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군세의 악마 (1)
“대부님……!”
겁혈검을 쥐고 있던 팔이 팔꿈치부터 잘린 채, 전신을 찢고 고슴도치처럼 튀어나온 골검으로 피투성이가 된 티아가 그곳에 있었다.
마찬가지로 고슴도치처럼 전신에서 뼈의 칼날을 사출하고 있던 것은, 그녀의 대부 시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수백 자루의 칼날이 서로의 몸을 찢고 솟아나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
“의식이 돌아왔구나.”
“읏……!”
절단된 팔의 고통 속에서 티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러나 육체의 고통은 아주 잠시였다.
“구해…… 주셨군요.”
“그래.”
이내 상황을 이해하고 나서는, 자신의 상처 이상으로 시엔이 입은 상처에 파르르 몸을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약속했으니까.”
그것은 그녀가 바라지 않는,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일방적 상냥함이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랑하는 누군가가 목숨을 걸고 리스크를 감수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훗날의 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렇기에 티아가 되물었다.
“너 역시 그렇게 했을 테니까.”
시엔이 기억하는 미래 속에서 티아는 결코 시엔을 배려하지 않았다.
당사자를 배려하지 않는 희생이, 시엔에게 있어 얼마나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주박이 될지 티아 역시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고도 그렇게 했다. 티아만이 아니었다. 그들 가족 모두가 그랬다.
‘살아, 시엔.’
그게 그들의 방식이다. 시엔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그때마다 가족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주박이 되어 악몽처럼 시엔을 괴롭혔다.
살아야 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죽은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티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마워요, 대부님.”
침묵 끝에 티아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게 아니다. 세상에 자기 목숨이 소중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자신의 목숨보다 훨씬 더 소중한 것이 그들에게는 있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발목을 잡지 않을 정도로는요.”
티아가 대답했다.
팔꿈치부터 잘린 팔은 어느새 새로운 ‘골검 세포’가 솟아나, 잘린 팔을 대신해 커다란 뼈의 칼날이 솟아 있다.
설령 체사레가 사라졌다 해도 여기는 제국의 땅이다. 체사레나 제국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영토에 발을 디디고 있는 눈엣가시를 순순히 살려 보내줄 이유가 없다.
이윽고 적지 않은 실루엣의 무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모습을 드러냈다.
핏빛의 서코트에 흑색 철십자를 새겨넣은 제복 차림의 무리. 그들의 정체를 헤아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대의 규칙 속에서 침묵을 지켜야 할 불사의 종족이, 인간 세상의 존재들과 손을 잡고 세력을 이루고 있다.
“…….”
아울러 이 세계에, 더 이상 그들 뱀파이어의 천적이라 할 수 있는 신기 ‘겁혈검 헬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내 깨닫는다.
규칙에는 예외가 있다. 그리고 그 예외는, 이미 시엔이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과거 속에서 이미 하나의 ‘새로운 규칙’이 되어 있었다.
동시에 존재 자체로 이단(異端)이어야 할 그들 뱀파이어가, 신성 로마누스 제국과 교회를 수호하는 십자군의 제복을 갖추고 있다.
「붉은 십자군(Scarlet Srusade)」.
‘고위 뱀파이어는 아니다.’
하나하나를 놓고 봤을 때 이제 겨우 레서 뱀파이어의 수준을 벗은 정도.
지금 당장은 피의 추기경, 체사레가 자기 영지에서 육성하는 친위대 수준에 불과하겠지.
그러나 그들의 배후에 있을 뱀파이어 클랜과 미망공 스칼렛이 정말 그들 종족의 규칙을 깨고서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가정할 경우, 아직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는 그들이 장성한 뱀파이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에 불과하다.
심지어 침묵하고 있는 장로급의 고위 뱀파이어까지 ‘제국의 손’을 잡고 움직일 경우, 그들의 존재가 가져올 후폭풍은 적지 않다.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뱀파이어 클랜의 속셈에 놀았다는 사실을.
그녀, 미망공 스칼렛은 애초에 체사레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미래의 시엔조차 알지 못하는 정보이자 새로운 역사의 흐름.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뱀파이어들이 깨트린 것은 그들의 규칙이 전부가 아니다.
그들은 나이트워커 가문의 규칙을,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맺어진 계약을 깨트렸다.
그리고 나이트워커 가문은, 그들의 신뢰를 짓밟고 모욕하는 자들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게 그들의 규칙이었고, 그 어떤 경우에도 예외는 인정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핏빛의 혈조와 함께 혈검(血劍)을 쥐고 있는 그들을 향해, 시엔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칼자루를 고쳐 잡았다.
새로운 깨달음과 함께 일찍이 나이트워커 가문의 역사상 그 누구도 도달하지 못했던, 네 가지 검식의 ‘마스터’를 자처하는 강자로서.
당대 제일의 강자로는 부족하다. 그것으로는 결코 사랑하는 가족과 가문, 시엔의 전부를 지킬 수 없다.
그렇기에 이것이 그 해답이었다.
정작 이제는 인간이 된 체사레의 권속(眷屬) 뱀파이어를 향해, 호수의 암살자가 땅을 박찬다.
가족의 상처를 대속하는 누군가가 되기를 기꺼이 망설이지 않고.
촤아악!
나이트워커 가문의 5식, 가시나무의 자세.
그 앞을 가로막는 것은 보듬어주고 포옹해야 할 가족도 무엇도 아니다.
찢어발겨 없애야 할 적이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검식 중 4개의 극의에 이르러, 더 나아가 오직 시엔의 절기라 할 수 있는 ‘악인의 자세’가 펼쳐졌다.
전신의 육체를 찢고 솟은 칼날의 육체를 회전하며, 일대의 적을 칼날의 톱니바퀴로 갈아버리듯 시퍼런 서슬이 가속했다.
뼈로 이루어진 칼날의 의수를 가진 티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로 그때, 일방적으로 도륙당해야 할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단자의 자세(Heretic Stance)」.”
마치 신성 제국의 이단심문관, 공안들이 읊조리는 것과 같은 익숙한 울림.
“72위(位)의 63위계 · 사브나크(Sabnak) 강림.”
이 세계에 강림시킬 수 있는 초월적 존재는 천사가 다가 아니다.
신과 악신, 천사와 악마, 그들이 정말 교회에서 말하는 알기 쉬운 가르침과 전승대로의 존재일지는 알 수 없다.
하나 확실한 것은, 어쨌든 비슷해 보이는 게 있기는 하다는 점이다.
개중에는 교회에서 말하는 천사와 비슷해 보이는 존재들도 있고, 신의 뜻에 대적하는 악마와 비슷해 보이는 존재들도 있다.
후우웅!
검고 어두운 폭풍 속에서 ‘붉은 십자군’들의 육체에 초월자의 힘이 덧씌워진다.
한 가지 차이점은, 제국 공안이 부르는 것처럼 ‘각각의 악마’가 강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를 산 제물 삼아, 하나의 존재가 어둠 속에서 형상을 드러낼 따름이다.
72위의 63위계란 것은 교회에서 말하는 ‘72악마(게티아)’의 63위에 속해 있는 악마를 일컫는다.
군마(軍魔) 사브나크.
군세의 악마이자 공성과 부패의 악마.
바로 그 초월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일대의 영역이 결계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너에게 세상의 부와 영화와 불패의 군세를 주겠노라.”
악마 사브나크가 말했다.
어느덧 그곳은 직전까지 있던 체사레의 공작성이 아니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광야(廣野)의 모래밭이었다.
그리고 그 광야를 따라 지평의 끝에서 끝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악마들의 군세가 늘어서 있었다.
그들의 위업을 상징하는 헤아릴 수 없이 우뚝 솟은 탑과 성채들을 거느린 채.
“어떤 침략에도 무너지지 않는 성과 요새, 무엇이든 점령할 수 있는 군세를 주겠노라.”
제국 국교회에서 말하는 천사의 목소리, 일명 아리아(Aria)에는 그 자체로 신의 의지를 대행하는 강력하고 성스러운 힘이 깃들어 있다.
악마라 불리는 저 초월자들 역시 마찬가지다.
「유혹(Temptation)」이라 불리는 저들의 목소리에는, 인간의 영혼이 갖는 가장 나약하고 약한 부분을 찾아내 집요하게 속삭일 수 있는 마성이 깃들어 있다.
“필요 없다.”
“…….”
그럼에도 시엔이 대답했다.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러자 63위계의 사브나크라 불린 악마가, 침묵을 지키며 시엔을 바라보았다.
사자의 머리를 하고 백마 위에 올라타 있는 전사의 형상.
“……시엔 나이트워커.”
이윽고 사브나크가 흥미로운 듯 시엔의 입을 입에 담았다.
악마는 천사와 다르다. 천사처럼 인간에게 무심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에게 깊은 흥미를 갖고 대화마저 가능하다. 그래야 인간을 향해 유혹을 속삭이고 꼬드겨 떨어뜨릴 수 있으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싶지 않나?”
악마 사브나크가 다시금 물었다.
“내 앞에 무릎 꿇고 입맞춤하라.”
그의 등 뒤로 헤아릴 수 없는 악마들의 군세와 우뚝 솟은 요새를 등진 채.
“그럼 이 지상에서 네가 치르는 모든 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해주겠다.”
“우리는 거래에 대해 잘 알지.”
그 말에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조소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피해야 할 거래는, 당사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좋게 들리는 거래다.”
“……나의 왕국을 적으로 돌릴 셈이더냐?”
사브나크가 고개를 돌려 되물었다.
“어떠냐, 소녀야.”
시엔이 아니라 그의 곁을 지키는 티아를 향해.
“너의 오라버니를 지키기 위해 나의 군세와 승리의 영광을 손에 넣고 싶지 않으냐?”
“말했듯이, 우리는 절대 악마와 거래하지 않아요.”
침묵하고 있던 티아가 대답했다.
공화국의 오랜 격언 속에는, 절대로 악마와 거래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달리 알기 쉬운 신앙심도 무엇도 아니고, 그저 하나의 지극히 실리적인 이유였다.
악마와의 거래는 절대로 공정하지 않은 까닭에.
이 세상의 그 어떤 지혜로운 상인도 악마보다 교활할 수 없는 까닭에.
무엇보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이 광야는, 정말 악마 사브나크의 왕국이 아니다.
공안이 강림시키는 천사들이 그러하듯 이조차 ‘완전한 형태의 강림’이 아니다. 그저 어설프고 조악하게 쌓아 올린 모래성이자 사상누각(沙上樓閣)의 이계에 불과하다.
이미 시엔은 천사와 악마, 헤아릴 수 없는 초월자의 강림과 그들의 방식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목도해 왔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참으로 지혜롭구나.”
사자의 머리로 백마 위에 올라타 있는 악마, 사브나크가 즐거운 듯이 웃었다.
“적어도 ‘그 남자’보다는 말이지.”
그 남자.
그 말에 일순 시엔의 표정에 동요의 빛이 어렸으나, 이 이상 대화를 나눌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어느새 사브나크가 손에 쥐고 있는, 성과 탑의 문장(紋章)이 새겨진 깃발 창을 높이 들어 올린다.
「나는 전쟁과 요새의 악마이며, 그 어떤 전쟁에서도 패하지 않는다.」
악마 사브나크가 말했다. 일찍이 고위 천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거스르는 초월자의 힘이 깃든 전능의 목소리로.
동시에 사브나크가 결계처럼 펼친 광야의 왕국 속에서, 침묵하고 있던 악마들의 군세가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