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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33화 (133/200)

133화. 구역질 나는 악 (4)

지켜야 할 것을 위해 강해져야 하는 것은 오로지 시엔 홀로 짊어져야 할 짐이 아니었다.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결코 시엔 혼자가 아니었던 까닭에.

지금 같은 방식으로는 가족을 지킬 수 없다. 그들을 위협하는 새로운 적에 맞서 시엔이 ‘악인의 자세’를 깨우쳤듯,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

빼앗기기 전에 먼저 빼앗을 힘이.

“여기 있었구나, 시엔.”

나이트워커 가문의 하이마스터이자 ‘늙은 암살자’ 루치아노는 죽었다.

“미하일 형님, 이자벨 누님.”

그러나 어느덧 시엔이 새로운 하이마스터가 된 것처럼, 그곳에 있는 《가시 인형》 미하일과 《암혈(Black Blood)》의 새 이명을 손에 넣은 이자벨 남매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늙은 해가 지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것처럼.

오래된 밤이 어둑새벽의 여명 속에 스러지고, 다시금 새로운 밤이 내려앉는 것처럼.

다시 보는 그들 남매의 모습은 얼핏 보기에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입고 있는 정장과 드레스 아래에는, 기꺼이 ‘상처 입는 누군가’가 되기를 각오한 육체가 존재했다.

세례를 마친 가문의 육체, 상식을 뛰어넘는 초재생 능력으로도 완전히 아물지 못하고 끝없는 흉터와 상흔(傷痕)을 남길 수밖에 없는 몸.

동시에 그 상처투성이 육체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입게 될 상처를 대신해서 짊어진 그들의 훈장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래도 2대 1이라니, 조금 무리하는 거 아냐?”

이자벨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고,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충분해요.”

“이야, 아주 그냥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걸.”

시엔의 말에 미하일이 여느 때처럼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도 우리 가문을 짊어질 후계자니까,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지.”

더 이상 미하일은 시엔을 부정하지도 의심하지도 않는다. 진즉에 그랬다.

“그 배짱에 걸맞은 수준의 실력이 있는지는, 이제부터 알게 될 테니까.”

이것은 결코 믿지 못하는 의심에서 비롯된 ‘시험’이 아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 시엔을 신뢰하고 있기에 치러지는 싸움이었다.

타앗!

미하일이 땅을 박찬다.

촤아악!

박차고 쇄도하는 직후, 전신의 육체를 찢고 마치 고슴도치처럼 칼날의 뼈가 솟아났다.

누군가를 상처 입힐 때마다 자신도 함께 상처 입는 양날의 검식.

“!”

어느새 미하일의 육체를 찢고 사출된 골검(骨劍) 위에, 미세하게 휘감겨 있는 ‘죽음의 거미줄’이 창백한 서슬을 흩뿌렸다.

이윽고 시엔이 휘몰아치는 죽음의 거미줄을 피해 땅을 박찬 순간, 또 하나의 실루엣이 시엔을 향해 쇄도했다.

미하일과 같은 앨리스의 ‘아들딸’로서 기꺼이 가시나무가 되기를 자처한 이자벨.

가시나무의 자세와 함께 가문의 4식, 갈까마귀의 자세에 통달해 있는 하이마스터.

그녀의 새로운 이명 ‘암혈’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미하일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육체를 갈가리 찢고 사출된 칼날의 뼈.

그와 함께 흩뿌려지는 그녀의 피가, 무척이나 검고 어두웠다.

검은 피.

암혈(Black Blood)이란 그녀의 이명은 그저 비유 같은 게 아니었다.

흩뿌려진 그녀의 검은 피에는,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고 농도 짙은 저주의 힘이 깃들어 있었다.

갈까마귀의 자세.

가문의 4식은 기본적으로 남에게 고통을 주는 ‘저주’를 다루는 검식이다.

자신이 가진 증오와 고통 등의 원념(怨念)을 동력 삼아 펼치는 금기의 마법.

가시나무의 자세는, 그 어떤 검식보다도 자기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상처 입히는 자세였다.

그녀가 5식을 펼치며 상처 입을 때마다, 그 고통과 아픔은 증오이자 저주의 동력이 되어 그녀의 주력(呪力)을 증폭해준다.

검게 물들어 있는 그녀의 피는, 바로 그 육체에 깃든 터무니없는 저주의 동력 그 자체였다.

어느덧 칼날의 사출과 함께 흩뿌려진 암혈이, 1위계 혈마법 ‘블러드 볼트’처럼 허공에서 시엔을 노리는 탄환이 되어 내리꽂혔다.

물론 저것은 블러드 볼트 따위가 아니다.

혈액 하나하나에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고순도의 원념이 깃든 ‘증오의 탄환’이다.

남을 저주할 때는 무덤을 두 개 파두란 말이 있는 것처럼, 이자벨 역시 모를 리가 없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자신의 전신을 칼날의 뼈로 교체하고 골격부터 새로 갈아 끼우는 것도 모자라, 그 칼날이 주는 고통을 ‘저주의 동력’으로 삼다니.

매일 밤, 잠들 때마다 그녀는 얼마나 끔찍한 고통에 시달릴까.

그럼에도 기꺼이 그렇게 했다. 그녀의 의지로 자신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그것은 미하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이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이 가진 각오였다.

그렇기에 시엔 역시 각오를 다졌다.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암혈의 탄환과 죽음의 거미줄, 칼날의 뼈에 맞서 ‘왕 시해자’를 고쳐 잡고 나직이 일검을 휘둘렀다.

악인의 자세, 제1의 초식 《악행(惡行)》.

어떤 대의도 정당화도 변명조차 없이, 그저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휘둘러지는 이기적인 자의 검.

그 검이,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검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고 싶은 결과’를 넣는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저 행해질 따름이다.

일전에 루나와의 대화가 시엔에게 준 새로운 깨달음.

그 남자에게 닿기 위한, 밤의 아버지를 쓰러뜨릴 수 있는 시엔 나이트워커의 방식.

“대체 무슨 기술을…….”

“바라는 것을 손에 넣었을 뿐이에요.”

경악하는 미하일을 뒤로하고 시엔이 담담히 대답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고 승리하기를 바랐으니까요.”

시엔이 말했다.

그곳에 있는 두 남매조차 깨달을 수 없는 불가해(不可解)의 검.

“역시 우리 시엔이야.”

그럼에도 이자벨이 활짝 미소 지으며 웃었다.

여느 때처럼 다정하고 상냥한 누님의 미소였다.

* * *

검도 마법도, 학문도 다르지 않다.

뇌리를 머리를 스치는 깨달음은 결국 섬광에 불과하다.

그것을 찰나의 섬광에서 그치게 하지 않고, 완벽히 붙잡아 자신의 것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은 별개의 이야기다.

라일라는 그런 시엔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치고 상처 입은 몸을 끌고 기꺼이 수도에 체류하며 나이트워커 공작의 업무를 수행했고, 영지로 돌아온 시엔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다.

수행이라고 해도 검을 움직이는 동작이나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같이 탐구하고, 사색하고, 이 순간 섬광처럼 뇌리를 스친 깨달음의 정체를 골몰하는 나날이었다.

이것을 확실하게 자신의 것으로 바꾸지 않는 이상, 이 깨달음은 찰나의 섬광처럼 다시 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그 전에 완전히 이해해야 했다.

가장 완벽한 악(惡).

자기밖에 모르고, 자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타인을 짓밟고 빼앗는 방식.

생각하고 나서, 또 하나의 섬광이 시엔의 뇌리를 스쳤다.

일찍이 ‘모든 도시의 여왕’이자 대륙 제일의 부를 자랑하는 물의 도시 상공에, 느닷없이 내려앉은 검고 어두운 칠흑의 구체.

「초위계 광역섬멸형 흑마법 · 아바돈(阿鼻沌)」.

암흑물질을 응축해 생성된 검은 별.

별의 시체이자, 죽은 뒤에도 같은 별을 포식하고 흡수하는 죽음과 탐식의 별.

그것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전부를 빼앗고 집어삼키고 무(無)로 되돌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저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일찍이 시엔이 기억하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형태의 절대악이었다.

* * *

“오랜만이로군.”

남자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발밑까지 흘러내린 칠흑의 장발에 단안경을 쓰고, 테이블 위에 앉아 산더미처럼 놓여 있는 서류 더미에 새로운 수식(數式)을 기록하거나 지우고 덧씌우며.

그리고 테이블 옆에 놓여 있는 작은 실험용 유리병, 플라스크 속에 담겨 휘몰아치는 마력이 비로소 남자가 ‘마법사’란 사실을 알게 해주었다.

암흑물질 조작 학파의 창시자,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

“마법의 진척은 좀 있으십니까?”

“……부족하지는 않을 정도라네.”

베르나르트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부족하지 않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일찍이 물의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렸던 그 마법을 어느 때라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물론 그런 터무니없는 마법을 함부로 쓸 수는 없다. 당장 제국 수도에서 그 정도의 대규모 마법을 영창하다가는, 아마 마법이 준비되기 전에 놈들의 손에 걸려 몰살당할 테니까.

설령 쓸 수 있다고 쳐도 이 마법은 어지간한 명분 없이 온 세계를 적으로 돌릴 위력의 마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 수 있었다.

그것으로 지금의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에게는 이미 지나칠 정도로 족한 이야기였다.

“그래서, 달리 나를 찾은 용무가 있나?”

남자가 물었다. 시엔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마법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어느 때라도 어려운 부탁은 아니지.”

시엔의 말에 베르나르트가 대수로울 것 없다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무슨 마법을 배우려고 왔나?”

“암흑물질 조작 학파.”

시엔이 대답했다. 그 말에 베르나르트의 눈동자가 흥미로운 듯한 이채를 머금었다.

“호오, 끝내 실전성을 찾지 못하고 배우기를 포기했던 마법이 아니었나.”

“전에는 그랬었죠.”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제는 아닙니다.”

시엔이 플라스크 속에서 휘몰아치는 칠흑의 구체를 보며, 일찍이 베르나르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생각했고, 내가 개발했으며, 내 손끝에서 창조되고 완성될 마법이지. 이 진실의 어느 부분이 내가 책임을 회피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이 마법을 통해 집어삼켜질 도시와 성, 무고하게 희생될 생명, 부서지게 될 세계, 모두 내 책임이라네.’

베르나르트는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런 남자에게 그걸 알고도 이 마법을 개발하는 이유를 물었을 때, 베르나르트는 이렇게 대답했다.

‘자네는 예술가가 작품을 창작하는 이유를 아나?’

‘글쎄요, 예술가가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당시의 시엔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은 달의 베르나르트는 단지 행할 뿐이다.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

시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1위계부터 지금 후작 각하께서 개발하는 초위계에 이르기까지, 저에게 암흑물질 학파의 전부를 전수해 주십시오.”

“─.”

이어지는 시엔의 말에 베르나르트가 다소 놀란 듯이 눈동자를 끔벅거린다.

“초위계라니, 설마…….”

시엔의 칼끝을 통해 ‘그것’이 펼쳐질 때의 미래를 머릿속에 그린다.

대도시 하나를 집어삼킬 정도의 터무니없는 규모일 필요는 없다. 지금처럼, 저 플라스크 속의 세계 하나를 집어삼키는 정도의 규모로도 충분하다.

베르나르트가 ‘아바돈’을 통해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로 거듭나듯, 이제는 악인(惡人)의 검으로 죽음이자 세상의 파괴자로 거듭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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