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체사레 보르자 (1)
“아…….”
그녀가 혐오해 마지않는, 머릿속이 꽃밭으로 가득 찬 기사들이 그곳에 있었다.
레이디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던지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기사도 문학 속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지켜야 할 것을 위해 기꺼이 몸을 내던지고 있다.
그곳에 있는 괴물 같은 왕 앞에서,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무적의 적수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이 믿는 이상을 위해 장렬하게 산화하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고결한 기사 그 자체였다.
지는 꽃이기에 아름다운 것인가, 혹은 원래 아름다웠던 꽃이 자기 잘못으로 져버린 것일까.
처음으로 로젤리아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자신이 얼마나 비좁은 우물 안의 개구리였는지 뼈저릴 정도로 실감했던 까닭에.
그제야 깨닫는다.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을 비웃거나 조롱할 권리 따위는 없음을.
설령 그게 아무리 허황한 이상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꽃은 처음부터 아름다웠다. 그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하고 꺾어버린 것은 로젤리아의 두 손이었다.
꺾어버린 뒤에야, 그녀는 비로소 꽃이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그녀의 목을 옥죄었다.
나비처럼 우아한 흑색의 날개가 파르르 떨린다.
“지금은 아니란다, 아이야.”
바로 그때, 그녀의 곁에서 피의 어머니가 속삭였다.
흑색의 드레스 사이로, 금색의 양갈래 머리카락을 발밑까지 늘어뜨린 애티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미망공 스칼렛, 최초의 뱀파이어이자 클랜의 수장.
“용감한 기사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지 말자꾸나.”
그녀가 속삭였다. 마치 사랑하는 딸을 향해 충고하는 어머니처럼.
“살아남아 승리하고, 그들의 명예로운 희생이 훗날 세상 모든 음유시인의 입에서 무훈시가 되어 영원히 울려 퍼지도록 하자꾸나.”
그들은 이 나라의 기사들이 모두 동경해 마지않는 기사도 문학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로드 스칼렛은 마치 로젤리아의 마음을 훤히 꿰뚫는 것처럼, 정확하게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딜 마음대로 가시려고?”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별과 단검의 문장을 새겨넣은 암살자들.
“…….”
그녀의 어리석은 지혜로 한때나마 손을 내밀어 전략적 동맹이 될 수 있으리라 믿었던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
그들은 자신을 이해해줄 거라 믿었다. 자신의 선구안(先驅眼)을, 이 낡아빠진 시대정신 너머의 새로운 세상을 엿보는 통찰을 이해해줄 거라 믿었다.
아니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자마자 로젤리아는 직감할 수 있었다.
가장 어리석은 동시에 고결했던 기사 롤랑 경 역시, 이제는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님을.
“로드 스칼렛.”
그곳에 있는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은 우리 가문과 ‘별과 단검의 이름’으로 맺어진 약속을 깨트리고, 신뢰를 배신했습니다.”
신뢰는 나이트워커 가문이 쌓아 올린 가장 커다란 자산이다.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이 피로 쌓아 올린 절대적인 신뢰의 증거.
별과 단검의 신뢰를 위협하는 자는 절대 용납될 수 없으며, 그들과의 약속을 깨트린 자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뱀파이어라 할지라도.
“아, 그것참 무서운 이야기구나.”
로드 스칼렛이 짐짓 과장되게 몸을 떨며 웃었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도 못 할 것들을 보며 살아왔단다.”
애티 어린 소공녀의 모습 속에 감춰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심연을 머금고 있는 고대의 존재로서.
“태곳적의 밤하늘을 수놓은 오리온성좌가 불타 스러지고, 탄호이저 관문(Tannhauser Gate)이 함락당해 잿더미가 되는 순간을 목도했다.”
시엔과 나이트워커 가문조차 감히 그 정체를 추측할 수 없는, 일찍이 신화시대의 제국을 지배했던 파라오로서.
“그에 비해 헤아릴 수 없는 제국들이 태어나고 쇠락하며 스러지는 것, 새로운 강자가 태어나고 그들의 시대가 떠오르며, 시대가 저무는 것 따위는 내게 아무 감흥조차 줄 수 없느니라. 마치 하룻밤의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
피의 어머니가 조소했다.
“내가 보아 온 것들 앞에서, 너희가 부르짖는 ‘신뢰’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덧없구나.”
그 말에 시엔과 라일라 역시 망설이지 않았다.
타앗!
희고 어두운 각자의 밤을 거느린 채, 나이트워커 가문을 짊어진 두 명의 암살자가 움직였다.
“놈들이 도망치도록 놔두지 마라.”
침묵하고 있던 아서왕 역시 입을 열었다.
마침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공공의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왕의 길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줘라.”
그 말에 원탁의 기사단, 뒤이어 때를 기다리고 있던 악마의 군세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군, 진격하라.”
왕도 루테시아,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기사도의 나라 ‘샤를마뉴 왕국’의 심장을 손에 넣기 위해서.
머스킷 탄환과 대구경 대포, 벼락이 내리치는 것 같은 굉음 속에서 흑색 화약의 암연(暗煙)이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전장의 풍경.
아무리 피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나, 이제 막 걸음마를 마친 ‘아기들’이 그들 악마의 군세와 맞설 수 있을 리 없다.
바로 그때였다.
“아,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이네요.”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즐겨 입는 순백의 모피 코트 대신,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紋章)을 새겨넣은 흑발의 귀공자였다.
천년에 걸쳐 쌓아 올린 삶을 포기하고, 이제는 완전한 인간으로 거듭나 있는 남자.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교회군 총사령관, 체사레 보르자.
아울러 그가 거느린 헤아릴 수 없는 ‘천사의 군세’가, 왕도를 습격하는 악마의 군세에 맞서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제국군 놈들인가.”
그 모습을 보며 아서왕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전신을 칠흑의 미스릴로 휘감고 있는 흑갑과 흑검의 기사들을 마주하며.
“신께서 그것을 바라신다…….”
칠흑의 미스릴 갑주로 전신을 무장하고 있는 여덟 군단장들이 그곳에 있었다.
밤과 피의 왕국과 신성 로마누스 제국.
결코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그들을 묶어주는 결속 역시, 이쪽과 다르지 않았다.
공공의 적.
“아서 펜드래곤.”
신성 제국이 자랑하는 여덟 신성군단의 정점에 서는 제1신성군단, 데우스 불트를 이끄는 제1군단장.
“유혹에 눈이 멀어 악마와 계약하고 ‘양의 영혼’을 바친 이단자여.”
「로드 템플러」 콘라트 크론베르크가 입을 열었다.
“선한 목자께서 내려준 ‘자유의지’를 저버린 죄로, 네놈에게 특급 이단의 죄목을 선고하겠다.”
“자유의지라 했나?”
남자의 말에 아서왕이 코웃음을 터뜨렸다.
“양이 제 의지로 울타리 밖을 나가는 자유조차 허락되지 않는데, 어찌하여 그것을 ‘자유의지’라 말할 수 있겠나?”
“인간 따위가 목자의 뜻을 헤아리려 들지 마라.”
“짐이 곧 목자다.”
웃고 나서 아서왕이 말했다.
“짐은 짐의 의지로 내 백성들을 비좁은 군도(群島)의 울타리에서 꺼내주리라 약속했다.”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고 지옥에 떨어지는 대가를 치러서라도.
“왕의 앞에서 자유를 논하지 마라, 신의 사냥개여.”
그 말과 함께 왕의 육체가 휘광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왕국, 칠왕국 군도에 있는 백성 전체의 의지를 짊어진 상징이기도 했으며, 더 나아가 그가 무장하고 있는 일곱 신기의 출력을 최대로 끌어내는 전투 태세이기도 했다.
“「패왕의 자세」.”
어지간한 강자조차 하나를 짊어지는 것도 벅찰 신기, 그것을 무려 일곱 개나 몸에 두르고 그것도 모자라 나라 전체의 무게를 짊어진 남자가 각오를 다졌다.
동시에 그곳에 있는 원탁의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칼을 세로로 내리꽂으며 외쳤다.
“「왕을 위하여(For the King)」!”
왕을 섬기는 기사들의 충정이, 그 어느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의지의 공명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 *
“아, 이것 참.”
카앙!
시엔과 라일라가 땅을 박차는 순간, 로드 스칼렛과 더불어 그녀의 곁을 지키는 인간이 있었다.
피의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
“다시 보게 되어 기쁘네요, 돈 시엔.”
“……체사레.”
도로 인간의 섭리 속에 존재하는 필멸자가 됐다고 할지라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여전히 나이트워커 가문의 살생부에 적혀 있었으므로.
“제 발로 죽음을 재촉하러 와줘서 다행이네.”
“아, 죽음이라.”
시엔의 말에
체사레가 어깨를 으쓱이며 웃는다.
“죽음이 이토록 소름 끼치는 울림을 가진 말이었다니.”
“죽음이 두렵나?”
“두렵답니다.”
거기에 더 이상 천년을 살아온 괴물의 초상 따위는 없다.
“너무나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을 지경이지요.”
체사레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아, 인간이란 이 어찌 아름다운 생물인지.”
스릉.
그와 동시에 체사레가 허리춤의 검을 뽑았다.
얇고 가느다란 세검, 레이피어다.
그 칼에 휘감기는 순백의 서슬을 모를 시엔이 아니다.
체사레의 검 위에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간 찬가의 의지, 오러 블레이드가 덧씌워진다.
타앗!
그와 함께 체사레가 땅을 박찼다.
거리가 좁혀지고 레이피어의 칼끝이 시엔에게 내리꽂혔다.
“!”
그 칼끝에 실린 살기와 서슬 앞에서는, 시엔조차 무심코 등줄기를 훑는 소름에 몸을 피해야 했다.
‘뭐지?’
이전의 체사레와 다르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자나 깨나, 바람처럼 우리 곁을 스치는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재는 실로 덧없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
“죽음의 공포 속에서 벌벌 떨며, 하루살이 같은 찰나의 삶 속에서 별을 향해 나아가는 것.”
다시금 체사레가 거리를 좁혔고 레이피어의 칼끝이 시엔을 향해 내리꽂혔다.
그제야 비로소 그 칼에서 뿜어지는 섬뜩함의 정체를 이해할 수 있었다.
불멸의 존재, 뱀파이어였던 시절의 체사레가 필멸의 존재로 거듭나고 나서 깨달은 것.
죽음이었다.
역설적으로 죽음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죽음에 겁내는 하루살이가 됐을 때, 체사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확하게 ‘죽음의 개념’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죽음이, 체사레의 칼끝에서 새로운 자세로 거듭나 있다.
“「죽음의 자세」.”
마치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처럼, 어쩌면 시엔처럼.
확실하게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자세.
그렇기에 시엔 역시 웃음을 터뜨렸다.
여전히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날의 실수를 바로잡을 절호의 기회가 시엔의 앞에 있었다.
“체사레 보르자, 너는 이곳에서 죽는다.”
그가 펼치는 죽음의 자세는, 역설적으로 누구보다 깊이 죽음을 이해하는 존재가 되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바람과 같다.
늘 그들의 곁에 있으니.
그 바람이 어느 쪽으로 불어올지는, 결국 그들 하기 나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