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가시 왕관 (3)
그 어느 때보다 라일라와 가족들의 힘이 되어줘야 할 순간에, 정작 시엔 나이트워커는 어느 때보다 무력해져 있었다.
최고 회의에서 암살자들의 어머니가 홀로 결의를 다지고 결정을 내릴 때, 시엔이 할 수 있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었다.
‘《루나 피에나(Luna piena)》를 준비해 주세요.’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리고 라일라가 떠났을 때, 시엔은 저택에 남겨졌다. 부재하고 있는 나이트워커 공작의 대리이자, 동시에 그녀의 뒤를 이어 새롭게 나이트워커 가문을 이끌게 될 차기 가주로서.
─저택의 지하, 나락의 방.
아무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검을 휘둘렀다. 휘두르고, 또 휘둘렀다. 그러나 아무리 휘둘러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질 것도 없었다.
방금 휘둘러진 시엔의 일검은, 정답이었을까.
설령 옳은 답을 내고 맞게 휘둘렀다고 해도, 여전히 ‘틀린 답’이 되어버리는 저주 속에서 헤매는 중일까.
* * *
“어머니.”
그날, 최고 회의가 끝나고 나서 홀로 남겨진 저택의 집무실.
그곳에서 시엔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리석은 짓이에요.”
“무엇이 말이니?”
“조니 삼촌을 구하러 가는 일이요.”
시엔이 말했다. 가족들이 입회해 있는 회의에서 마지막까지 입을 열지 못했던 그 말을.
“설령 어머니 홀로 움직일 거라 가정해도, 그것마저 적들의 예상을 벗어나지 못할 거예요.”
“글쎄, 그럴지도 모르지.”
라일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상대 역시 바보가 아니니까 말이야.”
세상에 바보 따위는 없다. 어느 하나가 그럴싸하게 세운 계획이 수틀리는 것은, 늘 상대 역시 그럴싸하게 계획을 세우고 있는 까닭이다.
“로드 스칼렛, 로젤리아, 빌헬미나, 그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제국의 이들은 모두 바보가 아니란다.”
이 세상에 바보 따위는 없다.
“그걸 알고도 ‘바보가 아닌 자들의 땅’에 홀로 향할 생각이신가요?”
“그렇단다.”
“……그 결정이 우리 가문 전체를 파멸로 이끌 수도 있어요.”
“아니,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시엔의 말에 라일라가 대답했다.
“네가 있잖니.”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의 대자. 가문 제일의 천재, 시엔 나이트워커.
“가족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네게는 해야겠지.”
그 말에 시엔이 나지막이 숨을 삼켰다.
“……저는 아직 가문을 이끌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삼키고 나서 시엔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라일라는 달리 부정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늘 갑작스러운 법이거든.”
“뭘 말이죠?”
“내가 돌아오지 못하든, 설령 무사히 돌아오든, 나는 너에게 ‘나이트워커 공작’의 자리를 넘길 셈이란다.”
“……꼭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솔직하게 말해서, 확률이 높지는 않으니 말이지.”
라일라가 순순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말에 시엔이 다시금 입술을 깨물었다.
“각오 정도는 하고 있으렴.”
“……그걸 알고도, 조니 삼촌의 뒤를 이어 또다시 우리에게 ‘전부를 잃는 고통’을 줄 생각이신가요?”
“물론 주고 싶지 않단다.”
라일라가 대답했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는 일이거든.”
“어째서죠?”
“우리에게는 가족이 전부니까.”
* * *
후웅!
휘둘러진 칼끝이 허공을 갈랐다. 아무것도 없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바로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시나무의 왕 만세(Hail, King of Thorn)!”
“만수무강하소서!(Long Live the King)!”
짐짓 왕 앞에서 예를 표하는 신하처럼 엄숙히, 동시에 광대처럼 조롱를 감추지 못하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그리고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낯이 익었다.
“체사레……?”
나이트워커 공작 저택의 지하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찬 지하실에서 시엔이 입을 열었다.
“아, 시엔 나이트워커.”
동시에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려올 리 없는 목소리. 있을 리 없는 얼굴.
“가시나무의 왕을 뵙나이다.”
과장스럽게, 마치 광대처럼 익살스러운 표정을 하고서 고개를 숙이는 그 모습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체사레 보르자…….”
“아, 여전히 저를 그렇게 부르시는군요.”
남자가 조소했다.
“그럼 뭐라고 널 불러야 하지?”
“네가 절대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조소 끝에 남자가 대답했다.
“나는 너의 운명이다, 시엔 나이트워커.”
체사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네가 패배하고 파멸하는 그 순간까지, 나는 네 곁에서 너의 ‘틀린 답’을 지켜보며 그 끝에 그려질 최후를 목도할 것이다.”
“…….”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시엔의 손에 쓰러져야 했던 체사레가 이곳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삶이나 생명, 육체의 개념이 아니었다.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고맙다.”
깨닫고 나서 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활짝.
“뭐가 말이지?”
“네가 나의 운명이 되어줘서.”
시엔이 대답했다. 일순, 시엔의 눈앞에 있던 체사레의 그림자에 동요가 깃들었다.
“이제 와서 사랑 고백이라도 할 셈이신가?”
“그럴 리가.”
조소하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시엔이 말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했거든.”
“이제는 알 수 있다는 겁니까?”
“그래.”
시엔이 대답했다.
“…….”
그 말에 시엔의 앞에 있던 체사레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너는…… 강했다.”
갸웃거리는 그를 향해 시엔이 말했다.
“지금껏 내가 싸워온 그 누구보다도.”
“웃기는 소리를 하는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거짓말을 하고 있군요, 시엔 나이트워커.”
그 말에 체사레가 조롱했다.
“저는 당신이 ‘그 남자’와 싸웠으며, 그 남자의 손에 쓰러졌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남자가 그렇게 말했나?”
“그렇답니다. 저의 귀로 직접 들었지요.”
“너는 역시 진짜 ‘카이사르’구나.”
체사레의 말에 시엔이 웃음을 터뜨렸다.
“죽고 사라졌어야 할 네놈이, 왜 이곳에 있지?”
웃음을 터뜨리는 시엔의 말에 체사레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잠시였다.
“네놈의 눈앞에 놓여 있는 운명의 끝을 목도하기 위해서.”
체사레가 말했다. 그리고 그 말에 시엔이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깨닫고 보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부터 전부 시엔의 망상이었다는 듯이.
* * *
“자신의 아픔 따위는, 그야말로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고통이지요.”
그렇게 말하며 로젤리아가 미소 짓는다. 그녀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 끝을 따라 펼쳐진 손톱에 보랏빛의 매니큐어를 칠하며.
“흠,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말해주니 고맙네요.”
매니큐어를 손질하는 로젤리아의 모습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니 나이트워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아픔을 덜 방법을 생각하고 있답니다.”
“아, 참으로 상냥하기도 하시지.”
“바라는 것이 있으신가요?”
철창 속에 구속되어 있는 남자, 조니 나이트워커를 마주하며 로젤리아가 물었다.
“고통을 억제할 수 있는 약물, 혹은 이 세상의 진미라 불리는 맛있는 음식, 의식을 잃은 채 꿈의 세계에 빠질 수 있는 약, 무엇이든 말씀하시죠.”
마치 그곳에서 고통받고 있는 조니를 배려하듯이.
“키스.”
그리고 조니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이 앞에 있는 레이디의 입맞춤이야말로, 지금 내가 무엇보다 바라는 ‘포상’이지요. 아닌가?”
“아, 그러시군요.”
조니의 농담에도 로젤리아는 정색하지 않았다.
“그게 당신의 바람이라면, 기꺼이 해드리지요.”
그저 몸을 일으켜, 그곳에 묶여 있는 조니 나이트워커를 향해 걸음을 옮길 따름이다.
“여, 여왕 폐하!”
곁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당혹 속에서 소리를 울렸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의 진심 어린 소리도, 결코 로젤리아의 의지를 꺾거나 설득할 수 없었다.
아니, 그저 그 이상 목소리를 높이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가 될지 모를 그들이 아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역시 당신의 모습이 썩 나쁘지는 않았답니다.”
“흠, 썩 나쁘지 않은 정도라니. 나름대로 상처 입겠는데──”
뒤이어 조니가 말을 이을 틈도 없이, 로젤리아 샤를의 핏빛 입술이 조니의 퉁퉁 부르트고 말라붙은 입술 위에 겹쳤다.
남자의 입술, 입속, 혓바닥, 그 전체를 음미하듯 로젤리아의 입과 혀가 탐욕스럽게 그곳을 탐미했다.
그 어느 때보다 농밀하고 짙게 이어지는 키스 속에서, 비로소 서로의 입술이 벌려진다.
입술의 끝에서 끝으로 이어진 타액이 거미줄처럼 늘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입술 속, 로젤리아의 송곳니 끄트머리에 방울져 있는 ‘핏방울’ 일적(一滴)을 뒤로하고.
* * *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끝없는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쏟아지는 달빛, 햇빛, 내지는 인간의 손으로 쌓아 올린 등불. 그 무엇도 그녀의 눈앞에 있는 ‘길’을 밝혀줄 수는 없었다.
암살자들의 어머니, 라일라 나이트워커.
아무도 없는 길, 마치 곡두처럼 덧없는 불빛을 뒤로하고 라일라가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그들의 전부를 구하기 위해서.
그와 동시에, 기꺼이 그들의 ‘일부’를 희생하는 행위를 마다하지 않고.
끝없이 검고 어두운 길이었다.
* * *
그 시각, 나이트워커 공작령.
“……시엔.”
목소리가 들린다. 그 목소리에 시엔이 고개를 돌렸다.
“어디를 가는 길이니?”
시엔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늘 그랬지.”
목소리의 주인이자 《가시 인형》의 이명을 가진 가족, 미하일이 쓴웃음을 짓는다.
“미하일 삼촌.”
쓴웃음을 짓는 미하일을 향해, 시엔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 앞을 막을 생각이십니까?”
“음, 글쎄.”
미하일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와 동시에 헤아릴 수 없는 기척들, 그것도 강자의 기척들이 시엔의 일대를 가로막았다.
“─.”
흑조 티아, 대량학살장치 앨리스, 미하일과 이자벨, 밴시 린, 마녀 사냥꾼 헨젤과 그레텔, 그 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가족’들이 시엔의 앞을 막고 있다.
그리고 시엔의 앞을 가로막고 휘감고 있는 그들 속에서, 남자 하나가 걸음을 옮겼다.
하이마스터의 정점이라 일컬어지는 강자, 일명 《웃는 남자》의 이명을 가진 그 남자가.
“요한 형님…….”
시엔을 포위하고 있는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대표로 나서고 있는 남자.
아무리 시엔이라 해도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따돌릴 수 없다. 특히나 ‘지금의 시엔’에게는 더더욱.
“막아도 소용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엔이 말했다.
“저는 갈 겁니다.”
그 말에 요한이 잠시 침묵했다.
침묵 끝에, 웃는 남자가 되물었다.
“어디로 말이니?”
“우리의 전부를 지키기 위해서.”
시엔이 대답했다. 얼어붙을 것 같은 살기가 내려앉는다.
“이걸 손에 쥐어라.”
아니, 살기라고 생각했던 것은 찰나였다.
이 순간, 라일라가 지니고 있을 신기급 무기, 빙륜검 루나 피에나.
그와 더불어 나이트워커 가문에 전해지는 또 하나의 신기이자 ‘웃는 남자’의 상징 그 자체.
그 칼자루를 마주하며 시엔이 숨을 삼켰다.
“──별과 단검의 이름 아래 맹세하나니.”
삼키고 나서, 나직이 팔을 뻗어 검을 손에 넣는다.
“우리의 전부를 위해,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