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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32화 (132/200)

132화. 구역질 나는 악 (3)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가주 라일라는 루나와 함께 적지 않은 부상을 입고 영지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가족들 역시 상황은 비슷했다.

루치아노의 죽음과 함께 내부적으로 ‘벤데타’를 결의했다고 해도, 당장은 제국과의 충돌로 벌어진 사태를 수습하는 것조차 급급하다.

그런 까닭에 부재중인 나이트워커 공작을 대리해 수도에 체류하며 그 여파를 수습하는 시엔에게, 마음 놓고 ‘새로운 깨달음’에 집중할 여유 따위는 사치였다.

그럼에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새벽, 달이 떨어지고 여명을 앞둔 수도 베네토 외곽의 모래사장.

동녘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새벽 어스름을 등진 채, 시엔이 나지막이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악인(惡人)의 자세.

촤악!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시엔의 ‘왕 시해자’가 휘둘러졌고, 바로 직후였다.

하나의 환영(幻影)이 시엔의 눈앞에서 일렁였다.

일찍이 시엔이 맞섰던 밤의 아버지, 그의 형상이 시엔의 검에 갈가리 찢기는 곡두였다.

시엔이 그 무엇보다 바라 마지않는 결말.

순간, 환영이 뒤틀린다.

어느덧 시엔의 검에 찢기고 있어야 할 밤의 아버지가, 깨닫고 보니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되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시엔이 절대로 바라지 않는 결말.

“!”

당혹 속에서 시엔이 황급히 칼을 거둔다. 그러자 취하고 있던 자세가 무너지며, 체내에서 휘몰아치는 후폭풍과 함께 왈칵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비틀거린 끝에 무릎을 꿇고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는다.

‘아직…….’

아직 부족하다. 이 자세는 미완성이다. 그날, 밤의 아버지와의 일전에서 섬광처럼 머리를 스쳐 손에 넣은 이후로 무엇 하나 발전하지 않았다.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다.

자기밖에 모르는 악.

이 자세야말로, 시엔이 일평생에 걸쳐 추구해왔고 쌓아 올린 궤적의 집대성이자 정수임을.

“여기 있었구나.”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린다. 그곳에 있을 리 없는 목소리. 처음에는 환청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

고개를 돌리자, 여느 때처럼 그녀는 그곳에 있었다.

칠흑의 드레스와 함께 결코 기품을 잃지 않는 미소와 우아함을 걸친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그리고 머지않아 시엔이 보고 있는 것이, 환상도 무엇도 아님을 깨닫는다.

“아직 부상도 채 낫지 않으셨는데, 저게 말씀도 없이 수도에─!”

당황해서 시엔이 소리를 높였다. 억지로 무리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훤히 보이는 그녀를 질책하는 목소리로.

“네가 허락해줄 리가 없을 테니까.”

라일라 역시 그런 아들의 걱정을 이해하며 쓴웃음 짓는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끼고 생각하는 어머니와 아들. 거기에 알기 쉬운 악(惡)의 정경은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그들은 서로를 위해 그 어떤 짓이라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는 악이었다.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고, 자신의 일부나 다름없었으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은, 말 그대로 자기밖에 모르는 존재들이었다.

‘그런가.’

그 사실을 되새기며 시엔이 후련하게 웃는다.

이제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부터 ‘암살자들의 어머니’께서 아들의 허락 같은 걸 일일이 신경 쓰고 계셨죠?”

“그래서 이렇게 직접 온 거잖니.”

라일라가 대답했다.

“나에게는 여전히 해야 할 일들이 남아 있고, 그것은 아직 네가 짊어질 것들이 아니란다.”

겉으로 보기에도 쉽게 숨겨지지 않는 상처를 뒤로한 채, 라일라가 말했다.

“영지로 돌아가렴, 시엔.”

“어머니……!”

“이것은 부탁이 아니란다.”

그 어떤 이의를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나이트워커 공작의 목소리로.

“가서 네가 해야 할 일들을 끝마치렴.”

어느덧 동녘 수평선 끝자락에서 태양이 고개를 내밀었다. 깊었던 밤의 어둠이 스러졌다.

* * *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시엔이 나이트워커 공작령으로 돌아왔을 때, 가장 처음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은 그들 가문의 오래된 격언이었다.

시엔 일행이 밤하늘 산맥 너머에서 제국과 맞서는 사이, 수도 베네토에서 루치아노가 잭 더 리퍼의 손에 쓰러지는 사이, 이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규모 자체로 놓고 봤을 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고 커다란 규모의 충돌이었다.

아마 그들 가문의 역사를 통틀어 ‘그들의 대지’에 이토록 많은 수의 적들이 발을 들였던 적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조차 결국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쓰러뜨리지는 못했다. 가장 지혜로운 자, 루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 나이트워커 공작 가문은 몰락하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그들을 위협하는 적을 물리치고, 이곳에 존재하고 있다.

동시에 그들 가문조차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리며 휘청거릴 정도의 치명상이 선연하게 새겨져 있다.

“루나 님.”

“어서 오거라, 시엔.”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지하를 찾은 시엔이, 창백한 미소로 자신을 맞는 루나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날, 지혜의 고리를 이용해 ‘이상적인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실체화했던 루나 나이트워커.

그러나 세상에 대가 없는 힘은 없는 법이다.

그날, 라일라의 분신(分身)을 불러왔던 것과 같은 능력은 두 번 다시 쓸 수 없다.

설령 다음이 있다고 할 경우, 그것은 곧 콘실리에리의 ‘희생’을 의미할 테니까.

그것은 결코 시엔이 바라는 결말이 아니었다.

당장 이 순간조차 루나가 입고 있는 상처는 라일라와 비교를 불허하는 수준이었다. 원래부터 시체처럼 창백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피부색은, 그 이상으로 초췌하게 야위어 가느다란 호흡을 잇는 것이 고작이다.

그들 가문에 새겨진 상처는 적지 않다.

이 상흔(傷痕)은 설령 이 순간의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예전과 같은 완벽한 신뢰와 명성을 되찾은 뒤에도,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아니, 이 시련을 극복할 수 있기는 할까?

갑자기 딛고 있는 발밑이 무너지는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렇기에 시엔은 말없이 루나를 포옹했다. 그리고 라일라 앞에서도 보여주지 않았던 나약함을 드러내며, 처음으로 소리 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째서 우는 것이냐, 시엔.”

다정하게 시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루나가 미소 짓는다.

“두려워서요.”

시엔이 어린아이처럼 흐느끼며 대답했다.

이미 한 번, 사랑하는 전부를 잃어버린 채 시엔 나이트워커는 패배했다. 벽돌처럼 견고했던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잃어버렸다.

그런데 도시의 뒷골목에서 새롭게 눈을 뜨고,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일라가 내밀어준 손길을 잡았을 때, 모든 것들이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이제는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같은 실패를 다시는 거듭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깨닫고 보니, 어느덧 시엔의 가족 루치아노가 쓰러졌다.

라일라와 루나 역시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 속에 내던져졌고, 회복을 기약할 수 없는 커다란 부상 속에서 애써 괜찮은 척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럼 지금까지는 두렵지 않았다는 것이냐.”

루나가 되물었다. 흐느낌 속에서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두렵지 않았다.

모든 것들이 시엔이 알고 있는 미래대로, 계획대로 움직였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이 앞에 더 이상 시엔이 믿고 의지할 미래의 지식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달라졌다고 생각한 것들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거로 돌아온 그날부터, 시엔이 세운 그럴싸한 계획 이제는 그저 ‘누구나 다 세우는 그럴싸한 계획’에 불과할 따름이라고.

시엔의 눈앞에 있는 것은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그 자체였다.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이대로 고꾸라져 밑바닥을 향해 추락할 거란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외줄의 길.

이미 한 번 겪었던 그 지옥 같고 끔찍한 일들이, 또다시 시엔 앞에 펼쳐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몸서리가 쳐졌다.

나아가본 적 없는 불안(不安)으로 가득 찬 세계.

“어른이 되었구나, 시엔.”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나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어른이라니─.”

그 말에 아이처럼 흐느끼고 있던 시엔이, 당황해서 되물었다.

“……저는 이미 어른이에요.”

시엔은 처음부터 어른이었다.

그야말로 어린아이가 할 법한 대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진실이었다.

“흠, 그것참 신기하구나.”

시엔의 말에 루나가 다소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늘 미래에 대한 확신으로 차서, 아무리 넘어져도 개의치 않고 꿋꿋이 나아가는 네 모습이─ 나에게는 세상 무엇보다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보였는데 말이지.”

“…….”

“저택에 온 그날부터, 너는 늘 그런 아이였단다.”

루나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누구보다도 밤의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였지.”

루나가 말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단다.”

어느새 귀와 뺨이 새빨개진 시엔을 향해, 그 누구보다 상냥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나는 태양을 볼 수 없지만, 만약 눈부신 태양이란 게 존재한다면 분명 이런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루나 님…….”

시엔이 부끄러운 듯 말을 흐렸다.

그리고 귀가 빨개지는 부끄러움 속에서 깨달았다.

─이제는 아니란 것을.

더 이상 미래의 지식도 이정표도 없다. 확신도 무엇도 없이, 그저 까마득하게 펼쳐진 어둠 속에서 나아가야 했다.

“미래는 두려운 것이란다.”

루나가 말했다.

“그리고 세상은 결코 우리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법이지.”

가장 지혜로운 자의 이름에 걸맞은 지혜를 속삭이며.

“아무리 바라도 갈망해도 손에 넣지 못하는 것들이 넘쳐나고, 아무리 지키려 발버둥 쳐도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흩어지니까 말이야.”

“…….”

“그 사실을 이해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되는 법이지.”

그 말에 시엔이 말없이 침묵했다.

“그래도 여전히 저는 바라고 있어요.”

침묵 끝에 시엔이 입을 열었다.

“적들에 맞서 사랑하는 가족을 지킬 힘, 빼앗기지 않을 힘을.”

“그래.”

시엔의 어른스러운 결의를 듣고 루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하다는 듯이.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른다. 과거에 겪었던 것과 똑같은, 어쩌면 그 이상의 끔찍한 고통이 시엔과 시엔이 사랑하는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달라질 것은 없었다.

말하고 나서 문득 깨달았다.

─악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기꺼이 타인을 짓밟고 빼앗는다.

과정도 수단도 결과도 목적도, 그 무엇도 정당화하지 않고 합리화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그럴싸한 명분도 대의도 없다.

그저 행하며 행해질 뿐이다.

시엔의 목덜미를 휘감고 있는 루나의 손길은 차가웠다. 그러나 시체처럼 창백한 그녀의 손길에 깃든 온기(溫氣)를 지키기 위해, 시엔은 무엇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악은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까닭에─.

자신의 소중한 것이, 남들의 소중한 것보다 더 소중했던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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