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밤과 피의 여왕 (2)
시엔이 정신이 들었을 때, 그곳은 무척이나 낯익고 그리운 장소였다.
“여기는…….”
“일어났구나, 시엔.”
시엔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지켜보고 있던 루나가 고개를 돌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죠?”
“두 달이란다.”
“!”
하루, 일 분, 일 초가 아까운 시엔이다.
그런데 그날 체사레와의 부상에서 의식을 잃고 무려 두 달이란 시간이 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야말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걱정이 너무 많구나, 시엔.”
그런 시엔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루나가 읽고 있던 양장본의 책을 덮으며 쓴웃음 짓는다.
“그리 많은 것들이 달라지진 않았단다.”
“…….”
“좀 더 우리 가족을 신용해주렴.”
루나의 부드러운 제지에,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던 시엔의 움직임이 멈춘다.
멈추고 나서─ 깨닫는다.
이전까지 자연스럽게 시엔의 일부로 존재했던 무엇이, 통째로 사라져 구멍이 뻥 뚫린 듯한 공허함.
‘운명의 창?’
아니, 아니었다. 그 힘을 자기 존재의 일부와 혼동할 정도로 시엔은 어리석지 않았다.
“가시나무가…….”
그제야 깨닫는다. 시엔의 체내에 자라고 뿌리 내린 노목급의 가시나무가, 그야말로 뿌리를 드러내고 밑동을 자르는 수준으로 억제되어 있음을.
“……체사레가 행사한 운명의 창 덕분에, 네 체내의 가시나무가 폭주를 일으켰단다. 가지치기로 어쩔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지.”
그날, 체사레가 신의 전능함을 갖고 시엔에게 내린 저주. 시엔의 체내에서 칼날의 나뭇가지가 멋대로 생장하며 자신을 상처 입히고 옥죄었던 그 저주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 남자, 체사레 보르자는 시엔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흔(傷痕)을 새겨넣은 셈이었다.
“그럼 그 말씀은…….”
“그래.”
시엔의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적중했다.
“이제부터 너는, 두 번 다시 가문의 5식을 구사할 수 없는 몸이 되었단다.”
“…….”
가문의 세 가지 검식을 통달한 그랜드마스터,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시나무의 자세를 통해 손에 넣은 콰트로 마스터의 경지.
바로 그 경지가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통상의 골격 형태를 갖추고, 그 이상 골검 세포의 폭주를 억제하고 통제하는 게 고작이겠지.”
마스터급 경지의 5식을 구사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가문의 가장 기초적인 수준의 5식조차 구사할 수 없는 육체. 퇴화란 말 외에는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는 상황.
정체를 알 수 없는 무거운 손길이, 시엔의 심장을 짓누르는 것 같은 절망감이 엄습했다.
“여전히 가족들을 믿지 못하고 있구나.”
그런 시엔의 절망을 꿰뚫어 보듯, 루나가 말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아니, 내가 보기에는 그런 것 같구나.”
루나가 말했다. 여느 때의 그녀답지 않게 단정적인 목소리로.
“아무리 너라 해도, 우리 가문 전체가 짊어져야 할 상처를 홀로 오롯이 대속(代贖)할 수는 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나눌 수는 있었죠.”
“지금도 너는 지나칠 정도로 많은 상처를 나누고 있단다, 시엔.”
루나가 말했다.
“게다가 당장은 그 육체로 임무에 나가는 것도 어렵겠지.”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소식.
“당장은 저택에서 재활을 하는 걸로도 벅찰 거다.”
“…….”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체사레 보르자, 그가 신과 같은 전능한 힘을 통해 시엔에게 내린 운명의 저주는 절대로 가볍지 않았다. 설령 그 창의 존재가 이 세상에서 완전히 소멸했다고 해도, 그 흉터는 마지막까지 시엔의 발목을 잡고 괴롭힐 것이다.
‘그때…… 내가 운명의 창을 손에 쥐었다면 달랐을까.’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게 시엔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시엔은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랬어야 했다.
그 결과가 이 꼴이다.
가슴속이 텅 비어버린 것 같은 구멍을 뒤로하고,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가족을 믿는다…….”
동시에 자신이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모습을 떠올린다.
루나의 말이 맞았다. 시엔은 가족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부터, 가족을 신뢰하지 않고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는 대속자가 되려 하는 자신을 깨달았다.
“……시엔 대부님.”
티아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직후의 일이었다.
어느 때에나 일방적으로 지켜져야 할 시엔의 여동생이자 대녀, 그렇게 생각했던 티아의 모습을 보자마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두 달은 적지 않은 시간이다. 그러나 결코 많은 시간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사이 다시 본 티아의 모습은, 시엔조차 몰라볼 정도로 어엿한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가 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에 띄는 것은, 수정처럼 새파랬던 그녀의 머리카락이 시엔처럼 검고 어두운 흑발이 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흑조(Black Swan)》…….”
무심코 중얼거린다. 그러자 티아 역시 놀란 듯 되물었다.
“제 새로운 진명을…… 어떻게 아셨어요?”
하이마스터가 되고 나서 부여받는 암살자의 진명. 아마 시엔이 의식을 잃고 있는 사이, 정식으로 루나와 함께 달의 사원에서 성품성사를 마친 것이리라.
“그냥, 왠지 모르게─.”
시엔이 멋쩍은 듯 말을 흐리며 말했다.
“나라면, 그런 진명을 내려줬을 것 같거든.”
“역시 대부님이에요.”
티아가 미소 짓는다. 그 미소를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여전히 네 가족이 믿음직스럽지 못하더냐?”
곁에 있던 루나의 짓궂은 물음에 시엔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말을 삼켰다.
그녀의 말대로다. 지금의 나이트워커 가문은, 훗날 시엔이 패배하는 운명 속에서 ‘타성에 젖어 거짓된 평화에 취해 있는’ 가문이 아니다.
라일라는 그랜드마스터의 경지에서 완성된 자신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고해했으며, 당장 세례성사를 받지 못하고 죽었던 비고 형조차 누구보다 믿음직스러운 가족으로 거듭나 있었다.
미하일도 이자벨도, 나머지 하이마스터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 순간, 나이트워커 가문의 전력(戰力)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져 있다.
시엔이 달라졌듯, 달라진 것은 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여전히 그들을 믿지 못하고, 오직 자신만이 가문을 지킬 수 있다고 믿었던 오만(傲慢)이 부끄러웠다. 부끄러움과 함께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족이 있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 * *
그곳에 있는 이들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자들이었다.
누구도 아니고 바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손에.
칠왕국 연방의 손에 왕도 루테시아를 기점으로 영토 서북부 일대를 빼앗기고, 제2의 수도 랭스를 기점으로 대치하고 있는 새로운 샤를마뉴 왕국.
이전까지 그들 왕실을 상징하는 순백의 백합은 사라진 채, 핏빛처럼 붉은 백합을 상징으로 내세운 옥좌에 그녀가 앉아 있었다.
로젤리아 샤를.
그리고 그들과 새로운 혈맹으로 맺어진 신성 로마누스 제국의 핵심 전력, 태양과 쌍두까마귀의 문장을 새겨넣은 백색 코트 차림의 실루엣이 그곳에 있었다.
모노클을 쓴 정장 차림의 신사, 잭 더 리퍼.
그러나 평소의 기품 넘치던 모습과는 다르게, 노신사의 호흡이 무척이나 흐트러져 있다.
심지어 노구(老軀)로는 오롯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피투성이 상처와 함께, 왼쪽 팔 하나가 어깻죽지부터 통째로 잘려 있었다.
마찬가지로 모노클을 쓰지 않은 쪽의 눈동자 역시, 통째로 파여 있다.
아무것도 없는 검고 어두운 눈두덩이.
“……쉬운 상대는 아니었군요.”
모노클을 쓴 외눈과 외팔이의 신사가, 하나밖에 없는 팔로 쥐고 있는 지팡이를 내리꽂는다.
까마귀 부리 모양의 지팡이 끄트머리에 달린 칼날이,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몸 위로 세로로 내리꽂혔다.
그가 최후의 발악으로 자결하기 직전, 그 움직임을 깨닫고 제지하는 일격이었다.
남자에게는 ‘조니 나이트워커’란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아, 부디 곱게 죽을 생각은 하지 마시길.”
일찍이 루치아노의 대자이자, 잭 더 리퍼에게 ‘피의 복수’를 수행해야 할 의무가 주어진 가문의 암살자.
그러나 「복수자」의 이명이 무색하게 조니의 복수는 실패했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
개처럼 엎드린 채 전신을 포박당하고 그 위에 지팡이 끄트머리의 칼날이 꼬챙이처럼 세로로 꽂혀 있는, 굴욕스럽기 이를 데 없는 모습.
심지어 죽음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그들의 세계에서 ‘곱게 죽는 것’은 감히 허락될 수 없는 사치였으니까.
“잘해주었답니다, 잭.”
“가족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지요.”
“곧바로 에인션트 리그에서 새 의수와 의안(義眼)을 준비해드릴 거랍니다. 속히 치료를…….”
“아, 이 늙은이의 상처는 잠시 잊어주시길.”
잭 더 리퍼, 젠틀맨의 이명을 가진 노신사가 나직이 미소를 짓는다.
“잘린 팔과 없어진 눈동자는, 이 늙은이에게 있어 그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훈장이랍니다.”
그들 역시, 서로가 입어야 할 상처를 대신해서 짊어지고 나눌 각오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이 상처와 아픔을 조금 더 음미하고 싶군요.”
그 말을 듣고 죽음의 성모 빌헬미나가 미소 짓는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쓰러진 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암살자를 향해, 빌헬미나가 즐거운 듯 속삭였다.
옥좌에 앉아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피의 여왕 로젤리아와 그녀의 곁을 지키는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어떻게 고통을 줄지 벌써 기대가 되네요.”
즐거운 듯 속삭이는 로젤리아의 말에, 미망공 스칼렛 역시 희열의 미소로 화답했다.
“그러나 그 어떤 고통조차, 우리가 겪은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소중하고 사랑하는 것을 눈앞에서 빼앗기는 고통.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들에게서 소중한 것을 빼앗은 자들의 ‘소중한 것’이 그곳에 있었다.
“힘을 합쳐, 그들이 사랑하는 전부를 빼앗도록 하지요.”
누군가에게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누군가 역시 사랑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 있다.
누군가 피의 복수(벤데타)를 결의할 때, 누군가 역시 피의 복수를 결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벼린 복수의 칼날, 그 끝이 겨누어질 곳은 오직 하나였다.
“「밤 사냥」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답니다.”
* * *
그 시각, 에인션트 리그의 제1마탑.
그곳 마탑의 지하를 따라 헤아릴 수 없는 ‘합성생물(키메라)’들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기교 학파의 제3마탑.
그 지하에도 역시 무기질(無機質)로 이루어진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오토마타(자동인형)들이 늘어서 있었다.
신성 제국이 거느린 섭리 밖의 군세는, 더 이상 신성군단이 자랑하는 ‘천사병’이 전부가 아니다.
전쟁의 준비는 착실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전쟁은, 결코 평화를 바라지 않는 전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