모르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존재의 사고방식.
그리고 세상은 그들을 일컬어 이렇게 불렀다.
“《악인(惡人)의 자세》.”
그의 말이 맞았다.
시엔은 악이다. 나이트워커 가문도 악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주어진 검과 식으로는 결코 그 남자를 쓰러뜨릴 수 없다.
오직 시엔만의 방식으로 쓰러뜨릴 필요가 있다.
악인의 자세(Evildoer Stance).
악인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타인을 짓밟고 빼앗는 구역질 나는 악의 방식.
절대악.
이 세상에서 나이트워커 가문이 가장 잘하는 일.
그것이 바로 시엔이 손에 넣은 새로운 자세이자 깨달음의 형태였다.
‘검의 자세’는 검식(劍式)이 아니다. 검술과도 다르다.
본질적으로 저마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검을 쥐고 취하는 하나의 방식이자 이념(스탠스)에 불과하다.
물론 특정 자세를 구사하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온갖 혹독하고 까다로운 동작과 움직임, 검식 등에 통달하고 숙련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일정 이상에 경지에 이르러 있는 강자들은, 때때로 섬광처럼 뇌리를 스치는 깨달음 하나로도 ‘새로운 자세’를 펼칠 수 있게 된다.
가령 그날, 스카디 제도에서 ‘불멸자의 자세’를 펼친 체사레 보르자처럼.
바로 지금의 시엔 나이트워커처럼.
“뺨의 생채기 하나로는 끝나지 않을 거다.”
이윽고 시엔이 자세를 취하자, 비로소 남자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의 빛이 깃들었다.
이윽고 깨달았다.
저것은 자신의 검이 아니란 것을.
“마신의 자세.”
남자 역시 읊조렸다.
악인과 악마(惡魔).
서로의 검이 격돌했다.
일섬.
촤악!
시엔의 몸에 새겨진 혈선(血線)이 피를 뿜어냈고, 마찬가지로 시엔의 손에 들린 ‘왕 시해자’의 검은 서슬이 ‘황제’의 몸에 혈선을 그렸다.
악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않는다. 악이 악을 행하는 것은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
그저 행할 따름이다.
“「악행(惡行)」.”
일검 끝에, 시엔이 초식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랬나.”
몸을 따라 그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수의 혈선을 뒤로하고 남자가 담담히 납득했다.
직후, 황제의 형상이 부서져 내렸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의 검에.
팔이 잘리고 다리가 잘리고 몸이 사선으로 그어지며 두 동강이 나고, 복부 속의 내장과 창자가 질펀하게 쏟아져 내렸다.
마치 인간의 형상을 잇는 이음새가 끊어지듯, 육체가 산산이 조각나며 퍼즐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부서져 내린 것은 어디까지나 황제의 육체, 막시밀리안 2세의 그릇이다.
거기에 담겨 있던 ‘밤의 아버지’는 결코 부서지지 않았다.
부서진 것은 그저 형상에 불과하고, 그 형상은 부서지고 새롭게 형성되기를 거듭할 테니까.
‘……아직 닿지 않았다.’
그릇을 깨트릴 수는 있어도, 형상을 부술 수는 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이걸로 어렴풋이 깨달을 수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그릇과 형상 속에 숨어, 부서지고 깨지기를 거듭하는 놈의 ‘진짜 실체’를.
끝없이 태어나고 부서지고 형성되는 순환(循環) 그 자체를 멈추기 전까지, 밤의 아버지는 죽지 않는다.
그러나 ‘악인의 자세’가 완성되었을 때,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 검은 확실히 놈에게 닿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 당장, 전투는 끝이 났다.
일대를 휘감고 있던 밤이 걷혔고, 그곳에는 아직도 가족들이 살아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흠, 이것 참.”
산산이 조각나버린 황제의 시체를 보며 체사레가 눈을 끔벅거렸다.
아울러 그와 마주하고 있는 ‘웃는 남자’와 나머지 가족들을 향해 조소했다.
“설마하니 황제 폐하를 살해하다니, 참 대담하기도 하시네요.”
시엔의 손에 들린 칠흑의 칼날…… ‘왕 시해자’에 묻어서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가리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