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규칙의 종족 (3)
“조심해, 티아.”
시엔이 말했다.
“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네 목숨을 소중히 여기렴.”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티아 역시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 대답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대부님 역시 저를 아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가족을 잃는 고통.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를 위해서.”
누군가를 위한 희생, 상대를 생각하지 않는 일방적 상냥함은 때때로 어떤 악의보다 심장을 에는 잔혹함이 된다. 그들 가족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 *
중천에서 쏟아지는 정오의 태양을 등진 채, 천년을 살아온 존재가 그곳에 있었다.
별과 단검, 나이트워커 가문의 대척점에 있는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을 새겨넣은 하얀 코트 차림으로.
남자의 눈동자에, 불사의 삶을 살아오며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게 된 괴물의 눈빛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이 순간, 체사레는 그 누구보다 깊이 인간과 가족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모습을 보며 시엔이 경계의 태세를 갖춘다.
‘놈의 육체…….’
무언가가 달라졌다. 저것은 결코 시엔이 아는 불사자의 그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형의 동질감마저 느껴지는 동류(同類)의 그것이다.
촤아악!
그럼에도 여전히, 체사레는 결코 보통의 인간이 아니었다.
어느덧 그의 어깨뼈를 찢고 튀어나온 칠흑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다.
도무지 교회의 추기경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검고 어두운 악마의 날개.
아울러 체사레의 손끝에서 일렁이는 핏빛의 기류가, 어느덧 핏빛의 검으로 거듭나며 손에 들린다.
두 장의 흑익과 핏빛 서슬을 흩뿌리는 혈검.
“너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을 거란다.”
타앗!
땅을 박찬 체사레의 혈검이 휘둘러졌다. 바로 앞에서 휘둘러지는 일검 하나하나에,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채.
마치 이 세상이 시엔의 죽음을 바라는 것 같은 감각.
이게 바로 ‘운명의 창’이 가진 힘이다.
온 세상이 그들의 죽음을 바라고, 이 세계가 시엔과 티아의 죽음을 기도하는 것 같은 위화감. 그저 재수가 없고 불길하고 운이 나빠서 그런 게 아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기에 운명이다.
심지어 이미 그날, 스카디 제도에서 시엔 나이트워커는 체사레 보르자를 상대로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아무래도 뭘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럼에도 시엔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너를 죽이러 이 자리에 왔다, 천년공 체사레.”
각오를 다진 시엔이 일검을 휘둘렀다.
“내 운명은 네놈이나 신기 따위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체사레.”
카앙!
시엔을 향해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체사레의 혈검이 그대로 튕겨 나갔다. 거리가 벌려졌다.
“아, 저 역시 진실로 그 말을 이해합니다.”
체사레 역시 즐거운 듯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의 운명을 결정 짓는 게, 네놈이나 이 세계 따위가 아니듯이 말이지.”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렇기에 피의 검을 고쳐 잡은 체사레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초인의 자세(Übermensch Stance)》.”
자신의 의지로 삶을 결정하고,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운명의 물살을 거슬러 나아갈 수 있는 존재.
세계극복자.
그날, 스카디 제도에서 보여준 불멸자의 자세가 아니다.
일찍이 시엔이 밤의 아버지 앞에서 섬광처럼 깨달음을 얻고 새로운 자세로 승화시켰듯, 그것은 체사레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등 뒤의 흑익(黑翼)이 활짝 펼쳐지고, 날개를 이루는 칠흑의 깃털이 흑색 산탄이 되어 일대에 흩뿌려졌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두 암살자가 각자의 자세를 취했다.
티아가 ‘대부의 자세’를 펼친다. 어린 딸이 동경하는 아버지를 흉내 내듯이.
그리고 티아의 대부 시엔 역시, ‘악인의 자세’를 펼쳤다.
너무나도 닮아 있는 부녀이자 남매의 새로운 검식.
후우웅!
질식할 것처럼 뒤틀린 공기 속에서 ‘서로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드리워진다.
칠흑의 날개에서 흩뿌려지는 검은 산탄을 튕겨내며, 양쪽으로 흩어진 시엔과 티아가 검을 고쳐 잡는다.
시엔의 손에 들린 것은 블랙 미스릴 소재의 단검, 왕 시해자.
그리고 티아의 손에 들린 것은, 앞서 뱀파이어 클랜이 규칙의 대행자에게 임시로 넘겨준 겁혈검 ‘헬싱’이다.
뱀파이어의 천적이라 불리는 최악의 신기.
그러나 그들이 가져온 비장의 수 앞에서 체사레는 결코 겁에 질리지 않는다.
“아, 헬싱이라.”
오히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잇는다.
“역시 ‘그녀’가 손을 썼군요.”
카앙!
티아와 칼을 맞부딪치자마자, 헬싱에 깃든 검붉은 빛깔이 불길하게 공명을 일으키며 파문을 그린다.
《겁혈(Bloodblight)》.
상대의 ‘피’에 깃든 힘을 빼앗고 흡수하는 신기.
상처를 줄 필요도 없다. 그저 이 힘을 발동시키며 상대의 힘을 빼앗는 것으로 족하다.
─흡혈귀를 흡혈하는 검이자, 흡혈귀의 피를 탐하는 탐식의 검(劍).
“!”
흩뿌려진 겁혈의 파문 속에서 체사레가 나지막이 얼굴을 찌푸린다.
지금의 그가 완전한 뱀파이어가 아니라 해도, 종족의 정체성을 완전히 버린 게 아니다.
아니, 설령 완전한 인간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애초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도 ‘피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으니까.
‘타격이 없지 않다.’
일검(一劍)과 함께 겁혈검 속으로 녹아든 피의 힘을 헤아리며 시엔이 납득했다.
파문 속에서 체사레의 육체를 이루는 생명의 원천이 비명을 내지르는 게 느껴졌다.
천년의 세월을 통해 쌓아 올린 피의 역사가 고스란히 ‘겁혈검’ 속으로 녹아들며 새로운 힘이 된다.
바로 그것을 든 시엔의 대녀, 티아의 힘으로.
티아는 그 어느 때보다 검고 어두운 눈동자를 하고, 체사레가 쌓아 올린 피의 역사를 자신의 것으로 흡혈(吸血)했다.
촤아악!
티아의 어깨뼈를 찢고 날개가 솟아났다.
체사레의 것과 같은 흑익이 아니다. 어깨뼈를 이루는 골검 세포의 성장을 극도로 가속해 꽃피운, 뼈와 강철의 날개였다.
동시에 등을 찢고 튀어나오며 흩뿌려진 피가, 그대로 티아의 손에 들린 헬싱을 향해 녹아들었다.
시엔과 티아.
나이트워커 가문의 어엿한 두 암살자가 함께 쇄도했고, 양쪽에서 엇박자로 휘둘러지는 두 자루 칼날이 체사레를 향해 죽음의 서슬을 빛냈다.
촤아악!
그와 함께 거리가 좁혀진 시점에서, 티아의 흉곽을 찢고 또다시 골검이 사출되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5식, 가시나무의 자세.
심지어 사출된 골검에서 다시금 또 하나의 골검이 파생되듯 사출하며, 끝없는 칼날의 뼈가 체사레를 향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뼈를 구성하는 기본 세포를 ‘골검 세포’로 대체해, 골격을 이루는 합금 칼날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5식의 극의─.
‘티아……!’
그때마다 티아의 몸에 새겨지는 피와 상처를 헤아리며 시엔이 입술을 깨물었다.
1초라도 지체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전신에서 칼날의 뼈를 사출하며 싸우는 티아와 함께, 시엔 역시 움직였다.
파지직!
초점 없는 청백색의 눈동자, 신기 묠니르의 힘을 빌린 뇌신의 눈.
전신을 내달리며 신경계의 전기신호를 극도로 가속하고 감각을 극대화하며, 비명을 내지르는 육체를 채찍질하는 벼락.
그 속에서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인(惡人)의 검이 휘둘러졌다.
체사레의 흑익에서 칠흑의 산탄이 뿜어지고, 티아의 합금 날개에서 마찬가지로 뼈의 산탄이 흩뿌려졌다.
피의 검과 겁혈의 검이 맞부딪쳤다.
마치 미래의 전장을 보는 것처럼 사방에서 빗발치는 총알의 장막 속에서, 호수의 암살자가 움직였다.
이 일대에 흩뿌려진 총알의 궤도 하나하나를 모조리 읽어내며, 그 속에서 가리키는 하나의 길을 찾아.
“천년을 살았다.”
카앙!
바로 그때, 섬광처럼 내달린 시엔의 왕 시해자가 가로막혔다.
“헤아릴 수 없는 나라와 제국, 왕과 지배자들의 파멸을 목도했지.”
혈검이 아니라, 핏빛으로 빛나고 있는 체사레의 혈조에.
“신의 아들조차 운명 앞에 순응하고 굴종하며,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모습을 보았지.”
혈검과 혈조로 시엔과 티아의 무기를 맞받아친 체사레가 말했다. 평소에 보여주는 일말의 능청스러움도, 다른 무엇도 없이.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이란 이유 하나로, 우리는 무릎 꿇고 굴종해야 하는가?”
그곳에 있는 것은 천년공 체사레 보르자가 아니었다.
“나의 위업을 보라,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일찍이 대륙을 호령했던 고대 제국의 황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절망하라.”
그가 즐겨 읊는 시, 오지만디아스.
그다음에 올 구절을 떠올리자마자, 정체를 알 수 없는 소름이 시엔의 등줄기를 타고 훑었다.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네.
“티아!”
묠니르의 힘을 통해 극대화돼 있는 시엔의 감각이, 체사레라는 존재가 빚어내는 ‘이형의 전기신호’를 포착했다.
포착하자마자 비로소 소름의 정체를 깨닫는다. 그야말로 낯빛이 창백해지는 것 같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당장 겁혈검을 손에 놓고 물러나!”
“……!”
겁혈검 헬싱은 적의 피를 빼앗고 흡혈하며 강해지는 검이다.
아무리 체사레가 새로운 육체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뱀파이어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는 이상, 겁혈검 헬싱의 힘을 피해갈 수 없다.
그럼에도 체사레는 너무나 담담히 그 신기의 존재를 받아들였다.
“모두 가져가라.”
아니, 오히려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있었다.
자신의 피에 깃들어 있는 힘과 역사, 그 전부를 기꺼이 ‘겁혈검 헬싱’에 드러냈다. 천년의 삶을 살아온 뱀파이어가, 기꺼이 자신의 전부를 내려놓은 것이다.
촤아악!
체사레의 검고 어두운 날개, 혈조와 피의 칼날, 그 전부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티아의 손에 들린 헬싱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
그와 함께 티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시엔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시엔조차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땅에 두 발을 디디고 있는 게 고작일 정도의 폭풍.
피의 폭풍이 그치자, 그곳에 남자가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 된 쌍두까마귀의 가족이.
“그러고 보니, 세상에서 가장 커다란 고통에 대해서 정정할 게 있었네요.”
어느덧 흑익도 핏빛의 검도 잃어버린 채, 그저 인간의 생육(生肉)을 가진 남자가 즐거운 듯 말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물론 끔찍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체사레가 등을 돌렸다. 마치 더 이상 이곳에서 볼일이 없다는 듯이.
“그나저나 그보다 좀 더 고통스러운 게, 아주 없지는 않더군요.”
그러나 시엔은 무방비하게 등을 돌린 채, 멀어지는 체사레를 좇을 수가 없었다.
카앙!
어느덧 그의 앞을 가로막는 또 하나의 ‘뱀파이어’가 있었으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고통이랍니다.”
겁혈검 헬싱에 깃든 천년공 뱀파이어의 피,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며 폭주하는 새로운 피의 괴물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