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체사레 보르자 (2)
“내가 이곳에서 죽는다고?”
시엔의 말에 체사레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아니, 아니, 아니지.”
마치 우스꽝스러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킥킥대며.
“죽는 것은 너다, 시엔 나이트워커.”
체사레가 말했다.
“나는 너를 죽이기 위해 오늘 이 자리에 왔으니까.”
카앙!
터무니없는 살기가 깃든 레이피어의 칼끝이 쇄도했다. 시엔이 가까스로 ‘왕 시해자’를 휘둘러 비껴내기 무섭게─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화감의 기류가 일대에 내려앉는다.
그 의미를 헤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운명을 조작하는 힘」.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의 기류가 시엔의 숨통을 옥죄고 있었다.
마치 이 세계가 그의 죽음을 바라는 것처럼.
‘운명의 창……!’
심지어 운명의 창이 내뿜는 터무니없는 수준의 출력은, 시엔이 기억하고 있던 그것을 까마득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훨씬 더 완전해졌다.’
직감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가 가진 운명의 창이 완전해져 있음을.
‘내가 가진 창날 촉 부분을 제외하고…… 전부 손에 넣었나.’
게다가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은 그저 창의 지분(持分)이 늘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놈은 더 이상 끝없이 정체되고 멈춰 있는 불사의 존재가 아니라, 찰나의 삶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까.
“로드 스칼렛, 그녀를 부탁하죠.”
금박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사치스러운 레이피어를 고쳐 잡고 체사레가 말했다.
“맡겨두렴.”
그 말에 금발의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소공녀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죽지 말렴, 시엔.”
피와 암살자들의 어머니.
“물론이죠.”
그리고 어머니의 ‘아들들’이 서로를 마주했다.
누구도 그들의 싸움을 가로막을 수 없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들 사이의 싸움이다.
후우웅!
딛고 있는 발밑 일대가 뒤틀린다. 마치 그들 이외의 외부자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체사레와 시엔이 서로를 마주하고 있다.
‘결계 마법? 아니다.’
알기 쉬운 결계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그 이상으로 강력하고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의 힘이었다.
그 힘이 의미하는 것은 오직 하나다.
“운명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지.”
세검을 고쳐 잡고 체사레가 즐거운 듯이 말했다.
“너는 절대로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내 손에 죽을 운명이란다.”
“…….”
전능에 가까운 힘을 갖고 운명의 기류를 조작하는 최강의 신기.
그 앞에서 시엔이 보유하고 있는 일말의 지분 따위는, 당장 즉사할 것 같은 압박감을 간신히 버텨내는 방파제 정도가 고작이다.
그 상태로 거리가 좁혀졌다.
일검(一劍) 하나하나에 정확히 ‘시엔의 죽음’이 깃들어 있는 필살의 찌르기.
직감할 수 있었다. 저 검에 몸이 스치기라도 하는 순간, 시엔은 살해당할 것이다.
“나는 너의 죽음이다, 시엔 나이트워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사신이 그곳에 있었다.
인간 찬가의 의지, 오러를 전신과 검에 덧씌운 체사레의 일격을 막거나 튕겨낼 때마다 생각했다.
버겁다.
검이 스칠 때마다, 눈앞의 상대를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이 엄습했다.
그의 말마따나, 시엔 나이트워커는 이곳에서 죽을 운명이라고.
온 세상이 그렇게 바라고 속삭이는 것 같은 착각.
무심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시엔을 휘감았다.
과거로 돌아온 그날, 라일라가 내밀어준 손길을 잡았을 때.
이제는 달라질 거란 확신에 가득 차 있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감각.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자칫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이대로 고꾸라져 밑바닥을 향해 추락할 거란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외줄의 길.
‘어른이 되었구나, 시엔.’
바로 그때, 루나의 상냥하고 자애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카앙!
운명의 사신이 휘두르는 레이피어 앞에서 가시나무를 사출하며, 시엔이 자세를 다잡았다.
미래는 두려운 것이다.
두려운 미래 앞에서 고뇌하고 겁내고 절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무엇 하나 이상하지 않다.
그렇기에 시엔이 웃는다.
아무리 불안하고 무섭고 절망스러워도 달라질 것은 무엇 하나 없는 까닭에.
웃고 나서는, 그대로 체사레와 거리를 벌리고 말했다.
“가져가라, 체사레.”
아직 체사레가 완성하지 못한 운명의 창, 그 최후의 조각을 품에서 꺼내 들며.
“……무슨 속셈이지?”
그를 향해 시엔이 창날의 끄트머리를 내밀자, 체사레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설마 여기까지 와서 목숨이라도 구걸할 셈인가?”
“그럴 리가.”
시엔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 운명을 결정 짓는 것은 이깟 창날 쪼가리 따위가 아니니까.”
그저 너무나도 담담하게─ 손에 쥐고 있는 운명의 창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처음부터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었다.”
“…….”
그곳에 있는 운명의 사신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담담하게.
얼어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아, 이것 참 재미있군.”
정적 끝에 흑발의 귀공자, 체사레 보르자가 그 모습을 보고 미소 짓는다.
“그럼 기꺼이 시험해 드리지요.”
후우웅!
바닥에 떨어진 운명의 창이, 마치 염동력을 통해 조종하듯 두둥실 떠올라 체사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네놈이 정말로 자기 손으로 운명을 결정 지을 자격을 가졌는지.”
마찬가지로 체사레의 품속에 들어 있던 운명의 창이 자석처럼 이끌려 나와 하나로 합쳐진다.
─천 년 전, 신의 아들을 찔러 죽였다고 불리는 고대의 창.
소유하는 자는 자유자재로 운명을 조작하고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최강의 신기.
그 신기가 비로소 완전한 형태로 합쳐져 진짜 모습을 되찾는다.
후우웅!
그와 함께 무형의 소용돌이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일대를 집어삼켰다.
깨닫고 보니, 체사레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는 레이피어가 아니었다.
완전한 형태의 창(槍)이었다.
바로 그 창을 시험 삼아 빙글 돌리고 나서, 체사레가 땅을 박찼다.
운명을 조종하는 창,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은 가호를 내려주는 부적 따위가 아니다.
문자 그대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무기였다.
‘─.’
직전까지와 감히 비교할 수조차 없는, 말 그대로 ‘죽음의 운명’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창날.
카앙!
왕 시해자를 휘둘러 창날을 밖으로 비껴냈다고 생각해도, 깨닫고 보니 어느새 궤적을 뒤틀어 내리꽂히고 있다.
“!”
공격을 막고 비껴내고 피하는 공방의 섭리(攝理)조차 통용되지 않는다.
마땅히 창을 튕겨낼 때, 튕겨 나가야 할 궤적과 방향, 힘의 무게를 무시하고 이치를 벗어나며 재차 멋대로 시엔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다.
교회에서 말하는 천사와 악마처럼, 이 세상의 섭리와 이치를 초월해 오로지 시엔을 죽이려는 ‘운명’을 자아내는 체사레의 공세.
그럼에도 이상했다.
체사레가 가진 전능(全能)에 가까운 힘이, 이 세상의 섭리와 이치를 자유자재로 뒤트는 그 힘이, 이상할 정도로 두렵지 않았다.
딱히 신기의 능력이 약해진 게 아니다. 아니, 오히려 어느 때보다 운명의 창이 가진 힘은 강력하게 시엔의 운명을 죽음으로 이끌려 하고 있었다.
촤아악!
시엔의 ‘왕 시해자’가 체사레의 몸을 향해 혈선(血腺)을 내리그은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뭐지?’
이해할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졌다 일컬어지는 신기, 그가 천년에 걸쳐 천착해온 신기가 비로소 완성되었다.
남자는 운명의 신(神)이었다.
패색이 너무나 짙어 도무지 이길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전쟁터의 운명, 일류 암살자의 표적이 되어서 꼼짝없이 죽는 날을 기다려야 할 운명.
그 어떤 운명조차 자유자재로 극복하고 조작할 수 있는 신과 같은 전능함을 가진 존재.
그럼에도 그가 가진 신과 같은 힘 앞에서…… 눈앞의 인간은 쓰러지지 않는다.
오히려 피를 흘리는 것은 신 쪽이었다.
‘어째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운명은 극복할 수 없기에 운명이다.
한낱 인간 따위가 운명을 극복할 수 있을 리 없다.
지금의 그에게는 손짓 하나로 능히 태산을 무너뜨리고 빙하를 붕괴시키는 전능함이 존재했다.
그런데 그 전능함이, 고작 눈앞의 인간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있다니.
“나의 업적을 보라, 너희 강대하다는 자들아.”
받아들일 수 없다. 납득할 수 없다.
“그리고 절망하라.”
그가 평소 입버릇처럼 즐겨 입에 담는 오지만디아스(Ozymandias)의 구절을 읊조리며, 두 팔을 뻗는다.
태산을 무너뜨리고 태고의 빙하를 붕괴시켰던 그때처럼─ 아니, 그 이상의 전능함을 숨기지 않고 기꺼이 발휘하기 위해서.
촤악!
“커헉……!”
그와 함께 이변이 일어났다.
갑작스레 시엔의 전신을 꿰뚫고 칼날의 뼈가 솟는다.
딱히 체사레를 쓰러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엔의 몸속에서 자라는 가시나무가, 자기 멋대로 폭주를 일으키며 가지를 육종(肉腫)처럼 끝없이 증식시키고 있었다.
몸속의 장기와 급소의 위치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마구잡이로 시엔의 체내에서 폭주하며 자라는 가시나무. 칼날의 뼈가 시엔의 체내를 상처 입히고 고통을 줄 때마다, 피거품이 눈과 코와 입에서 쏟아져 내렸다.
“상처투성이의 네 몰골을 봐라, 시엔 나이트워커.”
그 모습을 보며 체사레가 차갑게 웃는다.
콰직, 콰직!
시엔의 체내에서 폭주하듯 자라나는 가시나무, 칼날의 나뭇가지에 휘감겨 베이고 찔리고 상처 입는 모습을 지켜보며.
“저항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덧없이 발버둥 치는 네 존재의 무력함을.”
“이 상처는…….”
바로 그때였다.
“네놈 따위가 조롱할 수 있는 게…….”
폭주하는 가시나무에 휘감겨 자멸하고 있는 시엔이, 나지막이 읊조린다.
“아니다.”
그리고 그 문장의 마지막 세 글자가, 체사레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같은 감각.
나이트워커 가문이 자랑하는 최속의 검식.
달그림자의 자세 ─ 《섬월(纖月)》.
끝났다는 결과부터 모든 것이 거꾸로 재생되듯, 가시나무의 칼날로 전신을 휘감고 있는 시엔의 육체가 체사레의 육체에 상처를 새겨넣었다.
“어떻게…….”
“인간이 되어서, 죽음을 이해하고 있던 너는 강했지.”
시엔이 말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벌벌 떨며, 하루살이 같은 찰나의 삶 속에서 별을 향해 나아가는 것.’
“─아.”
그 의미를 헤아리자마자 체사레의 표정에 핏기가 가신다.
어째서 시엔은 자기 손으로 체사레에게 운명의 창을 넘겨주었는가.
‘방심─.’
아니, 이것은 방심이란 말 하나로 오롯이 설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내가…… 도로 인간에게서 멀어지도록…….”
운명의 창을 완성하고 신(神)이 되었을 때, 체사레는 다시 인간을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죽음 앞에서 벌벌 떨고 두려워하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찰나.
“너는 제 발로 운명의 노예가 되기를 자처했다, 체사레.”
시엔이 말했다. 그 말에 체사레가 헛웃음을 터뜨린다.
시엔의 몸에서 솟은 칼날의 뼈에, 전신을 따라 수십, 수백 개의 혈선(血線)이 차차 내리그어지며.
“자기 손으로…… 쇠사슬을 채운 셈이었나.”
몸을 휘감고, 육체가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는 와중에 체사레가 힘없이 웃는다.
웃고 나서 말했다.
“아, 이래서 인간이란…….”
그 말을 끝으로 체사레의 존재가 허물어졌다.
전신을 휘감고 있는 혈선을 따라 수십, 수백 조각의 고깃덩어리로 찢어지고 무너져 내리며, 살과 피와 뼈의 무더기가 내려앉는다.
그리고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무너져 닳아버린 거대한 조각의 곁에는, 황량하고 외로운 모래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