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밤과 피의 왕국 (1)
라일라 나이트워커.
당대 제일의 최강자 중 하나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란 이명을 가진, 뭇 사람들에게 경외시되는 공화국의 진정한 지배자.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이, 자신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나날이 강해지는 와중에도…….”
그런 그녀가 자신의 아들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노력을 못 본 체하며, 이곳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구나.”
그들의 죄는 오직 하나였다. 라일라가 시엔의 앞에서 고해해야 할 죄 역시도.
약함.
“……그렇지 않아요.”
시엔이 고개를 젓는다. 마치 그 누구의 죄도 긍정할 것 같은 자애를 품고서.
“모두가 알고 있어요.”
“뭘 말이니?”
“우리 가문을 위해 어머니께서 흘린 피의 무게를.”
“……어른이 되었구나, 시엔.”
그 말에 라일라가 흡족함을 감추지 못하고 웃는다.
더 이상 어린아이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눈빛은 없다. 엄밀히 말해 그녀는 내려다보고 있지도 않았다.
“「죽음의 무도」.”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신뢰와 존중을 표하며, 라일라가 읊조렸다.
당대 제일의 최강자 중 하나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로서, 일말의 가감도 없이 펼쳐지는 그녀의 전력을.
“!”
망령과 검은 과부거미, 끝으로 8식 달그림자의 자세에 통달해 그랜드마스터가 된 나이트워커 공작의 전력.
거미 허물로 짠 드레스 《위도우메이커》가 죽음의 실을 흩뿌렸고, 춤추는 실들 사이에서 라일라가 땅을 박차고 쇄도했다.
소맷자락 속에 숨겨진 스틸레토 단검 ‘죽음(La Morte)’이 서슬을 빛내며.
달그림자의 자세, 섬월.
눈 깜빡할 사이에 거리가 좁혀졌다.
‘빠르다!’
봐주지 않는 정도가 아니다. 오히려 지금 라일라는 철저하게 도전자의 입장에 서서 시엔을 향해 전력을 맞부딪치고 있었다.
카앙!
부딪치는 칼날과 휘몰아치는 죽음의 거미줄 속에서, 시엔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의 시린 살기가 내달린다.
라일라는 믿고 있었다.
그녀의 앞에 있는 대자, 시엔 나이트워커는 더 이상 어머니의 손에 일방적으로 지켜져야 할 어린아이가 아니란 사실을.
이제부터 ‘지켜지게 될 쪽’은 자신이란 사실을.
눈앞에 있는 그녀의 아들은 설령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전력을 다할지라도 결코 호락호락 당할 상대가 아니다.
진실과 다를 바 없는 신뢰에서 비롯된 라일라의 칼끝이 전력을 다해 휘둘러졌다.
일체의 가감도 손대중도 없는 살의 그 자체.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 라일라의 눈동자는 사랑하는 아들을 죽이기 위한 검고 어두운 악의로 가득 차 있었다.
더 이상 성장할 여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그녀의 삶의 굴곡은 일찍이 정점을 찍었고, 천천히 하강하며 느긋하게 죽어갈 뿐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아니었다.
시엔이 멈춰 있지 않고 가족들이 멈춰 있지 않듯이, 그녀 역시 멈춰 있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여느 때나 등 뒤로 쏟아지는 달빛을 역광으로 드리운 채, 집무실 자택에 앉아 느긋하게 다가올 죽음과 정체를 기다리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래서야 운명 앞에서 순응하며, 죽을 날을 기다리는 도살장의 소와 다를 게 무엇인가.
하물며 불사의 역설에 사로잡혀 있는 천년공 체사레조차 운명 앞에서 발버둥 치고, 기어코 그 굴레를 극복하지 않았나.
“나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주렴, 시엔.”
그렇기에 라일라가 말했다.
일찍이 그녀가 시엔의 앞에 나타나 손길을 내밀었을 때처럼, 어리고 미숙했던 시엔을 혹독하게 연단(鍊鍛)시켰던 그때처럼, 이제는 시엔을 향해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가르침을 청하고 있었다.
“나에게 지금 이상으로 사랑하는 전부를 지킬 힘을.”
후우웅!
“네가 도달했고 나는 도달하지 못했던 저 너머,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풍경을.”
동시에 그녀가 딛고 있는 발밑을 기점으로, 끝없이 검고 어두운 밤하늘이 펼쳐졌다.
밤하늘 같은 게 보일 리 없는 공작 저택의 지하, 나락의 방이라 불리는 바로 그곳에서.
“그럴 거예요.”
시엔 역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날의 저에게 사랑하는 것을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듯이.”
그날, 어린 시엔을 향해 속삭여준 라일라의 상냥하고 애정 어린 목소리를 떠올리면서.
“저는 이미 당신에게, 제 삶 전부를 바쳐도 갚을 수 없는 빚을 졌어요.”
아직 모든 것이 파멸하는 미래를 겪지 못하고 절망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모든 것을 잃고 과거로 돌아왔을 때, 어느 때에나 그녀는 시엔 앞에 나타나 손을 내밀어주었다.
‘가족이 되고 싶니?’
‘저는 늘 당신의 아들이었어요.’
“네가 나에게 짊어진 빚 같은 것은 없단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저 네가 나의 아들이 되어주었단 사실이, 내게는 아직도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하거든.”
라일라가 말했다.
“너무나도 꿈만 같고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서, 이 모든 게 하루아침에 깨어날 백일몽이 아닐까 두려울 지경이란다.”
처음으로 그녀가 보여주는 나약함. 그 나약함 앞에서 시엔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꿈이 아니에요.”
“그럼 뭐지?”
“진실이죠.”
“─.”
시엔의 말에 라일라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린다.
“그리고 저는 이 진실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시엔 역시 자세를 취했다.
“《악인의 자세》.”
촤아악!
시엔의 날개뼈를 찢고 뼈로 이뤄진 칼날의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피도 이어져 있지 않고 서로에게 애정을 베풀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들 공동체가 느끼는 깊은 결속은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처치해둔 세뇌 작용에 불과하며, 거짓된 감정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들에게는 가족이 전부였다.
그게 그들의 방식이었다.
일말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존재할 리 없는 별빛이 쏟아져 내리며 두 사람의 격돌을 비춘다.
밤을 걷는 두 모자.
“제 손을 잡아주세요, 어머니.”
‘암살자들의 어머니’의 뒤를 이어 훗날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될 남자가 말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도달하지 못했던, 저 너머에 있는 밤하늘의 풍경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 위해서.
* * *
그 시각, 샤를마뉴 왕국령 북서부.
“차징!”
샤를마뉴 왕국을 상징하는 백합 문장이 새겨진 창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것을 신호 삼아 대열을 갖춘 기사들이 용맹하게 소리를 높이며 기병 돌격을 시작했다.
감히 그들 왕국이 자랑하는 중장기병대의 돌격 앞에, 너무나도 무방비하게 일자로 늘어서 있는 칠왕국의 침략자들에게.
탕!
총성(銃聲)이 울려 퍼졌다.
그들로서는, 죽는 순간까지 ‘총성’이란 게 무슨 말을 뜻하는지도 모를 것이다.
핏빛 코트 차림의 제복을 입고 전진하는 보병들 앞에서, 중장갑주로 전신과 군마를 휘감고 있는 기병대의 돌격 따위는 무의미했다.
화약이란 개념 자체는 대륙에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그 화약을 이렇게 효율적이고 살상력 있는 ‘신병기’로 탈바꿈시킬 줄은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일개 보병이 고위 마법사의 볼트 마법에 준하는 파괴력의 투사체를, 분당 몇 발에 가까운 속도로 난사하고 있다.
전쟁의 악마와 거래를 맺고 손에 넣은,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불패의 군세.
세상의 이치와 섭리를 벗어나 누구도 그 앞을 가로막을 수 없는 왕의 군세.
전황을 지켜보며 아서왕이 감정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곧바로 수도 루테시아를 향해 진격할 것이다.”
왕의 행진.
정복의 시작이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왕의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짓밟고 불태울 각오로.
* * *
그로부터 얼마 후, 샤를마뉴 왕국의 수도 루테시아.
“……칠왕국 군대가 주요 요새를 차례차례 점령하며, 수도를 향해 빠르게 남하(南下) 중이란 보고입니다.”
공식적으로 이 나라의 지배자는 어리석은 대머리왕 샤를 4세다. 그러나 공화국이 그러하듯, 이 나라의 누구도 그 머저리 임금이 왕국의 ‘진짜 지배자’가 아니란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경과 왕국이 자랑하는 기사의 도(道)를 갖고는, 그들을 막을 수 없었던 모양이지요?”
제1왕녀 로젤리아 샤를이 차가운 목소리로 조롱했다.
“…….”
그 말에 기사의 예법에 따라 무릎 꿇고 검을 세로로 내리꽂은 검성 롤랑이, 무거운 목소리로 침묵을 지켰다.
“감히 말씀드리건대…….”
침묵 끝에 롤랑 경이 입을 열었다.
“칠왕국의 신식 군대 ‘레드 코트(Red Coat)’는, 절대 이 세상의 섭리와 이치 속에 존재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뭐, 그야 그렇겠지요.”
로젤리아가 놀랄 것도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신성 제국의 공안과 천사병, 베네토 공화국의 ‘밤을 걷는 자들’과 서펀트 가문, 주위의 온갖 나라들이 섭리 밖의 존재를 전력으로 포섭하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와중에…….”
으쓱이고 나서는,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이 나라가 자랑하는 긍지 높은 기사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훗날 「붉은 백합의 여왕」이라 불리게 될 그 이름에 결코 뒤지지 않는 위엄을 머금고.
“우리의 땅이 섭리를 벗어난 괴물들의 손에 짓밟히고 범해지고 불타는 와중에, 그대들이 추구하는 도(道)는 무엇을 해주었나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다.
칠왕국의 신식 군대 ‘레드 코트’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전부를 쓰러뜨리고 불패의 행진을 거듭할 때, 기사들의 역할은 쓰러지는 것뿐이었다.
하나의 시대정신이 끝을 고하고 있었다.
‘기사도’란 이름의 시대정신이.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침묵 끝에 로젤리아가 입을 열었다.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꾸고, 무적의 적수를 이기며, 진실로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
그것이 이 나라의 기사들이 부르짖어 마지않는 기사도였다.
“잘못을 고칠 줄 알고, 부당함에 맞설 줄 알며, 순수와 선(善)을 베푸는 것. 명예와 영광을 위해 살며, 명예와 영광을 위해 죽는 것.”
“…….”
“참으로 듣기에 아름다운 말이지요.”
로젤리아의 말에 롤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그 이상이 별에 닿지 못했을 때, 정작 그 고통과 대가를 감내하는 것은 오롯이 이 나라의 백성들이지요.”
지금도 이 땅에서 왕의 군세, 괴물의 군세에 짓밟혀 신음하고 고통받는 백성들.
그날, 시엔 나이트워커와 마주하며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롤랑 경을 죽여주세요.
그것은 공화국으로서도 마다할 게 없는 제의였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시엔과 밤을 거는 자들은 로젤리아의 암살 의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별에 닿고자 하는 기사들의 이상이 이 나라에 가져올 파국을.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은 더 이상 그녀와 왕국의 협력자가 아니다. 아니, 애초에 협력자였던 적도 없었다.
“롤랑 경, 당신의 잘못과 어리석음을 인정하시나요?”
그렇기에 로젤리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길지 않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죽음으로라도 속죄하겠습니다.”
정적 끝에 롤랑 경이 대답했다.
“저는 그 역겨운 사고방식이 싫답니다, 롤랑 경.”
그 말에 로젤리아가 다시금 차가운 실소를 터뜨렸다.
“그러나 경에게 속죄의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
그리고 그 말과 함께, 침묵하고 있던 그녀의 새로운 ‘협력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애티 어린 소녀였다.
흑색의 드레스 사이로,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꼬아놓은 금색의 양갈래 머리카락을 발밑까지 늘어뜨린─.
“아, 참으로 고결하고 아름다운 아이로구나.”
뱀파이어 클랜의 수장, 미망공 스칼렛이 입술 사이로 송곳니의 서슬을 빛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