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45화 (145/200)

145화. 밤과 피의 왕국 (4)

“없는 자가 자신에게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도 잘못된 일이지?”

없는 자가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아니, 자신에게 없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자신에게 없는 찬란히 빛나고 아름다운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나아가는 여정.

그것이야말로 곧 인간의 찬가였고, 롤랑이 꿈꿨던 기사의 도였다.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이상 인간을 논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버렸다.

“…….”

처음으로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롤랑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자신은 텅 비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롤랑의 인생은, 텅 비어버린 공허한 존재임에도 그 공허를 채우기 위해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는 가치와 이상을 추구해온 ‘인간의 삶’이었다.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공허한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을 향해 나아가는 자신의 삶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고결한 기사 그 자체였다.

일평생 그가 느꼈던 방황과 고뇌에 해답이 주어진 순간, 깨달았다.

지금의 자신은 더 이상 그런 인간의 가치와 기사의 도를 논할 자격이 없는 괴물이 되었다는 것을.

“……시엔 나이트워커.”

처음으로 롤랑의 가슴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증오였다.

“모두 네놈들의 짓이다.”

샤를마뉴 왕국과 칠왕국 사이의 끝없는 전쟁 속에서 이득을 챙기고, 두 나라의 전쟁을 지지부진하게 이어가며 끝없는 피를 흘리게 한 끝에, 그들 모두가 기꺼이 인간의 섭리마저 저버린 파국.

이 모든 파국의 시작과 끝에는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이 있었다.

“너희는…… 악(惡)이다.”

롤랑 경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절대 용서받을 수도 없고, 존재해서도 아니 되는 이 세상 모든 악.”

“그럴지도 모르지요.”

시엔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맞는 말이었다.

시엔이 그랬고 그들 나이트워커 가문의 인간 역시 악이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커다란 악.

뱀파이어가 된 롤랑 경의 칼끝은, 그 어느 때보다 고결하게 신념과 의에 빛나는 기사의 긍지를 머금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사의 긍지를 걸고, 나는 네놈을 쓰러뜨릴 것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남자는 여전히 기사였다.

인간 찬가의 의지 대신 뱀파이어의 핏빛 마력을 덧씌우고, 핏빛 서슬을 흩뿌리는 혈검을 고쳐 잡고서.

더 이상 대륙 최강의 기사, 롤랑 경에게 오러의 힘을 쓸 방법도 인간의 찬가를 부르짖을 방법도 없다. 그는 인간이 아니니까.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다.

소중함을 결정 짓는 것은 결코 그것을 소유했느냐 아니냐의 여부 따위가 아니다.

그저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느냐의 여부일 따름이다.

없어졌다고 해서 절망할 이유 따위는 없다.

인간이 아니라면, 다시 인간을 바랄 뿐이다.

기사가 아니게 되었다면, 다시 기사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불가능한 이상을 꿈꾸고 별에 닿는 것.

이 순간, 롤랑 경은 진정한 기사였다.

“기사의 자세(Knight Stance).”

그렇기에 나지막이 읊조리는 그의 기세에, 시엔 역시 숨을 삼켰다.

‘……공기가 달라졌다.’

직감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사소한 도발이었다. 그런데 도발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그의 마음에 존재하는 잡념을 없애고 ‘새로운 경지’를 열어젖히는 계기가 되었다.

‘설마 이런 실수를.’

상대를 너무 얕잡아본 것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다.

“「악인의 자세」.”

그의 말마따나 시엔은 악이었다. 그리고 악은 바라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기사와 악인이 격돌했다.

*  *  *

쿠웅, 쿵!

내리꽂히는 대포 세례 앞에서 왕도의 성벽이 허물어졌다. 그 어떤 역사 속에서도 함락되지 않았던 3중의 성벽이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 순간,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악마의 군세, 레드 코트.

그 군세를 거느린 왕이 최전선에서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그를 보필하고 있는 원탁의 기사단과 함께.

그리고 왕의 길, 왕도(王道)를 가로막는 존재들이 있었다.

“……왕의 앞에 서지 마라.”

그들이 숭상했던 기사의 도와 인간의 섭리를 저버린 샤를마뉴 왕국의 열두 기사.

정작 그들을 이끌어야 할 롤랑 경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장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검고 어두운 드레스 차림의 공주가 그곳에 있었다.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지혜롭고 아름다운 공주, 로젤리아 샤를.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로젤리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동시에 그녀를 휘감고 있던, 검고 어두운 드레스라 생각했던 것이 활짝 펼쳐졌다.

그것은 날개였다.

마치 실크처럼 아름답고 우아하게 나부끼는 칠흑의 날개.

마치 우화(羽化) 끝에 날개를 활짝 펼친 나비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열두 장의 날개였다.

“저는 이 나라의 왕족이자 여왕으로, 왕국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답니다.”

밤과 피의 왕국을 이끄는 새로운 여왕.

왕의 앞을 가로막는 로젤리아 역시, 이제는 새로운 왕이었다.

“하찮구나.”

그 말에 아서왕이 코웃음을 흘린다.

“정작 지켜야 할 나라와 백성들이 이런 꼴이 되어버린 와중에도, 그 입을 잘난 듯 지껄이는 꼴이.”

“나라가 무엇이죠?”

아서왕의 조롱에 여왕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 되물었다.

“나라는 곧 백성이다.”

아서왕이 말했다.

“백성 없이 나라는 존재할 수 없고, 그런 까닭에 백성은 왕의 하늘이다.”

남자는 왕이었다.

“동시에 왕은 하늘을 우러르며, 등 뒤의 백성들이 나아갈 길을 열어줄 의무가 있다.”

그것이 바로 왕도(王道).

때로는 지혜롭고 때로는 잔혹하며 때로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광포함마저 가진 그 왕에게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신념이 있었다.

칠왕국이라 불리는 비좁은 군도에 갇혀 있는 백성들을, 이 비옥하고 광활하기 그지없는 땅으로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것.

등 뒤의 백성들을 위해, 그 누구도 나아가지 못한 이 길을 가장 앞서 개척하는 것.

그것이 왕 아서가 믿고 나아가는 왕의 길이었다.

스릉.

아서왕이 자신의 신기, 엑스칼리버를 뽑는다.

그가 몸에 휘감고 있는 일곱 신기 중 하나이자 아서왕을 상징하는 최강의 신기급 명검.

“백성이 나라인가요?”

금빛의 서슬을 빛내는 엑스칼리버 앞에서, 여왕이 되물었다.

“그럼 백성들이 죽으면 그걸로 나라가 사라지는 것인가요?”

“백성 없이는 나라도 없다.”

“아뇨, 틀렸답니다.”

로젤리아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백성은 한순간도 ‘국가’였던 적이 없습니다.”

“그럼 네가 생각하는 국가는 뭐지?”

“신기루.”

실체 없는 무언가.

“만인(萬人)의 눈에 똑같이 비치는 신기루죠.”

로젤리아가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데도 그곳에 ‘샤를마뉴 왕국’이 존재하고 있다 믿어 의심치 않고, 없는데도 있다고 생각하고, 보이지 않는데도 보고 있다고 모두가 공유하는 신기루지요.”

“하찮은 논리로군.”

“설령 수도가 불타고 백성들이 죽어도, 만인의 눈에 여전히 똑같은 신기루가 비치고 있는 이상…… 나라는 사라지지 않는답니다.”

로젤리아 샤를은 여전히 나라를 사랑하는 여왕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사랑하는 나라 속에, 백성이 들어갈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가 백성에게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신기루를 믿어줄 ‘눈동자’뿐이었다.

“왕도, 귀족도 예외가 아니랍니다.”

그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오직, 만인의 눈에 ‘국가란 이름의 신기루’가 공유될 때 비로소 성립하는 법이지요.”

국가는 만인의 믿음 속에서 존재한다.

다시 말해, 국가는 곧 만인의 믿음이다.

“만인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수도나 백성들의 희생 같은 것은 ‘아주 사소한 희생’에 불과하죠.”

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왕이었다.

하지만 여왕은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는 것은 ‘나라란 개념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녀는 사랑하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람들에게 그곳에 ‘샤를마뉴 왕국’이 있다는 신기루를 믿게 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왕의 자세(King Stance)」.”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비좁은 섬 속에 남겨진 백성들을 위해, 그는 왕으로서 길을 열어줄 의무가 있었다.

그 길, 왕도를 열기 위해 남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후우웅!

자세를 입에 담자마자, 성검 엑스칼리버가 그 어떤 금빛보다도 찬란한 휘광을 머금고 빛나기 시작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보다도 찬란하게 빛나는 인간의 찬가, 오러 블레이드.

등 뒤에 남겨진 칠왕국의 백성, 그들 모두의 의지를 짊어진 왕의 무게가 실린 검.

“「왕의 자세(Queen Stance)」.”

그 결의에 맞서 로젤리아 샤를이 자세를 읊조렸다.

아서왕의 그것과 똑같은 자세의 이름을.

자세라고 해도, 알기 쉬운 검식(劍式) 같은 게 아니다. 그녀는 더 이상 인간 찬가의 의지를 쓸 수 없는 뱀파이어가 되어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다.

“왕이란, 만인의 앞에서 ‘그곳에 나라가 있다고’ 믿게 하는 자.”

모두의 눈에 ‘국가’라는 이름의 신기루와 환상을 보여주는 자.

“그렇기에 저는 모두의 앞에서, 바로 이곳, 이 자리에 ‘샤를마뉴 왕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겠습니다.”

왕에게 필요한 덕목은 그것을 가능케 할 힘이다.

그것이 그녀가 생각하는 국가이자 국가의 ‘본질’이었으며, 그녀는 기꺼이 그 본질이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름이 같다고 해도 그들이 추구하는 왕도는 같지 않다.

아서왕이 엑스칼리버를 고쳐 잡았고, 로젤리아가 등 뒤로 실크의 옷자락처럼 펼쳐진 열두 장의 흑익(黑翼)을 무기처럼 삼는다.

저마다의 신념을 가진 두 명의 왕이 격돌했다.

*  *  *

“그대들은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맺어진 약속을 깨트렸답니다.”

과거 그들 뱀파이어 클랜의 ‘규칙의 대행자’로 활약했고, 이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온 라일라가 말했다.

일말의 감정도 없는 차가운 목소리로.

“……우리는 천 년을 넘게 살아왔다.”

그런 암살자들의 어머니를 향해 장로급 뱀파이어, 익수공 랜필드가 대답했다.

“네놈들 가문의 하루살이처럼 덧없는 역사 따위로 우리 ‘혈족’을 헤아리지 마라, 어린 것아.”

“신뢰를 지키지 않는 천년은, 신뢰를 지키는 백년의 역사보다 짧고 무가치한 것이지요.”

라일라가 차가운 목소리로 조소했다.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쌓아 올린 우리의 신뢰는,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가치랍니다.”

눈앞의 상대, 익수공 랜필드는 천년공이나 미망공 같은 수준의 엘더 원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그럼에도 뱀파이어 클랜의 역사 속에서는, 그들에게 준하는 삶을 살아온 최고위 장로의 일각이기도 했다.

그들 모두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 그게 나이트워커 가문의 신뢰를 모욕하고 깨트린 이들의 말로니까.

“당신은 오늘, 이 자리에서 죽습니다.”

라일라가 말했다.

나이트워커 가문의 블랙리스트 중 가장 처음으로 줄이 그어질 상대를 향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