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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44화 (144/200)

144화. 밤과 피의 왕국 (3)

대륙에서 가장 풍요로운 봄볕의 나라, 샤를마뉴 왕국의 심장.

왕도 루테시아.

여느 때처럼 따사로운 봄볕의 햇살이 쏟아져 내려야 할 도시의 새파란 하늘에, 검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러고 나서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피로 된 비였다.

*  *  *

“밤과 피의 왕국이라.”

멀린 경의 말에 아서왕이 나지막이 표정을 찌푸렸다.

이 순간, 샤를마뉴 왕국의 왕도 루테시아를 뒤덮고 있는 혈우(血雨)를 지켜보며.

섭리를 벗어난 왕과 악마의 군세에 맞서, 샤를마뉴 왕국이 손에 넣은 새로운 힘.

“피의 어머니가 침묵을 깨트렸나.”

거기에 깃든 마력과 불길함의 의미를 모를 그들이 아니었다. 하물며 이렇게나 터무니없는 규모로 ‘피의 세례’를 내릴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설마 왕도의 인간 전체를…….”

아무리 그래도 설마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세력을 확장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곳에 더 이상 인간들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이 이상 지체할 수는 없어.”

멀린 경이 말했다.

“그랬다가는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이에게, 충분히 걸음마를 연습할 시간을 주는 꼴이 될 테니까.”

왕도 전체를 아우르는 피의 세례를 통해 백성들이 ‘새로운 혈족’으로 거듭나는 와중, 새로운 불멸의 육체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것을 기다려줄 이유는 없다.

“봉쇄 전략은 폐기하겠다.”

이제 악마의 군세로 수도 일대를 포위하고 도시를 말려 죽이는 고사(枯死)의 전략은 의미가 없다.

왕도 루테시아의 인간들은 이곳에 있는 악마의 군세와 마찬가지로, 더 이상 인간의 섭리에 구애받지 않는 불멸의 존재가 됐으니까.

“놈들이 세례를 받고 뱀파이어의 새 육체에 적응하기 전, 전력을 다해 수도를 친다.”

결의를 다진 아서왕이 말했다. 휘하에 거느린 원탁의 기사단과 더불어 그곳에 있는 몇 없는 인간 중 하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두 암살자에게.

*  *  *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기사, 검성 롤랑.

그 남자는 어릴 때부터 ‘가장 모범적인 기사’였다.

샤를마뉴 왕국에서 어린아이가 기사 수업을 시작할 때 처음 배운다는 기초 검식─ 순수의 자세.

베기 · 찌르기 · 막기.

엄밀히 말해 자세라고 부를 수도 없는 세 가지 동작이자, 검술을 구성하는 기초이자 최소 단위로 이뤄진 검술의 원형(原型).

스승이 어린 롤랑에게 처음 그 자세를 가르쳐줬을 때, 그는 그저 시키는 대로 묵묵히 휘둘렀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피가 나고 살갗이 까져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다른 아이들이 울며불며 떼를 쓰거나 도망치고, 못 하겠다고 응석을 부리는 와중에도 그저 묵묵히 휘두를 따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스승께서 깜박하고, 연무장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던 우리를 잊고 일과를 마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나, 그것참.”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혈우를 등진 채, 새로운 혈연(血緣)으로 묶인 롤랑의 누이가 미소 짓는다.

피의 성처녀─ 로젤리아 샤를.

“저는 어째서 아이들이 도중에 연습을 멈추고, 스승이 오지 않을 거라 수군거리며 돌아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게 보통 사람의 사고방식이니까요.”

자신이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알아서 응당 수련을 멈추고 돌아가리라 생각했던 스승의 생각은, 롤랑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사고방식이었다.

그곳에 남겨진 롤랑 경은, 저녁해가 저물고 이튿날 해가 떠오를 때까지 세 가지의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베고 찌르고 막는다. 베고 찌르고 막는다. 베고 찌르고 막는다…….

“아마도 그것이 계기였을 겁니다.”

“뭐가 말이죠?”

“제가 ‘기사도의 모범’으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받아들였던 때가.”

모두가 규범을 준수하는 롤랑 경을 기사도의 모범이라며 치켜세웠다. 딱히 롤랑 경 역시 기사의 길을 좇는 삶을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해야 할 합리적인 이유조차 없었다.

이제는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처음부터 그는 그저 텅 비어 있을 뿐인 공허의 화신이란 사실을.

텅 비어버린 자신의 존재를 「올바르게 규범을 이행하는 것」으로 감추려 했을 뿐.

“저는 여전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로젤리아.”

그에게는 아무것도 소중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그렇기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비참함을 감내하고 세상의 진흙탕을 뒹굴며, 자신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인간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딱히 이해해줄 필요는 없답니다.”

로젤리아 역시 개의치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저 저에게는 이 나라가 소중하고,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을 뿐이지요.”

설령 뱀파이어 클랜과 손을 잡고, 왕도의 백성 전체를 괴물로 바꾸는 희생을 치러서라도─.

롤랑 경이 자신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여전히 기사였다.

“머지않아 침략자들의 군세가 움직일 거랍니다.”

“그들 역시 기다려줄 이유가 없을 테니까요.”

로젤리아가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 짓는다.

동시에 그림자 속에서 그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잿빛의 여기사가 입을 열었다.

“준비는 됐습니다, 공주님.”

“그렇게 딱딱하게 부를 것 없답니다, 테레지아.”

“하오나…….”

군신(君臣)의 예를 차리는 테레지아 경을 향해 로젤리아가 말했다.

“우리는 이제 피를 나눈 가족이잖아요?”

인간과 뱀파이어의 혼혈,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가장 인간에 가까운 그녀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

미소 짓는 로젤리아의 입술 밑으로 송곳니의 서슬이 창백하게 빛을 흩뿌렸다.

*  *  *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에게 성벽을 넘고 적의 도시에 침입하는 것 정도는 손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곳은 더 이상 여느 때처럼 따사로운 햇살과 봄볕이 내리쬐는 풍요의 도시가 아니었다.

“세례의 비는 그친 모양이구나.”

망령이 되어 왕도의 성벽을 넘어, 거리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며 라일라가 말했다.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요.”

말하고 나서 시엔이 이어지는 위화감에 쓴웃음을 짓는다.

사람이라니. 애초에 이곳 왕도에 더 이상 인간 따위는 없다. 아마도 여기에 있는 시엔과 라일라가 유이(唯二)한 인간일 테니까.

“기억하렴, 시엔.”

그렇기에 라일라 역시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괴물’이란 사실을.”

외눈박이의 나라에서는 두 눈 달린 인간이 괴물이듯이.

마찬가지로 뱀파이어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인간이 괴물이다.

그곳에 있는 두 사람처럼.

쿵!

직후, 하늘 위에서 운석이 떨어지듯 포탄 하나가 시가지를 향해 내리꽂혔다.

쿵, 쿵!

종래의 지렛대처럼 작동하는 대형 투석기 트레뷰셋이 아니라, 천지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한 소음과 흑연(黑煙)을 내뿜는 공성 병기였다.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의 공성 마법에 버금가는 위력을 내뿜는 최신식 대포.

전쟁의 악마, 사브나크가 왕에게 내려준 것은 그저 레드 코트의 군세가 다가 아니었다.

“전투가 시작되었구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숨어드는 동시에, 칠왕국 역시 지체하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정왕 멀린의 말마따나, 세례를 마치고 피의 일족으로 다시 태어난 갓난아기들이 걸음마를 마치기 전에 전투의 종지부를 찍기 위해서.

“여기 계셨군요.”

바로 그때였다.

혼란을 틈타 암약하는 시엔과 라일라를 향해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들의 영역에 숨어든 ‘괴물’을 처단하기 위해.

“……설마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감히 나이트워커 가문과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맺어진 약속을 깨트린 조직과 그 당사자.

혈족(Kin)이라 불리는 고위 뱀파이어. 개중에는 무척이나 낯이 익은 얼굴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기사도의 나라, 샤를마뉴 왕국이 자랑하는 긍지 높은 최강의 기사들.

그러나 칠왕국과의 거듭되는 패전 속에서 하나둘씩 전사하며 명성에 금이 가고 깨져가는, 무너져 내린 시대정신의 상징.

검성 롤랑을 필두로 남아 있는 샤를마뉴의 12기사(팰러딘)들이 그곳에 있었다.

일찍이 그들이 추구했던 고결하고 명예로운 기사도 따위는 찾아볼 수 없이, 그저 피를 갈구하는 귀신이 되어서.

그럼에도 그들은 이곳에서 지극히 정상적인 존재들이었다.

오히려 여기서 배척해야 할 괴물은 뱀파이어가 아니다. 그곳에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두 인간이다.

공동체의 질서와 안녕을 깨트리는 이형의 존재─.

성큼.

그곳에 모여 있는 고위 뱀파이어들 사이에서, 일찍이 검의 성자라 불린 롤랑 경이 걸음을 옮겼다.

“저들은 나와 랜필드 공이 맡겠다.”

롤랑의 말과 함께 나머지 뱀파이어들의 모습이, 마치 동굴 속에서 수백 마리 박쥐가 흩어지듯 날갯짓하며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남겨진 두 사람, 롤랑과 익수공(翼手公 · Lord Bat)의 이명을 가진 장로급 뱀파이어─ 랜필드.

그 남자는 일찍이 시엔의 앞에 나타나 거짓을 속삭였던 뱀파이어 클랜의 ‘블랙리스트’ 중 하나였다.

2대2의 대치.

아마 뱀파이어 클랜 역시, 이곳 왕도를 노리는 칠왕국의 군세와 싸우느라 이 이상의 전력을 투입할 여력은 없을 것이다.

“제가 롤랑 경을 맡을게요.”

“…….”

시엔이 말했다. 그 말에 라일라의 눈빛에 일순 동요가 어렸다. 물론 동요 자체는 길지 않았다.

“알겠단다, 시엔.”

이 아이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지켜져야 할 그녀의 아들이 아니다.

무엇보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주이자 과거 ‘규칙의 대행자’로 그들 뱀파이어 클랜과 거래를 나누었던 당사자로서, 눈앞의 장로급 뱀파이어는 더할 나위 없는 본보기이기도 했다.

그들 가문과 맺은 약속을 깨트린 자들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가르쳐주는.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정적 끝에 침묵하고 있던 롤랑 경이 입을 열었다.

“「공허의 자세(Void Stance)」.”

과거 검의 성자라 불렸으며, 이제는 검성이 아니라 검마의 이름을 손에 넣은 피의 기사가.

“─.”

검마 롤랑이 읊조린 직후, 시엔이 딛고 있는 대지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위화감이 엄습했다.

“도가 없는 자가 도를 논하는 법이랬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 속에서 롤랑 경이 말했다.

“그대의 말이 맞았다, 시엔 나이트워커.”

남자에게 처음부터 기사의 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남자는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기사의 도를 추구했고, 그럼에도 그의 마음이 충족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대륙에서 가장 고결하고 긍지 높은 기사가 되어서도 남자는 여전히 공허했다.

“처음부터 나에게 논해야 할 도(道)나 지켜야 할 가치 따위는 무엇 하나 존재하지 않았으니.”

“생각보다 귀가 얇으시네.”

텅 비어 있는 남자의 눈동자를 보며 시엔이 조소했다.

“없는 자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지?”

“─.”

“믿음을 갖고 별에 닿는 것.”

마치 자신의 주장을, 필요와 입장에 따라 손바닥처럼 뒤집는 박쥐처럼.

“불가능에 가까운 꿈을 꾸고, 무적의 적수를 이기기 위해 자신을 갈고닦으며, 진실로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이상을 추구하는 것.”

일찍이 로젤리아 샤를이 조롱했던 기사도의 정신을 입에 담으며 시엔이 말했다.

“듣기에 아름다운 삶을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인간의 찬가(讚歌)가, 너에게는 그토록 무가치했던 것이었나?”

그 말에 비로소 롤랑 경이 눈을 끔벅거렸다.

순간, 처음으로 롤랑은 진심에서 우러나온 목소리로 부정하려 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마음 그 자체는 결코 거짓도 무엇도 아님을.

오히려 자신에게 없는 까닭에, 그것이 무엇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까닭에 손에 넣고자 하려는 것임을.

부정하려다 말고 깨달았다.

어느덧 자신이, 인간의 찬가를 논할 자격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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