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규칙의 종족 (2)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는 것이냐.”
생물에게 있어 피는 생명의 원천 그 자체다. 하물며 뱀파이어에게 있어 ‘피’가 갖는 의미는 인간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피가 전부였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피를 없애거나 더럽히고 모욕하는 행위를 용납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양갈래 금발의 애티 어린 소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망공 스칼렛.
그녀를 지칭하는 또 하나의 이름이자, 진명에 버금갈 정도로 소수의 존재밖에 알지 못하는 숨겨진 이명─.
「피의 어머니(Mother of Blood)」.
인간이었을 적에는 일찍이 신화시대의 대제국이라 불린 에굽 제국의 파라오였으며, 이 대륙의 그 누구도 진짜 이름을 알지 못하는 세상의 가장 오래된 존재.
신의 아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살아온 고대 제국의 황제, 천년공 체사레보다 훨씬 더 까마득한 삶을 살아온 진조(眞祖)이자 최초의 뱀파이어─.
“저는 뱀파이어 클랜과 우리 가문이 맺은 약속을 이행하고 증명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런 그녀 앞에서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경애하는 ‘피의 어머니’께서는, 설마 이깟 피바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익사할 자를 규칙의 대행자로 택하실 생각이었던 겁니까?”
체사레 보르자는 강하다. 천년공이란 이명을 가진 엘더 원, 그리고 이제는 피의 추기경으로 불리는 그 남자는 지금의 시엔이 자신의 전부를 걸어도 승산을 장담키 어려우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뱀파이어의 피를 무(無)로 되돌렸다는 것은, 그들 종족에게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무례이자 ‘금기의 규칙’이기도 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는다.
침묵 끝에 쿡쿡, 애써 참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아이 역시 그랬지.”
로드 스칼렛이 말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
뱀파이어 중에서 체사레 같은 이레귤러가 나타나 그들 종족의 규칙을 깨트리고, 그 규칙을 이행하기 위해 ‘규칙의 대행자’가 움직였던 것은 시엔이 처음이 아니다. 물론 처음이 아니었던 것은 라일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너희는 참으로 변하지 않는구나.”
그들 뱀파이어 클랜과 나이트워커 가문 사이의 거래는 결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확실히, 이 자리에서 네가 없애버린 피는 이 몸에게 있어 몇 방울에 불과하다.”
피의 어머니에게 있어 그녀가 흩뿌린 혈해, 시엔이 ‘탐식의 별’을 통해 집어삼키고 없애버린 피바다는 실제로 고작 몇 방울에 불과하다.
동시에 그들의 존재는, 바로 그 몇 방울의 피가 모여 이루어진 강과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와 계약을 맺은 이상, 너희 역시 마땅히 우리 혈족의 규칙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로드 스칼렛.”
그렇기에 시엔 역시 무릎을 꿇는다. 티아와 함께. 꿇고 나서는, 일찍이 공화국의 예법에 따라 로드 스칼렛의 손등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관대하게 용서하마, 어린 밤을 걷는 자여.”
그 끝에 로드 스칼렛이 말을 잇는다.
“그리고 우리의 규칙을 대행하기 위해, 마땅히 필요로 하는 것을 빌려주지.”
규칙을 깨트리는 동족이 나타날 때마다, 이레귤러를 배제하기 위해 규칙의 대행자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신기.
《겁혈검(劫血劍) · 헬싱》.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검붉은 빛을 머금고 있는, 실전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형태의 예장용 단검이었다.
그럼에도 뱀파이어가 가장 두려워하는 신기이자, 정작 아이러니하게도 뱀파이어의 수중에 놓여 있는 신기.
“천년공 체사레를 쓰러뜨고 우리의 규칙을 대행할 때까지, 이 무기는 너의 것이다.”
아울러 신기의 주인이, 주인으로서 마땅히 그 무기를 임시로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해준다.
일찍이 밤의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주인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데, 주인의 검으로 주인을 찌를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다. 그러나 주인이 사용을 허락한 상대는 이야기가 다르다.
시엔이 조심스럽게 단검을 받아들였다.
“또한 계약에 따라 그대가 천년공을 쓰러뜨리고 우리의 규칙을 지켜준 이상, 우리는 마땅히 그에 걸맞은 ‘대가’를 지불할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그들 사이에 맺어진 거래는 어느 하나의 일방적 이득으로 귀결되는 내용이 아니다.
아울러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이 바라는 대가는 오직 하나였다.
“밤의 아버지, 카산 나이트워커에 대한 오래된 옛이야기를.”
* * *
운명은 거스를 수 없기에 운명이다.
가령 천년을 살아온 최고위 뱀파이어 체사레가, 이제 와서 밤을 걷는 자들의 방식과 같은 ‘세례성사’를 치르고 그들 쌍두까마귀의 새 가족으로 거듭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것은 영생을 살아가는 존재가 불사의 역설에 가로막혀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진 운명이자 섭리(攝理)니까.
“이걸로 당신은 어엿한 우리 가족의 일원이랍니다.”
이제는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십, 수백 조각으로 갈라져 간신히 붙어 있던 ‘운명의 창’에 다시금 거북이 등딱지처럼 새로운 금이 가고─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비명을 내지르는 와중에도, 그것은 어떻게든 형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곳에 있는 불멸의 존재, 체사레의 운명을 뒤틀어주었다.
일류 암살자의 표적이 되어서 꼼짝없이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할 운명, 불사의 존재는 인간처럼 성장할 수 없다는 저주 같은 운명, 그리고─.
“아, 이것이 밤을 걷는 ‘인간의 육체’로군요.”
늙어가는 존재는 손에 넣을 수 없는 젊음의 재생(再生)까지.
“인간으로 돌아온 기분이 어떠신가요?”
빌헬미나의 말에 남자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어째서 그토록 필멸(必滅)을 겁내왔는지, 이제는 이해조차 되지 않는군요.”
남자는 더 이상 불사의 괴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인간조차 아니었다.
뱀이 허물을 벗으며 탈피하듯, 그토록 갈구해 마지않은 새로운 육체를 손에 넣은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이 밤을 걷는 자의 육신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발버둥을 쳐왔는지.”
“밤을 걷는 자들의 육체가 아니랍니다.”
희열에 몸을 떨고 있는 체사레를 향해 빌헬미나가 말했다.
“우리 가족의 혈육이지요, 체사레 오라버니.”
쌍두까마귀의 가족을 이끄는 장녀이자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 아퀴나스.
“이런, 실례했습니다.”
쌍두까마귀의 가족이 된 남자, 체사레가 금잔 속에 담겨 있는 핏빛의 액체를 홀짝이며 미소 짓는다.
“친애하는 나의 여동생, 빌헬미나.”
핏빛을 머금고 있는 액체는, 물론 진짜 피가 아니었다. 그저 흔히 있는 적포도주일 따름이다.
남자를 마주하고 있는 그녀가 홀짝이는 금잔 속의 액체가 그렇듯이.
* * *
“……무례한 자들이에요.”
뱀파이어 클랜과의 용무를 마친 뒤, 로브로 정체를 감춘 두 사람이 보르자 공작령을 향하고 있던 와중.
“게다가 이해할 수도 없어요.”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티아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뭘?”
“자기들의 일원이 규칙을 깨트렸는데, 정작 규칙에 묶여서 자기들은 손을 쓰지 않는다니.”
“우리의 기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지.”
시엔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들은 규칙의 망령이야.”
뱀파이어는 엄밀히 말해서 ‘종족’이란 말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생명이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개념을 망각하고, 그저 하나의 현상 그 자체가 되어버린 거지.”
뱀파이어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당장 숲에서 그들을 마주했던 것처럼, 그들은 거창한 저택에서 살지도 않고 부귀영화를 누리지도 않고, 그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
오직 ‘오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오래 살기 위해, 그들은 절대 세상의 위협이 되려 하지 않는다. 뱀파이어를 속박하는 온갖 규칙을 빚어내고 지키며 세상에 간섭하지 않고, 위협도 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숨을 죽인 채 평화가 지속되길 바란다.
그렇기에 어느 의미에서 뱀파이어는 의외로 무해하다. 인간들의 국가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체사레 같은 이레귤러를 제외하고서는.
그는 더없이 인간적이고 인간다운 존재였다.
천년의 삶을 살아가는 와중에도 불굴의 의지와 집착을 갖고, 운명에 저항하며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치는 존재.
그것은 그야말로 인간찬가의 의지이자 인간의 표상(表象) 그 자체였다.
그리고 오늘 밤, 체사레 보르자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손에 죽는다.
어떤 인간도 피해 갈 수 없는, 밤을 걷는 암살자들의 손으로.
* * *
그로부터 얼마 후.
“아, 이것 참.”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곳에 있는 남자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올 것을 처음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시엔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남자가 기꺼이 홀로 자신들을 기다릴 것임을.
누구나 다 그럴싸한 계획을 세운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의 계획이 옳은 쪽이 될지는, 이제부터 그들의 손을 통해 정해질 것이다.
“설마 천하의 ‘밤을 걷는 분’들이, 이런 시간에 이렇게나 당당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그저 담담하게 손에 들린 포도주를 홀짝이며, 등 뒤에서 쏟아지는 정오의 태양을 등진 채 미소 지을 따름이다.
평소 그가 입고 다니는 모피 코트 차림이 아니다.
순백의 가죽 코트였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칠흑의 큰까마귀 위에, 태양을 상징하는 금빛의 가시 바퀴가 황금 바탕으로 문장(紋章)이 새겨진─.
태양과 쌍두까마귀.
“흠, 못 보던 얼굴이 있네요.”
새로운 쌍두까마귀의 가족이자 장남, 체사레 보르자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새로운 가족인가요?”
그곳에 있는 시엔의 동생이자 대녀, 티아 나이트워커를 보며.
“……짧지 않은 삶 속에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워왔지요.”
경계하는 티아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체사레가 말했다.
“그나저나 불사의 삶 속에서 이해하지 못했던 하나를, 얼마 전에 새로 깨달았답니다.”
“들어보고 싶네.”
느긋하게 죽여야 할 대상과 대화를 나눌 이유 따위는 없었다.
알고 있음에도 시엔이 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운 경계 태세를 갖춘 채, 놈의 육체에서 느껴지는 ‘이형의 동질감’을 깨닫고.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고통.”
체사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홀로 영겁의 삶을 살아오던 그 시절에는, 죽음보다 더 무섭고 끔찍하며 커다란 고통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
“그런데 이제는 아니죠.”
“그럼 뭐지?”
정확히 중천에 떠올라 있는 정오의 태양, 그 태양을 등진 채 체사레가 대답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고통.”
불사의 괴물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이제는 아니었다.
‘무언가가 달라졌다.’
지금 시엔의 눈앞에 있는 저 괴물은, 일찍이 시엔이 기억하는 알기 쉬운 괴물이 아니었다.
촤악!
어느덧 핏빛의 검을 손에 쥐고 있는 체사레가 차갑게 미소 지었다.
그곳에 있는 두 명의 부녀, 시엔과 티아에게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