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46화 (146/200)

146화. 밤과 피의 왕국 (5)

암살자와 기사, 악인(惡人)과 고결한 흡혈귀의 칼날이 맞부딪쳤다.

카앙!

마치 재로 잰 것처럼 일말의 오차도 없는, 머리의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리꽂히는 90도의 수직 베기.

일말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세로─.

검성 롤랑이 자랑하는 무결검이 은빛 섬광을 내뿜으며 휘둘러진다.

그에 맞서 시엔이 왕 시해자를 맞받아치자, 일말의 오점도, 흐트러짐도 없는 롤랑의 세계에 ‘어긋남’이 발생했다.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검을 구사하는 롤랑에게 그 어긋남을 알아차리는 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배제할 따름이다.

엇갈린 각도와 기울기, 무결해야 할 롤랑의 세계를 더럽히는 시엔의 ‘흠결’을 수정하기 위해서.

베기 찌르기 막기의 3요소로 이루어진 검의 정수.

“《무결의 세계(Innocent World)》.”

롤랑 경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검성 롤랑이 일평생에 걸쳐 기사의 도를 좇아 쌓아 올린 깨달음의 결정체.

일말의 오차도 기울어짐도 없는 검을 구사하는 그의 영역 속에서, 시엔의 검은 그저 배제되어야 할 흠결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역 속에서는, 설령 티끌 같은 비틀림이라 할지라도 절대 롤랑의 눈을 속일 수 없다. 무결함을 해치고 더럽히는 그 무엇도 허락되지 않는다.

‘함부로 다가갈 수 없다.’

뱀파이어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아니, 오히려 롤랑의 경지는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하고 정교해졌다.

바로 그때였다.

“…….”

일순, 시엔의 눈동자에서 피가 흘러나온다.

초점을 잃은 청백색의 눈동자, 신기 묠니르의 힘을 통해 일대의 전기적 작용을 감지하는 시엔의 뇌에 과부하가 걸린 탓이다.

그 정도로…… 기사 롤랑의 존재가 뿜어내는 ‘정보’는 압도적이었다.

시엔의 뇌가 전부 받아들이지 못하고 출혈을 일으킬 정도의 터무니없는 정보량.

고작 세 개의 동작밖에 존재하지 않을 그의 자세는, 지금까지 시엔이 본 그 어떤 검술보다도 터무니없는 심연의 깊이를 머금고 있었다.

당대 제일의 기사라 일컬어지는 검성 롤랑의 전력이자 그가 가진 경지의 깊이.

어느새 청백색으로 초점을 잃고 있던 시엔의 뇌안이, 어느덧 인간다운 빛을 되찾는다.

‘묠니르로 상대의 사고를 탐색하기에는 부하가 크다.’

자세를 다잡은 시엔이 쇄도하는 롤랑의 가로 베기를 튕겨내고, 곧장 거리를 벌린다.

촤아악!

튕겨내고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은빛의 섬광이 휘몰아쳤다.

깨닫고 보니, 시엔의 어깻죽지를 따라 혈선이 휘감겨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일말의 오차도 없는 90도 수평의 내려 베기.

‘강하다.’

말 그대로 완전무결에 가까운 강함.

저것이 바로 당대의 최강자 중 하나로 손꼽히는 검의 성자, 롤랑 드 뒤랑달 경.

인간을 저버린 채 괴물이 되었다는 죄책감조차 그의 존재를 흔들 수 없다.

“악즉참(惡卽斬).”

기사 롤랑이 땅을 박찼다.

그곳에 있는 구역질 나는 악을 베기 위해서. 기사로서 그가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이자 그의 기사도를 이행하기 위해서.

시엔 나이트워커는 악이었다.

동시에 악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손에 넣고자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

설령 상대가 그 어떤 완전무결한 기사라도, 인간의 섭리를 벗어나 있는 뱀파이어라도 마찬가지다.

망령과 명경지수, 가시나무와 나락.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조차 뛰어넘어 네 개의 검식을 통달하고 ‘콰트로 마스터’가 된 자신의 경지를 헤아린다.

나아가 자신의 본질을 되새겼다.

자신은 사람을 죽이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다.

시엔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누군가의 전부를 빼앗기 위해 갈고닦은 살인의 기술이다.

오늘 이 자리에서, 검성 롤랑은 죽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롤랑이 자랑하는 완전무결의 검이자 무결의 세계를 뚫고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롤랑의 완전함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를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해답은 하나뿐이다.

그보다 더 검사(劍士)로서 완전해지는 것.

암살자와 기사, 이러니저러니 귀천을 따진들 본질적으로 그들은 모두 날붙이로 사람을 찌르고 베서 죽이는 기술을 업으로 삼는 자들이다.

검의 완전함이란 얼마나 각도가 정교하고 오차가 없느냐 따위가 아니라, 얼마나 확실하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시엔이 검을 고쳐 잡고 지금껏 쌓아 올린 완전함을 헤아렸다.

“영야(永夜).”

끝나지 않는 밤.

나지막이 읊조리는 순간, 시엔 일대의 시간이 빠르게 가속하기 시작했다.

등 뒤로 더없이 검고 어두운 밤을 거느린 채.

다시금 두 눈으로 눈앞에 있는 무결의 기사를 직시했다.

뇌신의 눈이 아니라, 인간의 두 눈동자로.

롤랑이란 남자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 기사로 그가 쌓아 올린 신념, 그 전부를 똑바로 직시했다.

그것을 부정할 생각 따위는 없다. 오히려 이 순간, 시엔은 그 어느 때보다도 눈앞에 있는 남자를 존중하며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이, 남들의 소중한 것보다 더 소중했던 까닭에.

타앗!

다시금 거리가 좁혀졌다.

검성 롤랑이 자랑하는 무결의 세계 속에, 시엔이라고 불리는 용납받을 수 없는 흠결이 침입했다.

순백의 세계 속에서 칠흑의 미스릴 칼날 ‘왕 시해자’가 검궤(劍軌)를 그렸고,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진 완전의 세계에 끝없는 어긋남과 비틀림을 자아냈다.

롤랑 경이 긋는 올곧음의 검에 맞서 시엔의 어긋나 있고 뒤틀린 검이 쇄도했다.

카앙!

흐트러짐 없이 일필(一筆)의 붓처럼 나아가는 롤랑의 검의 앞에서, 그릇되고 이지러진 시엔의 검이 맞부딪쳤다.

촤아악!

기사와 암살자의 두 자루 검이, 서로를 베고 베이며 끝없는 혈선을 새겨넣고 있다.

올바르기에 베이는 것이 아니다. 그릇되었기에 베는 것도 아니다. 정의로워서 베는 것도 아니다. 악해서 베이는 것도 아니다.

그저 더 검을 잘 쓰는 자가 베고, 검을 못 쓰는 자가 베일 따름이다.

대륙 제일의 검객(劍客)으로 거듭나 있는 두 사람의 결투를 결정 짓는 것은 신념도 정의도 아니다.

어느 쪽이 더 검으로 사람을 잘 죽이냐 하는 기술의 차이였다.

그리고 시엔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재능이었다.

촤악!

이지러진 검이 직교(直交)로 이루어진 무결의 세계에 파고들며 그 질서를 깨트린다.

살을 베고 피부를 찢고 칼끝이 내장 깊숙이 박히는 소리가 났다.

“내 검식의 맹점을…… 깨달았나.”

롤랑 경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왈칵, 피가 쏟아져 내렸다.

“당신의 세계는 처음부터 무결하지 않았어.”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마치 도가 없는 자가 도를 부르짖는 것처럼.”

“묻겠다, 나를 쓰러뜨린 검객이여.”

무너지는 자세 속에서 롤랑이 물었다.

“도가 없는 자가 도를 논하는 법이라 했나.”

“그래.”

시엔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대의 말이 옳다, 시엔 나이트워커.”

롤랑 역시 담담하게 말을 잇는다.

“닿을 수 없는 별을 향해 나아가는 것은 도가 아니다.”

“…….”

“자신에게 없는 무엇을 바라고 부르짖는 것도 도가 아니다.”

“그럼 도(道)는 무엇이지?”

“절대로 닿을 수 없는 별이란 사실을 알고도,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별을 향해 나아가는 것.”

롤랑이 대답했다. 그 말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기사는 겁쟁이다. 그렇기에 용기 없는 겁쟁이는 더더욱 용기를 알기 위해 ‘기사의 길’을 걷는다.”

“…….”

“기사가 아닌 자가, 기사가 되기 위한 길(騎士道)을 나아가며 진정한 기사로 거듭나는 것.”

여전히 이 남자는 뼛속까지 기사였다. 당장 피의 세례를 받고 나서 얼마든지 뱀파이어의 능력이나 혈마법 따위를 쓸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기사도가 아닌가.”

도는 도달해야 할 하나의 목적지가 아니라 나아가는 길 그 자체다.

그리고 별을 향해 나아가는 남자는, 바로 이곳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렇기에 시엔이 대답했다.

“그대는 별에 닿았다, 롤랑 경.”

─그곳에 있는 별과 단검의 주인 앞에서.

하나의 시대정신이 저물어가는 끝자락에서, 이 시대에 남겨진 최후의 기사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시엔 역시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예를 표했다.

*  *  *

휘몰아치는 박쥐 세례 속에서 죽음의 실이 춤을 춘다.

상대에게 경의를 표하지도, 존중을 표하는 일도 없다.

그저 별과 단검의 이름을 모욕하고 신뢰를 깨트린 상대에게, 그들이 마땅히 맞이해야 할 최후를 알려준다.

“이 괴물……!”

몸이 수백 마리의 박쥐로 화하며 흩어지는 와중에도, 익수공 랜필드가 경악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 확실히 그렇지요.”

라일라 역시 상처가 적지 않다. 그러나 그 정도 상처로는 결코 그녀의 여유를 깨트릴 수 없다.

무엇보다 아무리 그녀가 시엔의 경지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고 고해(告解)했다고 하나, 그것이 꼭 그녀가 ‘시엔보다 약하다’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녀가 쌓아 올린 세 가지 검식의 무게는, 지금 시엔이 마스터하고 쌓아 올린 네 검식의 무게 그 이상으로 무겁고 깊이 있는 것이었다.

“외눈박이 나라에서는 두 눈 달린 사람이 괴물이듯…….”

경지를 확장하는 것, 이미 배운 경지를 더욱 탐구해 깊이를 늘리는 것, 그 두 가지는 엄밀히 말해 별개의 영역이다.

“이곳 ‘흡혈귀의 나라’에서는 인간이야말로 괴물이지요.”

“인간이라고?”

전신이 수백 마리의 박쥐로 흩어진 순간, 사방에서 휘몰아치는 거미줄에 갈가리 찢어진 박쥐 시체들. 그나마 남아 있는 박쥐들이, 가까스로 사람의 형상을 이루며 힘겹게 말을 잇는다.

“그 모습을 갖고도…… 설마 아직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곳에서 그녀,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보여주는 진짜 모습에 경악하며.

“물론이죠.”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그곳에 있는 악마의 군세, 흡혈귀의 군세, 저마다의 형태로 섭리를 벗어나 있는 존재들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인외(人外)의 형상을 하고서.

“저는 여전히 인간이랍니다.”

또 하나의 결계와 전장 속에서 싸우는 그녀의 아들, 시엔이 그렇게 믿어주듯이.

“가족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는 인간이죠.”

“괴물…….”

촤아악!

말을 그칠 틈도 없었다.

어디선가 솟은 칠흑의 촉수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랜필드의 전신을 휘감았다.

박쥐로 모습을 화해도 벗어날 수 없는 촉수들 사이에서 뱀파이어가 비명을 내질렀다.

적어도 흡혈귀의 나라에서는 ‘정상’이어야 할 존재가, 눈앞에 있는 혐오스럽기 이를 데 없는 괴물 앞에서 절망하며.

*  *  *

인간들의 전투는 끝이 났다.

그러나 악마의 군세와 흡혈귀의 전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촤아악!

실크처럼 로젤리아를 휘감고 있는 12장의 흑익이, 나비처럼 크게 날갯짓하며 비늘 가루를 흩뿌린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아서왕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설마 그 여자가…….’

최초의 뱀파이어이자 피의 어머니, 요정왕 멀린조차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삶을 살아온 진조.

미망공(Lord Widow) 스칼렛의 피가, 로젤리아 샬롯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아니, 그냥 흐르는 정도가 아니다.

“왕이란 만인 앞에 똑같은 신기루를 보여주는 자.”

진조의 피와 실크처럼 검고 부드러운 날개를 휘감고, 로젤리아가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우리는 ‘좋은 한 쌍’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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