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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가문의 천재 어쌔신-147화 (147/200)

147화. 밤과 피의 왕국 (6)

“아무래도 우리는 ‘좋은 한 쌍’이 될 것 같네요.”

마치 나비가 활짝 날갯짓하는 것처럼, 로젤리아의 흑익이 우아하게 펼쳐진다.

“좋은 한 쌍이라고?”

로젤리아의 말에 아서왕이 차가운 조소를 내뱉었다.

“그렇답니다.”

실크처럼 검고 부드러운 열두 장의 날개를 펼친 밤과 피의 여왕이 대답했다.

“비록 뜻은 달라도, 우리는 저마다의 이유로 ‘소중한 나라’를 지키는 애국자들이 아닌가요.”

비록 그들이 생각하는 나라의 정의나 형태는 다를지언정, 그들에게는 나라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들은 나라를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서왕이 전쟁의 악마와 계약을 맺고 자신을 희생했듯이.

로젤리아가 뱀파이어 클랜에게 자신과 수도의 백성 전체를 바치고 혈족의 총아(寵兒)로 거듭났듯이.

“당신과 저의 군세를 보세요. 우리가 손을 잡는다면 이 대륙 전체를 손에 넣는 것도 불가능이 아니랍니다.”

“…….”

악마와 뱀파이어의 군세. 섭리를 벗어난 존재들이 힘을 합쳐 하나가 될 경우, 그 세력은 감히 제국이나 공화국조차 압도할 제3의 무엇이 될 것이다.

짧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납득할 수 없는 제의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로젤리아의 제의는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제의였다.

“왕의 길을 막지 마라, 계집.”

그럼에도 아서왕은 대답했다.

일말의 흔들림도 미혹도 없는 목소리로, 너무나도 단호하게.

“백성은 왕의 하늘이며, 왕은 백성에게 창천(蒼天)을 보여주는 자.”

그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왕의 목소리였다.

“자기 손으로 기꺼이 하늘을 더럽히는 네놈 따위는, 왕의 자격이 없다.”

“아, 그것참.”

그 말에 로젤리아가 즐거운 듯이 키득거렸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키득거리고 나서는, 웃음 속에 숨겨진 서늘한 적의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기사도니 왕도(王道)니, 덜떨어지고 멍청한 가치관에 사로잡혀─ 코끼리 앞의 장님처럼 아는 척 으스대는 꼴이라니.”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는 도를 알지 못했다. 도가 없다고 해서 도를 부르짖는 일조차 없었다.

두 명의 왕이 격돌했다.

쿠웅!

왕의 자세, 아서왕의 손에 들린 신기 엑스칼리버가 휘둘러졌다.

어떤 기교도 기술도 없다. 애초에 저것을 자세라고 불러야 할지, 심지어 검술이라 불러야 할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순수한 폭력의 화신이 있었다.

마치 폭풍이 휘몰아치고 지진이 나며 대지가 찢어져 비명을 지르듯이.

사람이 아니라, 마치 이 세계를 부수는 것 같은 압도적 파괴.

검이 휘둘러질 때마다 화산이 폭발하고 태풍이 휘몰아치듯, 대지와 하늘이 비명을 내질렀다.

콰앙!

무차별적으로, 마치 신화 속의 거신이 이 세계를 짓밟고 파괴하고 유린하듯 로젤리아를 향해 휘둘러지는 파쇄의 일격.

그것이 왕이었다.

절대로 굽히지 않고, 절대로 타협하지 않고, 절대로 비굴해지지 않고, 꼿꼿이 등을 곧추세우고 올곧게 자신의 길을 나아갈 뿐.

왕의 길은, 곧 백성의 길이 된다.

그렇기에 왕은 그 누구도 자신의 앞을 막게 놔두지 않는다.

누구도 왕의 앞에 설 수 없고, 왕의 길을 막을 수 없다.

“폐하의 앞에 서지 마라.”

왕을 따르는 원탁의 기사들 역시,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게 바로 원탁(Round)의 결의였으니까.

“검을 뽑아라!”

스릉.

왕과 함께 최전선에 서는 기사들이 검을 뽑는다.

그들의 왕이 설령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게 밤과 피의 왕국을 세운 흡혈귀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는 그저 주군을 믿고 이 길을 나아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 순간, 아서왕이 거느린 악마의 군세 ‘레드 코트’는 침묵하고 있다. 여기는 그들이 끼어들 전장이 아니었다.

“폐하를 위해 싸워라!”

그저 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검을 뽑았고, 마찬가지로 로젤리아와 샤를마뉴의 12기사들이 검을 뽑았다.

하나같이 시체처럼 창백한 잿빛 피부에 서슬 퍼런 송곳니를 가진 뱀파이어들이 되어서.

왕의 격돌에 이어 최강의 기사 조직이 격돌했다.

그들이 섬기는 각자의 ‘폐하’를 위해서.

더 이상 후퇴는 없다. 다음도 없다.

여기는 기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원탁의 기사단과 샤를마뉴의 12기사가 일제히 격돌했고, 검이 맞부딪치고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 역시 그곳에 있었다.

왕들의 싸움.

“「올 포 원(All for One)」.”

왕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하나를 위하는 모두.

후우웅!

그 중얼거림과 함께, 아서왕의 몸에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오러를 까마득히 뛰어넘는 격랑(激浪)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아, 참으로 우스꽝스럽네요.”

그 모습을 보며 로젤리아가 차갑게 조소했다.

나비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운 열두 장의 흑익에 몸을 감싼 채, 그 밑에서 시퍼런 서슬을 흩뿌리는 혈조를 감추고.

“백성은 왕의 하늘이니 어쩌니 하더니, 결국 그 모두가 당신 하나를 위해 존재하는 힘에 불과하다니.”

그 모순이 우스워서 참을 수 없다는 듯.

“그렇다.”

아서왕 역시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짐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다.”

올 포 원(모두는 하나를 위해).

동시에 아서왕이 말을 잇는다.

“하나는 모두를 위해(One for All).”

“!”

이 나라의 백성들은 모두 왕을 위해 존재하는 힘이다.

아울러 왕의 힘은, 바로 그 백성들 모두를 위해 존재하는 힘이기도 했다.

“국가란 ‘만인의 눈에 비치는 신기루’라고 했나?”

아서왕이 담담하게 되물었다.

“그럼 이 순간, 짐과 함께하고 있는 이 백성들의 의지는 무엇이지?”

그저 많은 오러가 휘몰아치는 게 아니다. 아니, 저것은 오러라 부를 수 있는 성질조차 아니었다.

이역만리 떨어진 저 비좁은 섬나라, 칠왕국 군도에 있는 백성의 염원(念願)이─ 왕을 향해 휘감기고 있었다.

알기 쉬운 신기루 따위가 아니다.

“보아라, 이것이 나라다.”

두 눈으로 똑똑히 볼 수 있는 ‘나라의 형태’가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왕은 나라를 짊어지는 자다.”

헤아릴 수 없는 백성들의 무게를 짊어진 채 나아가며, 그들에게 푸른 하늘을 열어주는 자.

범인(凡人)은 단 1초도 못 버티고 산산이 조각날 무게를, 눈썹 하나 바뀌지 않고 담담히 짊어지고 있는 자.

그것이 왕이다.

“왕의 앞에…… 서지 마라.”

누구도 왕의 앞에 설 수 없다. 왕의 길을 막을 수 없다.

칠왕국 군도에 사는 백성 전체의 의지를 짊어지고 힘으로 승화시켜, 마치 하늘을 떠받치는 신화 속 거신(巨身)처럼 압도적 위압감을 내뿜으며.

왕이 걸음을 옮겼다.

그때마다 거리가 좁혀지고, 그를 마주하는 로젤리아의 표정에 처음으로 동요의 빛이 내려앉았다.

쿠웅!

그 상태로 아서왕이 있는 힘껏 손에 들린 물푸레나무 창, 롱고미아니드를 투창(投槍)했다.

두 어깨에 나라 전체를 짊어진 거인의 일격.

그 일격 앞에서 처음으로 로젤리아의 표정이 사색으로 얼어붙었다.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 불멸의 삶을 약속받은 존재에게 너무나도 인간적인 ‘죽음의 공포’가 느껴졌다.

“로젤리아 폐하!”

바로 그때, 그림자가 땅을 박차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다.

“─아.”

무심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렇다 할 감정의 기복이나 동요도 없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목소리.

“폐하…….”

“테레지아 경……?”

샤를마뉴의 12기사, 테레지아 경이 그곳에 있었다.

로젤리아를 대신해 아서왕의 물푸레나무 창에 목젖이 꿰뚫린 채.

“수도를 버리고…… 물러, 나십시오.”

테레지아 경이 말했다. 목젖이 꿰뚫려서 제대로 말을 잇는 것조차 어려울 상황에서, 입에서 피거품을 왈칵 내뿜으며.

“클랜과 함께, 새로운 군세를 거느리고…… 랭스로 후퇴해 훗날을 도모……하십시오.”

마지막까지 그녀는 자신의 주군을 위해 옳은 말을 하고 있었다.

국가란, 만인의 눈에 비치는 신기루.

그렇다면 지금 로젤리아의 앞에 있는 그녀는, 실체조차 없는 신기루를 위해 자기 몸을 내던지는 멍청이란 걸까.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 순간, 로젤리아를 구해준 것은 평소 그녀가 그토록 경멸하고 조롱해 마지않던 기사도였다.

“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미래입니다.”

그녀, 테레지아 경은 뼛속까지 기사였다. 아니, 이곳에 있는 샤를마뉴의 12기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12기사가, 원탁의 기사들 앞에서 패하고 칼끝이 투구 속으로 파고들었다. 비명이 울려 퍼졌다.

이 나라가 자랑하는 최강의 기사 조직이, 설령 뱀파이어의 힘을 손에 넣고서도,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패배하고 있었다.

“도망치십시오, 로젤리아 폐하!”

“─아.”

이길 수 없는 싸움. 그러나 그들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들의 주군을 지키기 위해서.

주군에게 충성하라.

그들은 모두 도(道)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도를 아는 자들이었다.

도는 목적지가 아니다. 말 그대로 길에 불과하다.

기사가 아닌 자가, 기사가 되기 위한 길(騎士道)을 나아가며 진정한 기사로 거듭나는 것.

아울러 여기에, 진정한 기사가 되기 위해 길을 나아가는 마지막 기사들이 있었다.

용기가 없고 비겁하며, 때로는 더 이상 인간의 찬가조차 부르짖을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는 오욕(汚辱)을 뒤집어쓰고도 여전히 기사의 도를 따르는 이들.

「마지막 기사들의 전쟁」.

로젤리아를 대신해 몸을 던진 테레지아가 명예롭게 눈을 감는다. 마지막까지 주군을 향해 충언을 아끼지 않고.

“아…….”

역설적으로 이 순간, 어리석었던 것은 로젤리아였다.

그녀는 아서왕이란 남자의 그릇을 치명적일 정도로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저 남자가 짊어진 무게는 그녀의 ‘지혜’ 따위로 이해할 수 있는 성질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녀의 뼈저린 실책, 확정적으로 그녀의 죽음을 불러와야 했을 실책 속에서─ 역설적으로 그녀를 구제해준 것은 바로 ‘기사도’였다.

“도망치십시오, 폐하.”

“세례를 마친 뱀파이어 군세를 이끌고 물러나 후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녀가 도망갈 수 있도록 저항하며 샤를마뉴의 12기사들이 죽어가고 있다.

평소 그녀가 조롱해 마지않은 기사도를 부르짖으며.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차 있는 머저리들. 그 구역질이 날 것 같은 시대착오의 산물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이 순간, 그들이 추구하는 도(道)는 너무나도 찬란하고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공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명예롭게 죽음을 맞는 기사도 문학 속의 주인공들처럼.

─깨닫고 보니 눈물이 그녀의 뺨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피로 된 눈물이었다.

“때가 되었단다, 아이야.”

바로 그때, 곁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직전까지 그곳을 압도하고 있던, 나라 전체의 의지를 짊어진 아서왕에 결코 뒤지지 않는 존재감을 내뿜으며.

─피의 어머니가 그곳에 있었다.

“지금 막, 세례를 마친 아이들이 ‘걸음마’를 떼기 시작했단다.”

그녀가 말했다.

“이 아이들의 희생은 절대 무가치해지지 않을 거란다.”

피눈물을 뒤로하고 로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그녀는 지혜로운 여왕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다소 오차가 있을지언정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이제, 밤과 피의 백성들이 눈을 뜰 때였다.

“지금으로서는 수도를 버리고 물러나자꾸나.”

“예, 어머니.”

로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물러나 후일을 도모할 때였다.

“어딜 마음대로 가려고?”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맺어진 약속은 절대적이다.

그 약속을 깨트린 자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신뢰를 이행하기 위해, 별과 단검의 문장(紋章)을 새겨넣은 두 암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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