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규칙의 종족 (4)
“그렇게 가져가고 싶다니, 기꺼이 드리지요.”
체사레의 피가 깃든 겁혈검 헬싱, 그 폭주의 여파에 고스란히 노출된 티아가 그곳에 있었다.
“천년의 삶 속에서 쌓아 올린 나의 삶 전부를.”
등을 돌린 체사레가 비릿한 미소를 흘린다. 그리고 그가 멀어지는 와중에도, 시엔의 칼이 그를 향해 닿는 일은 없었다.
닿을 수조차 없었다.
눈앞에 있는 인간 체사레와 시엔의 사이에는, 그의 말처럼 천년에 걸쳐 쌓아 올린 그의 ‘전부’가 가로막고 있었으니까.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네.”
체사레가 즐거운 듯 오지만디아스의 구절을 노래처럼 흥얼거린다.
그 말처럼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자신의 전부를 내버린 인간이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너무나도 자유롭고 홀가분하게.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속에서, 천년의 업(業)과 생이 그곳에 남겨져 있었다.
“티아.”
“대부, 님……!”
시뻘겋게 핏발이 서 있는 두 눈동자. 전신을 찢고 튀어나온 뼈와 칼날의 날개 위에는, 일찍이 체사레의 흑익과 같은 검고 어두운 기운이 깃들어 있다.
광혈화(狂血化).
좌절하고 절망하고 비참에 잠길 여유 따위는 없었다.
1분도 1초도 아깝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악인의 자세》.”
악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 순간, 악인(惡人)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사랑하는 그의 전부를 구하는 것.
‘당신의 상처를 제게 나누어 주세요.’
티아가 그렇게 말했듯, 시엔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언제든 서로의 상처를 대신해 짊어지고 나눌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티아.”
시엔이 말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손으로 구해줄 테니까.”
“■■■─!”
“설령 네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해도.”
더 이상 그녀에게 이성이 담겨 있는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대신 천년의 업과 함께 폭주하는 겁혈검 헬싱이 휘둘러졌다.
여느 때의 검고 어두운 눈동자가 아니다. 당장이라도 터질 것처럼 시뻘겋게 이글거리는 핏빛의 눈동자다.
카앙!
일검(一劍)이 맞부딪쳤다.
“네 상처를 나에게 나누어주렴.”
검이 맞부딪친 순간, 겁혈검의 검붉은 파문이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흩뿌려지며 시엔을 집어삼켰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생명도 피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는 까닭에.
겁혈검 헬싱의 진짜 무서움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힘 그 자체를 빼앗는 검이란 데 있다.
전신의 피가 들끓는 것처럼 이글거리는 고통 속에서, 시엔의 생명이 티아의 손에 들린 겁혈검에 흡수되는 게 느껴진다.
─티아의 새하얀 뺨을 따라, 피로 된 눈물이 흘러내렸다.
촤아악!
그와 함께 티아의 전신을 찢고서 칼날의 뼈가 솟아났다.
마치 고슴도치가 뾰족 가시로 전신을 뒤덮는 것 같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형상.
다가오는 모두를 상처 입히고 거부하며, 자기 자신을 찌르는 가시나무.
묠니르의 힘을 통해 증폭된 시엔의 감각은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티아의 무의식이, 다가오는 시엔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을 구하기 위해 시엔이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 따위는 없다는 듯이.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바라지 않는 상냥함처럼 끔찍한 것도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시엔은 개의치 않았다.
악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구원의 방식.
카앙!
《호수의 암살자》 시엔, 그 이름처럼 어느 때보다도 고요해야 할 시엔의 호수가 뇌전과 업화에 휩싸이며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는다.
촤아악!
티아의 몸에서 사출되는 골검들이 시엔을 향해 내리꽂히고, 티아의 손에 들린 겁혈검이 ‘왕 시해자’와 맞부딪치며 흡혈의 파문을 그리는 와중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저 두 눈으로 응시할 따름이다.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손에서 폭주하고 있는 겁혈검 헬싱을.
‘완전히 잠식되지 않았다.’
묠니르의 힘을 통해 초점을 잃은 시엔의 두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티아의 존재를 정밀하게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시엔이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였다.
“「꼭두각시 벌레의 서」─.”
일찍이 시궁쥐 추기경 로드리고 보르자를 쓰러뜨리기 위해 벌레 학파의 제5마탑에서 훔친 마도서.
그 힘을 통해 시엔의 체내에서 헤아릴 수 없는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솟아나, 벌레의 군세를 이룬다.
「흡혈충(Lifedrinker)」.
비록 신기급 위력을 가진 헬싱에 비할 수 없다고 하나, 이치 자체는 비슷하다.
핏빛의 딱정벌레처럼 이루어진 벌레의 무리가 티아를 향해 쇄도했다. 정확히는 티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체사레의 피’를 향해서.
촤아악!
그와 함께 티아의 몸에서 재차 칼날의 뼈들이 솟아났다. 아니, 칼날조차 아니었다.
가시 바늘이었다.
쇄도하는 벌레 무리를 요격하기 위해 아주 가늘고 날카롭게 새겨진 수천의 가시 바늘들이, 고슴도치처럼 티아의 피부를 찢고 튀어나와 가시 갑옷이 된다.
흡혈충의 군세가 가시 바늘에 꿰뚫려 마력의 입자로 화하는 와중, 어느덧 거리를 좁히며 시엔이 재차 검을 휘둘렀다.
카앙!
다시금 겁혈검과 시엔의 ‘왕 시해자’가 맞부딪치고, 일대의 생명이 블랙홀처럼 집어삼켜졌다.
‘!’
그때마다 티아의 무의식 속에서 벌어지는 생체전기 신호를 놓칠 시엔이 아니었다.
지금 시엔이 보여주는 일방적 상냥함이 그 누구보다 그녀를 괴롭히고 상처 입히고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티아는 알지 못할 것이다.
시엔을 배려하지 않는 그녀의 일방적 상냥함이, 시엔에게 있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상처로 느껴질지.
그들은 처음부터 그랬다.
처음부터 그들은 서로를 위하는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지키려는 이기(利己)가 있었다.
그들은 자기밖에 알지 못했다.
상대가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 해도 기꺼이 상냥함을 베풀고, 바라지 않는다 해도 빼앗고, 상대의 의지 따위는 헤아리지 않고 바라는 바를 행할 따름이다.
그것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방식이고, 악의 방식이다.
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 자신을 깨끗한 거울과 멈춰 있는 물이라 생각하고, 네 앞의 상대를 비춰 보는 거야.’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걸로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요?’
콰직!
마치 장창 방진처럼 전신에서 솟아나는 골검의 사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리를 좁히며 시엔이 다시금 검을 휘둘렀다.
“「심경(心鏡)」.”
마음의 거울.
그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리며 시엔이 티아의 자세를 모방했다.
어떤 자세를?
촤아악!
시엔의 전신을 찢고 헤아릴 수 없는 ‘칼날의 뼈’가 솟아났다. 눈앞에 있는 티아를 그대로 흉내 내듯이.
가문의 5식, 가시나무의 자세─. 바로 그 자세의 극의이자 노목(老木)의 경지에 이르러 있는 티아를.
“!”
휘몰아치는 혈기 속에서 폭주하는 티아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리 없다.
시엔이 ‘꼭두각시 벌레의 서’를 통해 흡혈충의 군세를 부리고 사역했던 것은, 딱히 그녀의 피를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 벌레가 물어오길 바란 것은 피 따위가 아니다.
벌레를 요격하기 위해 가느다랗게 벼려진 가시 바늘의 ‘골검’을, 정확히는 골검 세포를 물어오길 바란 것이다.
이윽고 흡혈충이 가져온 골검 세포를 즉석에서 체내에 이식시키며─ 시엔의 몸에 깃들어 있는 ‘가시나무’를 자유자재로 제어하기 시작했다.
그 의미는 오직 하나였다.
5식의 마스터.
망령과 명경지수, 나락의 자세를 마스터하고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해 있는 시엔이, 이 순간 새롭게 손에 넣고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제4의 검식.
쿼드라 마스터(Quadra Master).
콰직!
티아와 똑같은 가시나무를 체내에서 뿜어내며, 똑같은 상처를 입고 똑같은 가시 바늘을 내뿜으며 시엔이 거리를 좁혔다.
이걸로 상황은 동등하다.
그 상태로 시엔의 일검이 휘둘러졌다.
가문의 6식, 나락의 자세.
《나락베기》.
그 일검이, 티아의 손목을 향해 휘둘러졌다.
겁혈검이 들린 티아 나이트워커의 팔꿈치가 그대로 잘려나갔다.
이윽고 잘린 채 땅에 떨어진 ‘겁혈검 헬싱’을 보고도, 망설일 이유 따위는 없었다.
“《흑관(黑棺)》.”
나지막이 읊조린다.
악인의 자세를 통해 깨우친 또 하나의 초식.
베르나르트의 초위계 마법 ‘아바돈’을 극도로 경량화해 이치 속에 녹여내고, 국소적으로 죽음과 탐식의 별을 불러낼 수 있는 일검.
천년의 삶, 설령 억년의 삶이라 해도 개의치 않는다.
폭주하는 겁혈검 헬싱과 티아의 잘린 팔이 떨어진 일대가 어둠에 집어삼켜졌다.
삼켜지고 나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네.
앞서 체사레가 중얼거린 그 구절처럼, 하나의 신기와 천년의 삶이 깃든 그 전부가…… 모조리 사라졌다.
그저 검고 어두운 궤짝 속에 삼켜지듯.
신기조차 무(無)로 되돌릴 정도의 위력을 가진 마법, 아바돈.
얼어붙을 것 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후두둑.
정적 속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누군가를 해칠 때마다 자신도 상처 입는 가문의 5식, 가시나무의 자세.
그 자세를 통해 서로가 흘린 피가 바닥을 피바다로 적시고 있었다.
그럼에도 시엔은 개의치 않았다.
“약속대로 됐구나, 티아.”
그저 바닥에 흘러내린 두 사람의 피를 보며 담담히 읊조릴 따름이다.
“이걸로 서로의 상처를 나눠서 딱 ‘절반’이 됐으니까.”
* * *
규칙이 있다.
그리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외를 인정하는 순간, 예외는 곧 새로운 규칙이 된다.
“경애하는 우리 ‘피의 어머니’를 뵙습니다.”
예외를 깨트린 뱀파이어, 이제는 불멸의 삶조차 저버린 채 필멸자가 되어버린 인간이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미망공 스칼렛과 인간 체사레.
“아, 카이사르.”
무릎 꿇고 입맞춤하는 그를 보며, 양갈래로 늘어뜨린 금발의 애티 어린 소녀가 미소 짓는다.
“내 사랑, 클레오파트라.”
카이사르의 입맞춤에 미망공 스칼렛, 피의 어머니, 아울러 ‘클레오파트라’의 진명(眞名)을 가진 뱀파이어가 미소 짓는다.
“이걸로 ‘겁혈검 헬싱’은 완전히 소멸했어.”
“그 대가로 너는 천년의 삶을 희생했지.”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으니까.”
스칼렛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사르가 미소 짓는다.
“그럼 어서 다시 ‘피의 세례’를…….”
“아니, 아직이야.”
그 말에 체사레가 고개를 젓는다.
“당장 피의 세례를 베풀었다가는 제국 놈들의 의심을 살 테니까.”
그 남자는 인간이었다. 그것도 새로운 쌍두까마귀의 가족.
그러나 그는 결코 가족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족 이외의 것이야말로 그의 전부였다.
눈앞에 있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결코 알기 쉬운 규칙의 망령 따위가 아니다.
규칙이 있고,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것이 바로 그 예외였다.
이미 천년도 넘는 세월 속에서 ‘새로운 규칙’으로 거듭나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