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밤과 피의 여왕 (1)
“아, 이래서 인간이란…….”
그 말을 끝으로 남자가 무너져 내렸다.
일찍이 고대 제국의 황제이자 천년의 삶을 살아온 뱀파이어, 인간이자 마지막 순간에는 운명의 신(神)으로 거듭나 있던 존재.
그는 누구보다 인간다운 존재였고, 동시에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게서 먼 존재였다.
체사레의 형체가 무너져 내린 직후, 시엔 역시 무너져 내렸다.
당장에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그리고 무너져 내린 시엔의 눈앞에, 그것이 놓여 있었다.
운명의 창.
일순, 거기에 깃든 어마어마한 힘을 향해 무심코 손을 뻗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신의 아들을 찔러 죽였다고 일컬어지는 신기가, 자신을 손에 넣으라고 아우성치는 것이 느껴졌다.
신조차 죽일 수 있는 전능함이 시엔의 것이 될 거라고.
손을 뻗는 순간, 운명의 창은 기꺼이 시엔의 힘이 되어줄 것이다. 아울러 체사레가 손에 넣었던 것과 같은 터무니없는 전능함을 선사해줄 것이다.
아까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아니, 내심 시엔의 마음은 갈등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조각의 일부를 손에 넣었고, 그 힘을 이용했던 시엔이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진 신기이며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능케 해줄지.
동시에 이 힘 앞에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을 망각하고 힘에 눈이 멀어버리게 될 거란 사실 역시도.
그렇기에 시엔은 기꺼이 주인을 갈구하는 신기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침묵했다.
쩌적, 쩍.
침묵 끝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린다.
완성된 운명의 창을 따라 거북이 등딱지처럼 헤아릴 수 없는 균열이 내달린다. 이전처럼, 아니, 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세열(細裂)이 새겨지며 형태가 부서져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강대한 힘이 덧없이 흩어지는 모습.
체사레가 입에 즐겨 담는 시의 경구처럼, 그 곁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은 까닭에.
마찬가지로 운명의 창을 통해 생성된 일대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장막이 걷히고 결투의 결과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다.
“─아.”
가장 처음 목소리를 흘린 것은 미망공(未亡公)이란 이명을 가진 뱀파이어였다.
가벼운 신음과 함께, 그곳에 펼쳐진 풍경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끔벅거린다.
그럼에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체사레는 죽었고 시엔 나이트워커는 살아남았다.
시엔의 손에 체사레는 쓰러졌다.
그 사실을 깨닫자, 그녀의 눈동자에서 피로 된 눈물이 흘러나왔다.
앞서 그곳에 있던 로젤리아가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고 소중했던 누군가를 잃는 상실의 증표.
“카이사르…….”
일찍이 남자가 제국의 황제였던 시절의 진명(眞名)을 입에 담으며─.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것은, 남들의 소중한 것보다 더 소중하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타인의 전부를 빼앗을 수 있다.
“네놈 따위가…….”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증오를 흩뿌리며 살의를 드러내는 그녀 앞에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존재가 있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시엔에게는 손끝 하나 댈 수 없다는 듯, 로드 스칼렛의 앞을 가로막으며 칠흑의 드레스 자락을 흩날린다.
“시엔!”
“대부님!”
마찬가지로 누구보다 시엔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 역시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소중한 것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의 전부를 빼앗을 수 있는 악인(惡人)들이.
“나이트워커 가문…….”
그들을 향해 피의 어머니, 이제는 진실로 ‘미망공(Lord Widow)’의 이름에 걸맞은 존재가 된 그녀가 차갑게 읊조렸다.
“별과 단검의 약속을 저버린 대가는 무겁답니다, 로드 스칼렛.”
그럼에도 그녀 앞에서 결코 주눅 드는 일 없이,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앞에서는 당신 역시 예외일 수 없지요.”
어느덧 그곳에 집결해 있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들 사이에서, 남겨진 로드 스칼렛이 조소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조소하며 나지막이 읊조린다.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언젠가, 너희의 눈에서 똑같은 피눈물이 흘러내릴 것이다.”
“아, 그것참 무서운 말씀이네요.”
라일라가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로드 스칼렛은 그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어느 때보다도 얼음장처럼 차갑게 벼려진 증오를 뒤로하고, 미망공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등을 돌린 그녀를 향해─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 중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체사레는 강했다. 시엔조차 목숨을 걸어도 승산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그리고 그가 사랑했고 그를 사랑하는 그녀는, 그보다 더 강했다. 감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최초의 뱀파이어이자 피의 어머니, 미망공 스칼렛.
그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제야 비로소 라일라가 고개를 돌렸다.
─돌린 순간, 그녀의 입에서 왈칵 피가 흘러나왔다.
검고 어두운 드레스가 피범벅이 되어, 그 밑으로 고여 있는 피의 웅덩이가 혈해(血海)를 이루며.
천하의 그녀조차 승부에 쐐기를 박지 못하고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다는 듯이.
아니, 체사레 이상의 힘을 가진 그녀와 호각을 이루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라일라의 강함을 말해 주는 것이리라.
“……라일라.”
휘청거리는 그녀 곁으로, 어느덧 《웃는 남자》 요한이 다가서며 부축했다.
“저는 괜찮답니다, 오라버니.”
휘청거리는 라일라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을 하며 미소 짓는다. 그 어느 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수장이자 암살자들의 어머니로서.
요한 역시 그녀가 짊어진 무게를 이해하고 있기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부님!”
“시엔!”
뒤이어 쓰러진 시엔을 부축하며 티아와 비고가 다가온다.
“티아, 비고 형…….”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시엔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말 아껴라, 시엔.”
이윽고 여느 때처럼 밉상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단강 건너는 배에 노 젓기 싫으면 말이지.”
가시 인형, 미하일 나이트워커의 목소리였다.
그 말에 시엔은 대답하지 않고 헛웃음을 흘렸다. 헛웃음과 함께 다시금 왈칵 피거품이 쏟아졌다.
상처는 적지 않다. 그럼에도 싸움은 끝이 났다.
적어도 이 전장에서는.
* * *
나이트워커 가문과 뱀파이어 클랜 사이의 격돌에 방점이 찍혔고, 그것은 직전까지 격돌하고 있던 천사와 악마의 군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곱 왕국의 의지, 일곱 신기의 힘과 원탁의 충정(忠貞)을 짊어진 왕의 검이 휘둘러졌다.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 무거운 짐을 홀로 짊어지고 길을 나아가는 자.
콰직!
패왕(霸王)의 검이 휘둘러졌고, 그 일격을 맞받아친 제5신성군단장의 흑검이 유리처럼 덧없이 쪼개졌다.
검이 부러지고 나서는, 그대로 흑색 갑주 위를 향해 내리꽂혔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진귀하다 일컬어지는 금속, 블랙 미스릴조차 왕의 검을 막아낼 수 없었다.
투구가 부서지고 두개골이 쪼개져 뇌 조각과 뇌수가 흩뿌려졌다.
왕의 검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자의 얼굴을 둘로 가르며 척추를 부수고 배 속의 내장을 모조리 짓이겼다.
심장이 터지고 창자가 찢어지고 육체가 세로로 쪼개졌다.
왕의 앞을 가로막은 자의 최후였다.
“……조무래기 따위가.”
어느덧 왕이 거느린 악마의 군세, 레드 코트 역시 천사병을 몰아내며 수도 내부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전투는 승리했다. 신성군단의 피해는 막심했고, 심지어 군단장급 전력 두 명이 왕의 손에 살해당했다.
게다가 힘을 합쳐준 나이트워커 가문의 활약 덕분에, 가장 까다로운 적수라 생각했던 뱀파이어 클랜의 강자들 역시 봉쇄할 수 있었다.
검성 롤랑, 피의 추기경 체사레 보르자, 끝으로 미망공 스칼렛까지─.
피의 세례를 받은 여왕 로젤리아와 그녀의 백성들이 전력을 온존(溫存)하며 물러났다는 것은 다소 유감스러운 사실이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걸로 풍요로운 봄과 기사들의 나라, 샤를마뉴 왕국의 심장 ‘왕도 루테시아’는 새로운 왕과 왕국의 손에 떨어졌다.
“깃발을 올려라.”
그들 샤를마뉴 왕가를 상징하는 순백의 백합,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이 끌어내려지고 칠왕국 연방의 새로운 국기가 세워진다.
“─.”
동시에 그 어떤 무게 앞에서도 굴하지 않던 왕이, 비로소 심장을 움켜쥐는 ‘손길’에 나직이 얼굴을 찌푸렸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어지는 왕의 말에 심장을 휘감는 손길의 악력(握力)이 줄어들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샤를마뉴 왕국의 영토 대다수는 그들의 것이 아니며, 더 나아가 신성 제국이 노골적으로 샤를마뉴 왕국과 손을 잡고 그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려 할 것이다.
그렇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다.
여전히 그들 앞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걷어내고 푸른 하늘을 열어줄 때까지, 왕의 여정은 끝나지 않는다.
전쟁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 * *
칠왕국의 군세가 수도를 향해 진격할 즈음, 대머리왕 샤를과 휘하 가신들이 도망친 왕도 북동부의 도시, 랭스.
대대로 왕들의 대관식이 거행된 까닭에 ‘왕들의 도시’란 이명으로 불리는 그 도시는, 샤를마뉴 왕국에서 왕도 루테시아 다음으로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갖는 제2의 요충지였다.
그리고 그 도시에서, 새로운 대관식이 열리고 있었다.
대관식이 열린 장소이자 랭스의 상징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성모의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 대성당에서, 공교롭게도 같은 별명을 가진 ‘죽음의 성모’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야, 약속이 다르지 않소!”
그녀 앞에서 당황하며 소리치는 대머리왕 샤를의 항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 확실히 약속했지요.”
어리석은 왕과 귀족들의 항의를 귓등으로 흘리며, 제국의 사자로 온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말했다.
“우리 신성 로마누스 제국은 샤를마뉴 왕국과 혈맹(血盟)을 맺고 예우하며, 공공의 적에 맞서 함께 싸울 것을 말이지요.”
“그, 그럼 어째서……!”
“당신이 아니라, 그녀에게 말입니다.”
성당의 실내에 어둠이 내려앉은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아아, 아아아악!”
어둠과 함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짐승의 이빨이 생살을 물어뜯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진정으로 이 나라를 다스릴 새로운 여왕과 귀족(Noble)들에게─.”
밤과 피의 왕국을 다스릴 새로운 여왕과 귀족.
어둠 속에서 대머리왕 샤를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실루엣을 보고 소리쳤다.
“로, 로, 로젤리아…… 네가 대체 무슨 짓을……!”
겁에 질려 소리치는 왕에 아랑곳하지 않고, 로젤리아 샤를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왕위를 계승하는 중이랍니다,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