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36화 (136/200)

136화. 규칙의 종족 (1)

“모습을 드러내라.”

시엔의 말과 함께, 밤바람과 적막이 내려앉은 수풀 속에서 실루엣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 오해하지 마시길.”

얼핏 젊고 기품 있어 보이는 남성의 목소리. 그러나 진홍색의 정장 차림을 갖춘 그 남자는 ‘겉보기’로 나이를 헤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렇게 뵈어서 영광입니다, 돈 시엔. 그리고 돈나 티아.”

담담히 미소 짓는 입술 밑으로, 슬쩍 달빛에 비쳐 서슬을 흩뿌리는 송곳니가 그 증거였다.

“설마 혈족의 장로가 직접 마중 나올 줄이야.”

남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엔과 티아가 벤데타(피의 복수)를 이행하기 위해 죽여야 하는 암살 대상, 체사레와 같은 동족인 뱀파이어였다.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맺어진 신뢰는 절대적이니 말이지요.”

아울러 인간들의 세상이 그렇듯, 뱀파이어의 세계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로드 스칼렛께서 두 분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

이어지는 이름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설마하니 이곳 신성 제국의 영토이자 체사레 보르자의 영지에, 그녀가 직접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니까.

미망공(未亡公) 스칼렛.

그들 뱀파이어의 세계에서 감히 ‘공(公, Lord)’의 작위를 자처할 수 있는 이들의 숫자는 많지 않다.

일찍이 ‘천년공’이라 불린 체사레가 바로 그중 하나였고, 눈앞의 뱀파이어 장로가 지칭하는 ‘미망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따라오시지요.”

앞서 장로라 불린 남자가 정중하게 예를 표하며 등을 돌렸다. 이윽고 밤의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그의 등을 보며, 시엔과 티아 역시 각오를 굳히고 뒤를 따랐다.

* * *

그 시각, 보르자 공작성.

신의 아들이 죽기 전부터 살아온 최고위 뱀파이어 중 하나이자, 천년공의 이명을 가진 역사의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유리창 뒤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등진 채, 체사레가 조용히 무릎을 꿇는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

그리고 남자를 향해 황금의 잔을 내미는 실루엣이 있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을 이끄는 장녀이자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이것은 내 피로 맺는 새로운 계약의 잔이다.”

잔을 따라 핏빛의 액체가 넘실거린다. 물론 피가 아니다. 그렇다고 포도주도 아니었다.

성체와 성혈.

“─이것은 나의 피다. 나는 너희들을 위해 이 피를 흘리는 것이다.”

마셔라. 먹어라. 나의 살과 피를.

엄숙한 정적 속에서 의례적인 절차가 끝을 맺는다.

절차 끝에, 얼어붙을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빌헬미나가 넘겨준 금빛의 잔에 담겨 있는 정체를 모를 체사레가 아니었던 까닭에.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들이 그러하듯, 그들 쌍두까마귀의 가족을 ‘가족’으로 성립하게 해주는 유일의 고리.

일찍이 밤의 아버지가 동방 대륙에서 이끌던 암살자 교단의 원류는 그것을 일컬어 외단(外丹)이라 불렀다.

복용하는 것만으로 인간을 아득히 초월하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전해지는 금단의 선약.

천년 전에 인간의 굴레를 벗어버린 괴물이, 각오 끝에 황금의 잔을 들이켰다.

* * *

“아주 오래전, 신의 도시(City of God)에서 규칙이 하나 세워졌다네.”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에는 모두가 그 규칙을 잘 준수했지. 다행히 규칙은 아주 오랫동안 무탈하게 이행되었다네.”

숲의 어둠 속, 흙 위로 드러난 고목의 뿌리에 걸터앉은 애티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누군가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지.”

흑색의 드레스 사이로,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꼬아놓은 금색의 양갈래 머리카락을 발밑까지 늘어뜨린.

“그럼 그 규칙은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하나?”

“─예외가 새로운 규칙이 되겠죠.”

“바로 그거라네.”

시엔 나이트워커의 말에 금발의 양갈래 소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애티 어린 소공녀의 모습에 걸맞지 않은, 마치 루나 나이트워커를 보는 것처럼 세월의 층첩과 지혜가 깃든 미소를 지으며.

“그렇기에 ‘우리’는 절대로 예외를 인정하지 않지.”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외를 인정하는 순간, 예외는 곧 새로운 규칙이 된다.

“태양을 보지 않는다. 십자가를 두려워한다. 강을 건너지 않는다. 치사량에 이를 정도의 흡혈을 하지 않는다. 새로운 ‘동족’을 태어나게 하지 않는다. 세속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권세를 얻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의 규칙이었다. 절대로 예외를 인정할 수 없는.

“로드 체사레는 모든 예외를 깨트렸지.”

미망공의 이명을 갖고, 체사레와 더불어 ‘최초의 규칙’을 세운 고대의 뱀파이어…… 로드 스칼렛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 나이트워커 가문의 손을 빌려, 그를 처단하길 바라는 겁니까?”

“그렇다네.”

규칙이란 영생의 삶을 사는 뱀파이어란 종족의 본질이자 모든 것이다.

“놈이 규칙을 깨트렸단 이유로 이 몸이 직접 움직이는 것은, 그 또한 규칙에 새로운 예외를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을 테니.”

규칙을 지키는 것은 그녀 자신조차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에 직접 나서지 않는다.

그들 뱀파이어는 세간의 이야기처럼 딱히 태양을 본다고 해서 죽지도 않고, 십자가를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강을 건너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절대로 그 규칙을 깨트리지 않는다.

규칙의 종족.

천년의 역사에 걸쳐 평온한 불사를 추구하며 살아온 뱀파이어들의 정체성.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종족에게서 정체성을 거스르는 존재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 뱀파이어 클랜이 취해온 전통과 방식은 오직 하나였다.

“묻겠노라, 밤을 걷는 자여.”

미망공 스칼렛이 말했다.

“그대는 우리 혈족의 오랜 전통과 질서를 존중하고 수호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되어 있습니다.”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되어 있어요.”

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울러 그들, 시엔과 티아의 동의는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무게를 갖고 있었다.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맹세하죠.”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맺어진 약속과 신뢰는 절대적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규칙’.

“흠, 좋다네.”

두 사람의 대답을 듣고 고목의 뿌리 위에 걸터앉은 뱀파이어가 미소 짓는다.

미소 짓고 나서는, 나직이 몸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그대들이 정녕 「규칙의 대행자」가 되기에 걸맞은지, 이 몸이 시험하도록 하지.”

그들은 결코 직접 움직이지 않는다. 그 대신, 자신들을 대신해 규칙을 지켜줄 누군가를 찾는다.

그리하여 자신들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나이트워커 가문과 ‘뱀파이어 클랜’은 어떤 계약을 맺었다.

바로 그게 그들 사이의 거래였다.

차도살귀((借刀殺鬼).

그리고 ‘거래’라는 의미 그대로, 이것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감수하거나 이득을 보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랜필드, 주위에 소란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게나.”

그렇게 말하며 ‘미망공’의 이명을 가진 최고위 뱀파이어, 로드 스칼렛이 미소 짓는다.

“알겠습니다, 저의 주인이시여.”

‘랜필드’라 불린 장로급 뱀파이어가 시엔 일행에게 보여준 것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히 예를 표하며, 나직이 손가락을 튕겼다.

─세상에서 소리가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적막과 정적이 내려앉은 오밤중의 숲에서, 지저귀는 벌레 소리는 물론 미풍(微風)으로 부는 밤바람과 풀잎이 스치는 소리조차 스러진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 속에서 그녀가 조용히 웃었다.

조용히, 너무나도 차분하게 짓는 미소.

바로 그때였다.

촤아악!

깨닫고 보니 일대의 풍경이 뒤틀린다. 아니, 그저 뒤틀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

어느덧 시엔과 티아가, 혈해(血海) 속에 잠겨 있었다.

마치 서펀트 가문의 일원들이 술수를 부려 찰나에 대상을 물속에 가둬 익사시키듯, 피바다에 가두어 익사시키려는 흡혈귀의 악의에 휩싸인 채로.

그렇기에 자신들을 집어삼키는 혈류 속에서 시엔이 신기 ‘묠니르’를 통해 뇌전(雷電)의 힘을 이끌어내 역습을 가하려는 찰나.

깨달았다.

이 액체 속아 잠겨 있는 것은 시엔 혼자가 아니란 사실을.

‘저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에요, 대부님.’

그 순간, 직전에 티아와 나누었던 대화가 시엔의 뇌리를 스쳤다.

‘당신의 상처를 제게 나누어 주세요.’

그녀의 말을 되새기는 동시에, 뇌신의 정수가 깃든 신기 ‘묠니르’의 힘이 일대의 혈해를 집어삼켰다.

신성 로마누스 제국은 그 이름처럼 믿음과 신앙을 통해 쌓아 올린 제국이다.

베네토 공화국은 황금으로 쌓아 올린 제국이다.

그리고 ‘뱀파이어의 제국’은, 바로 피를 통해 쌓아 올린 제국이었다.

이 일대에 흩뿌려진 혈해는 공짜가 아니다.

공화국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이루는 ‘황금’을 소비하고, 신성 로마누스 제국이 ‘신앙’에 호소하듯, 그들 역시 자신들이 쌓아 올린 피를 통해 원하는 바를 이루고 힘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시엔이 노리는 것은 로드 스칼렛의 본체가 아니었다.

시엔과 티아, 두 사람을 집어삼키고 있는 피바다 그 자체였다.

두 사람을 집어삼켜 익사시킬 정도의 터무니없는 혈액량을, 자신의 힘을 통해 무(無)로 되돌리기 위해서.

액체를 따라 전도되는 벼락은 그저 ‘영역을 파악’하기 위한 정찰대에 불과했다.

그 규모를 파악하고 나서, 시엔의 손끝에서 펼쳐진 비기는 달리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다. 딱히 칼끝에서 펼쳐지는 무엇이 아니다.

그 대신, 뇌전의 장갑과 묠니르의 힘을 통해 흩뿌려진 뇌전을 하나의 신경 단말로 삼아 새로운 마력을 흩뿌렸다.

단말(端末)이란 말처럼, 흩뿌려진 묠니르의 뇌전은 그저 ‘뿌리내린 회로’에 불과했다.

시엔이 그 회로를 따라 이 피바다에 진정으로 흩뿌리려 하는 것은 달리 있었다.

암월의 베르나르트에게 배운 최고위의 마법, 초위계 흑마법 아바돈.

끝없는 굶주림과 탐식에 삼켜진 죽음의 별.

그 별이 집어삼키는 것은 인간의 피조차 예외가 아니었다.

시엔이 이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그가 마법의 천재라거나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을 가진 까닭이 아니다.

선구자가 남겨둔 발자취를 더듬으며, 현재의 수준에서도 어렵지 않게 활용할 수 있도록 경량화(輕量化)를 통해 다듬고 다듬은 결과물.

그리고 그 결과물이 그곳에 있는 전부를 ‘없는 것’으로 되돌리고 있었다.

흡혈(吸血)은 순환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피를 다른 누군가가 집어삼켜 빼앗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음의 별은, 빼앗는 게 아니다.

없애는 것이다.

이 일대를 집어삼키고 있는 피바다, 다시 말해 공화국의 황금이자 제국의 신앙과 다름없는 그들 뱀파이어의 ‘화폐’를 무(無)로 되돌리기 위해서.

“네놈…….”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을 익사시킬 듯 집어삼켜야 할 혈해, 피바다가 사라지고 ‘뭍’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더 이상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험하려는 존재의 표정이 아니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것이냐.”

최초의 규칙을 세운 뱀파이어 중 하나이며, 체사레조차 ‘어린아이’로 내려다볼 수 있는 영생의 삶을 살아온 최고위 뱀파이어.

그 누구보다 규칙에 속박되어 종속하는 존재.

규칙 외에는 그 무엇도 개의치 않는 그녀가, 소름 끼치는 표정으로 시엔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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