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밤과 피의 왕국 (2)
그로부터 얼마 후, 공작 저택의 지하.
“조금 아플 거란다.”
상의를 탈의하고 엎드린 시엔의 등을 따라, 라일라의 부드러운 손길이 훑는다.
손길에 이어서는 차가운 금속성의 감촉이 닿는다.
그대로 등을 찢고 살갗을 절개하며 피부밑에 숨겨진 시엔의 ‘가시나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장이라도 전신의 육체를 찢고 튀어나올 것처럼 끔찍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생장(生長)해 있는 뼈의 칼날.
“……나뭇가지들이 제법 많이 엉켜 있구나.”
며칠 가까이, 라일라의 고해를 위해 그녀와 맞서며 가감 없이 능력을 펼친 대가.
“조금 지나치게 혹사했는지도 모르겠구나.”
“당신을 위한 상처예요.”
그럼에도 엎드린 시엔이 대답했다.
콰직!
등을 가르고 그 속에서 멋대로 자라나고 있는 뼈를 절단해 뽑아내는 와중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담담하게.
“우리 가족들을 위한 상처이기도 하고요.”
“그렇겠지.”
이제 와서 시엔을 걱정하고 어설프게 배려해봐야, 고집을 꺾을 아이가 아니란 사실을 라일라 역시 알고 있다. 아니, 가문의 5식 ‘가시나무의 자세’를 펼치는 가족들 모두가 그랬다.
상대가 바라지 않는 일방적인 상냥함을 강요하며 자신을 상처 입히는, 누구보다 이타적이며 동시에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방식으로 상냥함을 베푸는 존재들.
“그래도 네 덕분에, 나 역시 많은 것들을 배웠단다.”
어느덧 시엔의 뼈를 깎아내고 있던 라일라의 손 역시 똑같은 피투성이가 된 채였다.
“뭘 배우셨는데요?”
시엔이 짐짓 짓궂게 물었다.
“나 역시, 똑같이 상처 입고 피를 흘리는 인간임을.”
짧은 정적 속에서 라일라가 대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괴물이 아니었다. 똑같은 인간이었다.
정해진 삶 속에서 천천히 성장하고 노쇠하고 죽어가는 필멸(必滅)의 존재.
이 순간,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손이 증거였다.
시엔의 피가 묻은 탓도 있었으나, 시엔의 체내에 깊숙이 손을 파고들며 가지를 쳐내는 와중 가시에 찔려 맺힌 그녀의 피가 그 이상으로 많았다.
“부탁을 하나 들어줄 수 있겠니, 시엔.”
“말씀하세요.”
“나와 함께 수행해줄 임무가 있단다.”
라일라가 말했다.
“무척이나 비밀스러운 임무지.”
그 말에 생살을 찢고 체내의 뼈를 헤집는 고통 속에서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시엔이, 비로소 눈동자를 끔벅거렸다.
“어떤 임무죠?”
“별과 단검의 약속을 저버린 자들에게, 우리의 신뢰를 보여주는 일이지.”
라일라가 말했다.
“뱀파이어 클랜이 샤를마뉴 왕국 측으로 움직였다는 첩보가 들어왔단다.”
“제국이 아니라 왕국에?”
“그래.”
라일라가 말했다.
“칠왕국이 거느린 악마의 군세는 인간의 섭리로 당해낼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니까 말이지.”
일명 ‘레드 코트’라 불리는 새로운 왕의 군세. 그들의 정체를 모를 시엔과 라일라가 아니다.
“그래서 그에 맞설 수 있는, 똑같은 섭리 밖의 존재와 손을 잡은 거군요.”
나이트워커 가문의 역사 이상으로 오래된 밤과 피의 혈족(Kin).
천사와 악마, 뱀파이어. 제국과 왕국들이 온갖 섭리 밖의 힘을 가진 존재들 속에서, 역설적으로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밤을 걷는 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족들은 결코 인간의 찬가를 부르짖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이 가진 악(惡)의 심연 그 자체였다.
마치 세상의 그 어떤 괴물도, 인간의 악의를 능가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 * *
그들은 왕의 군세였고 동시에 악마의 군세이기도 했다.
아서왕이 전쟁과 요새의 악마, 사브나크와 계약을 맺고 손에 넣은 불패의 군대─ 레드 코트.
끝없는 전투 속에서 먹고 자고 휴식을 취하는 일조차 없이, 생사가 오가는 전장 속에서 공포를 느끼는 일조차 없이, 그저 ‘계약’을 이행할 따름이다.
보급도 휴식도 필요하지 않다. 인간의 군대로는 절대 이행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전략과 전술을 수행하며 파죽지세로 수도를 향해 다가섰고, 머지않아 샤를마뉴 왕국의 수도 루테시아를 놓고 공성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들과 맞서는 이들 역시 더 이상 인간의 섭리 속에 존재하는 보통의 이들이 아니었다.
인간의 도(道), 기사의 도를 가지고는 그들과 싸울 수 없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의 시대정신이 역사 속으로 저물고, 새로운 시대정신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 * *
마치 악마가 술수라도 부린 것 같았다.
하룻밤을 자고 일어나 보니, 왕도 루테시아를 마주하듯 칠흑의 거대 요새가 세워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평야 위에 검고 어두운 흑철(黑鐵)로 쌓아 올린 육망성 형태의 요새.
축성하는 데 족히 수십 년은 걸려야 할 규모의 터무니없는 구조물이, 말 그대로 하룻밤을 자고 보니 세워져 있었다.
전쟁과 요새의 악마, 사브나크의 힘을 통해 축성된 침략자들의 요새.
“저게 악마의 힘…….”
그 검고 불길한 육망성 모양의 요새와 왕의 군세를 내려다보며, 왕성의 창에서 로젤리아가 나직이 등을 돌렸다.
진즉에 대머리왕 샤를과 무능한 귀족들은 수도를 버리고 랭스(Reims)로 도망친 뒤였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왕국의 제1왕녀, 로젤리아는 도망치지 않았다. 도망칠 수 없는 백성들과 함께 수도에 남아, 이곳을 노리는 침략자와 맞서기를 결의한 채였다.
마지막까지 명예와 정의를 위해 기사의 도를 부르짖다 개죽음을 맞이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녀는 결코 가망 없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허황한 이상을 부르짖으며, 태양 가까이 밀랍의 날개를 펼치는 것은 로젤리아의 방식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피의 성처녀(La Pucelle), 로젤리아.”
그런 그녀를 향해 금발의 애티 어린 소녀가 즐거운 듯이 입을 열었다.
“우리 종족의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하게 날개를 펼치고 빛날 나의 딸아.”
뱀파이어 클랜의 수장이자 ‘미망공’의 이명을 가진 진조가 말했다.
“그리고 우리 종족의 역사 속에서,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검(劍)을 펼칠 나의 아들아.”
로젤리아와 함께 그녀의 곁을 지키는 고결한 기사를 향해.
시체처럼 창백해진 피부 속에서도 감출 수 없는 고결함과 긍지가 느껴지는 그 남자는, 여전히 이상을 좇는 기사였다.
일찍이 그 남자는 검성 롤랑이라 불렸으며, 필멸과 섭리의 굴레를 벗어던진 그에게는 로젤리아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이름이 부여되었다.
검마(劍魔) 롤랑.
남자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고, 성자도 아니었던 까닭에.
‘검마라.’
아이러니하게도 마지막 순간에 기사의 긍지와 도를 추구하며 스러진 그의 친우, 검마 그란델 오스왈드의 이명.
“무엇이 그리 웃기시지요, 롤랑 경?”
조소하는 롤랑을 향해 로젤리아가 말했다. 금색의 술잔 속에 담겨 있는 핏빛의 액체를 홀짝이며.
“구역질이 날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말을 조심하라, 어린 일족이여.”
그 말에 침묵하고 있던 클랜의 장로 하나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를 제지하며 로젤리아가 즐거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바로 삶이랍니다, 롤랑 경.”
진흙탕 위에 떨어진 그의 몰골이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것, 살아가며 무엇을 바라는 것은 결코 고결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고, 오히려 추하고 비참할 정도로 우스꽝스러운 촌극에 가깝지요.”
동시에 그녀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그러나 그 어떤 처절한 발버둥과 비참함을 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켜내야 할 소중한 것이, 저에게는 있답니다.”
로젤리아가 말했다.
“당신에게는 그토록 소중한 것이 있나요, 롤랑 경?”
그곳에 있는,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라 불렸던 남자를 향해.
“아마도 없을 테죠.”
“…….”
“당신은 그저 규칙을 잘 지키며 살아온, 껍질밖에 없는 존재에 불과하니까요.”
그 조롱에도 롤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맞는 말이었다. 이 세상의 현실이 그의 이상과 기사도를 부정하고, 역으로 그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로젤리아의 입을 통해 깨달았을 때, 롤랑 경은 주저 없이 그들의 방식을 받아들였다.
마지막까지 기사도를 지키며 목숨을 걸지도, 신념을 관철하지도 않았다.
“그랬나.”
그 사실을 깨닫고 롤랑 경이 웃었다.
어째서 깨닫지 못했을까. 어쩌면 이것도 피의 세례를 받고 불멸자가 된 부작용의 일부일까?
그저 허망할 뿐이었다. 동시에 롤랑 경의 삶 속에서, 이 허망함이 채워졌던 적은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규칙의 망령’이었던 것은 눈앞의 종족들이 아니라 바로 롤랑 경 자신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남자는 기사였다. 그리고 기사는 오직 주군의 뜻에 따라 휘둘러지는 검(劍)이자,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방법의 극의를 갈고닦는 자를 말한다.
남자는, 여전히 기사였다.
* * *
그 시각, 왕도 루테시아를 마주하고 있는 육망성 모양의 흑철 요새.
바로 그 요새에서 악마의 군세와 함께 기사단을 거느린 왕이, 뜻밖의 불청객들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네놈들…….”
“이렇게 뵙게 되어 무척 영광이랍니다, 폐하.”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그리고 그녀의 대자이자, 이제는 명실상부 이 대륙의 최강자 사이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는 ‘호수의 암살자’ 시엔이 있었다.
“그 두꺼운 낯짝으로 이곳에는 무슨 볼일이지?”
“적의 적은 친구란 말이 있는 법이지요.”
“네놈들도 우리의 적이다.”
그 말과 함께 아서왕을 비롯해 원탁의 기사들이 칼자루 위에 손을 올린다.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격돌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촉즉발의 공기.
“아, 물론 그렇지요.”
그럼에도 라일라가 느긋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에게는 함께 힘을 합쳐 쓰러뜨려야 할 ‘공공의 적’이 존재하지요.”
그 말에 아서왕이 코웃음을 친다.
“이곳에 있는 짐의 군세가, 이 나라의 어리석은 기사들 하나 쓰러뜨리지 못할 것처럼 나약해 보이나.”
“이 나라의 기사들은 그렇겠지요.”
시엔이 대답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더 이상 기사들의 나라가 아닙니다.”
툭.
그 말과 함께 시엔이 함께 가져온 자루 속에서 내용물을 바닥에 흘렸다.
남자의 잘린 목이었다.
동시에 그 목은 결코 보통 인간의 목이 아니었다.
아서왕 정도의 강자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고위 뱀파이어…….”
“얼마 전, 뱀파이어 클랜과 미망공 스칼렛이 우리 가문과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맺어진 약속을 깨트렸습니다.”
시엔이 말했다.
“그들 종족의 오래된 규칙과 함께 말이지요.”
그 말에 담긴 무게를 모를 리 없는 아서왕 역시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이 대륙에서 침묵을 깨트리고 움직이는 섭리 밖의 존재들은, 결코 폐하의 군세가 다가 아니랍니다.”
그 말에 침묵하고 있던 요정왕 멀린 경이 입을 열었다.
“그들의 말이 맞습니다, 폐하.”
그의 눈동자에 깃든 예지(叡智)의 이채를 빛내며.
“무엇을 보았지?”
왕의 물음에 멀린 경이 대답했다.
“밤과 피의 왕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