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달빛과 보름달 (2)
샤를마뉴 왕국.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나라, 봄볕의 햇살이 그치지 않는 나라라 불렸던 그곳은 더 이상 ‘봄과 기사도의 나라’가 아니었다.
여전히 햇빛은 대지를 비추며, 땅은 풍요롭다.
그러나 이 나라를 다스리는 새로운 지배자들은 결코 기사의 도를 좇지도, 봄볕 햇살의 따사로움을 즐기지도 않았다.
밤과 피의 왕국, 수도 랭스.
그리고 바로 그 왕국의 심장을 향해, 두 명의 밤을 걷는 자들이 발을 디뎠다.
시엔과 라일라.
전대 나이트워커 공작과 당대 나이트워커 공작, 암살자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와 아들이─.
“여전히 평화로운 도시구나.”
수도 랭스는 얼핏 보기에 전쟁의 상흔(傷痕)을 알지 못하는 곳이었다.
백성들은 여느 때처럼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고, 밤과 피의 왕국을 다스리는 새로운 ‘귀족’들은 박쥐처럼 어둠 속에 숨어 침묵하고 있다.
이 나라의 정점에 서는 밤과 피의 여왕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림자 기사들이 속삭이길, 공식적으로 이 나라의 ‘귀족’들은 왕도 루테시아의 탈환을 위해 출정을 했다고 하는구나.”
그날 이후, 적지 않은 시일이 지났다. 피의 세례를 받은 어린아이들이자 새로운 귀족들 역시, 이제는 장성(長成)해 귀족의 의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핵심 병력은 어느 정도 공백이 생겼겠지.”
과거에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피난을 갈 수 없었던 왕도 루테시아의 거지든, 절임 생선을 취급하는 장수든, 혹은 진짜로 작위를 가진 귀족이거나 기사였든지, 과거의 귀천(貴賤) 따위는 이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다.
그날, 쏟아지는 혈우 속에서 피의 세례를 마친 그들은 이제 모두가 똑같은 귀족이 되어 있다.
인간을 지배하는 뱀파이어.
이곳은 바로 그들의 왕국이다.
“물론 주요 전력 일부가 출정을 떠났다고 해도, 우리가 올 걸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필시 그에 걸맞은 대비책도 세워놨을 테고요.”
세상에 알기 쉬운 바보는 없다. 누군가 계획을 세울 때, 상대 역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서로가 그럴싸하다고 믿는 계획이 격돌하는 순간, 어느 하나는 크게 실망하게 될 것이다.
“로젤리아 샤를과 미망공 로드 스칼렛, 둘 모두 쉬운 상대는 아니니까.”
나이트워커 가문의 손에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그들, 피의 결속으로 이어진 두 모녀(母女) 역시 계획을 세우고 기다리는 중이리라.
그중에서도 로젤리아 샤를, 그녀는 최초의 뱀파이어이자 미망공 ‘피의 어머니’가 가진 힘을 각별히 이어받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다.
뱀파이어의 세계 역시 인간들의 가문과 같다.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 있고, 장차 일족을 짊어질 그들의 수장을 키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로드 스칼렛은, 마찬가지로 나이트워커 가문의 손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녀 로젤리아를 ‘후계자’로 삼을 것이다.
진조급 뱀파이어의 후계자.
어둠 속에서 침묵하고 규율을 지키던 ‘뱀파이어 클랜’은 더 이상 없다. 이곳이 그들의 왕국이고, 로젤리아는 장차 그들 클랜을 짊어질 새로운 후계자이자 여왕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시엔과 라일라처럼─ 이미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당장 뱀파이어와 인간이 갖는 종족의 차이점을 고려했을 때,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을 일이다.
“자기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셈이네요.”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라일라의 쓴웃음에, 시엔이 대답했다.
비로소 그녀의 목소리에 깃들어 있는 ‘거짓과 다를 바 없는 침묵’을 이해했기에.
“조니 삼촌을…… 구할 생각이 아니었군요.”
“글쎄.”
라일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바보가 아니에요.”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단다, 시엔.”
라일라는 우스운 농담을 들은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두말할 것도 없는 소리다.
당장 그녀 라일라 나이트워커가 얼마나 지혜롭고, 또 그녀의 지혜가 이 가문을 지탱해 왔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어머니는 확실하게 살아 돌아올 각오가 있으셨던 거고요.”
“그럼 내가 무엇 하러 위험을 감수하고, 이곳 적들의 땅 랭스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조니 삼촌을 죽이기 위해서요.”
시엔이 대답했다.
“고통받는 삼촌에게 안식을 주고, 어머니 혼자 몸을 보전해 돌아오는 것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리스크라고 생각했겠죠.”
그녀는 암살자다. 아무리 그늘 속에서 움직이는 보통 암살자들의 방식과 다르다고 해도, 그들이 그럴 마음을 먹을 경우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목을 칼로 내리긋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달에게는 어떤 별도 더 소중하거나 덜 소중하지 않거든.”
라일라는 달리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때로는 공리(公理)를 위해 일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거짓말이에요.”
그리고 그 말에 시엔이 싸늘하게 되물었다.
“우리 모두 진실을 알고 있잖아요.”
아무리 그들에게 가족이 전부라고 말해도, 가족 모두가 똑같이 소중할 리 없다.
당장 미하일에게 있어 비고나 앨리스가 그렇고, 시엔에게 있어서 라일라나 티아가 그렇고, 조니에게 있어서는 ‘루치아노’가 그랬을 것이다.
모두가 소중하다고 해도 그 소중함의 정도가 똑같을 리 없다. 그게 인간이니까.
제아무리 밤을 걷는 자라 할지라도 인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게 진실이다.
“그래, 그리고 그게 나의 결정이었지.”
보다 소중하고 지켜야 할 별을 위해, 그렇지 않은 별을 자기 손으로 떨어뜨린다.
시엔의 추궁에 라일라는 달리 부정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나 이제, 결정을 내리는 것은 내가 아니란다.”
그것이 나이트워커 공작의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나이트워커 공작은 그녀가 아니다. 결정을 내리는 것 역시 그녀의 몫이 아니다.
“저는 그저 당신의 명령을 따를 뿐이랍니다, 경애하는 우리 암살자들의 아버지─.”
과거 암살자들의 어머니라 불린 그녀가, 이제는 그녀의 대자를 향해 가문의 정점에 서는 ‘가주의 칭호’를 호명하고 있다.
“돈(Don) 나이트워커.”
과거, 마지막으로 시엔이 그 호칭을 들었을 때, 그것이 라일라 최후의 모습이었다.
이제는 아니다. 그녀는 곁에 있고, 시엔 역시 그 어느 때보다 강해져 있다.
“모두 함께 살아서 돌아갈 거예요.”
각오를 다진 암살자들의 아버지가 말했다.
* * *
시엔과 라일라의 눈과 귀가 속삭여준 첩보대로, 이미 샤를마뉴 왕국의 ‘귀족’들은 빠른 속도로 왕도 루테시아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
아마 이 세상에 그들처럼 이 귀족의 의무를 몸소 보여주고 있는 이들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밤과 피의 왕국을 다스리는 새로운 귀족들은, 결코 전선의 뒤에서 명령을 내리거나 보호받는 일이 없었다.
누구보다 몸소 움직이며 모범을 보일 따름이다.
피의 세례를 통해 혈족으로 거듭나 있는 밤과 피의 귀족들은 사병을 거느리지도 않고, 시종을 거느리지도 않고, 그저 자신들의 두 발과 ‘날개’를 펼치며 움직이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상대, 칠왕국의 군세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 이상, 이 대륙에 섭리와 이치 속에 묶여 있는 ‘인간’이 있을 자리는 없다는 듯이.
* * *
갈매기가 끼룩거리는 소리가 났다.
눈의 끝에서 끝까지 펼쳐져 있는 수평선. 푸른 바다. 사금처럼 부서져 쏟아지는 햇살.
광활하게 펼쳐진 지중해를 따라 헤아릴 수 없는 수의 군용 갤리선과 공화국이 자랑하는 초대형 군함(베네토 갤리어스)이 늘어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그 대형 군함, 베네토 갤리어스의 뱃머리에 있었다.
이 나라가 유일하게 물량과 기술에 있어 최고 우위를 점하는 대륙 최강의 해양 세력.
바로 그 베네토 공화국 해군의 정점을 상징하는 대제독(Grand Admiral)이, 헤아릴 수 없는 훈장이 주렁주렁 달린 순백의 코트를 펄럭이며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일찍이 마린 서펀트, 이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시엔과 혼약을 맺고 ‘마린 나이트워커’의 이름으로 불리는 대해의 여제가.
“……설마 신성 제국이 사라센 제국에 함대를 빌릴 줄이야.”
제독모 밑으로 흘러내리는 사파이어색의 머리카락을 뒤로하고, 마린이 얼음처럼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어느덧 적들의 함대가 기동을 시작했고, 그에 맞서서 ‘마린 나이트워커 대제독’이 손을 뻗었다.
“함포, 발사!”
기사의 시대는 끝을 고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 속에서 태어나게 될 병기, 흑색 화약을 싣고 있는 최전선의 파괴 병기가 불을 뿜었다.
아울러 그녀가 대해의 여왕이 된 것은, 결코 함대를 지휘하는 능력 하나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비록 이제는 ‘나이트워커 가문’의 성을 가졌을지라도, 그녀의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두 함대가 대치하고 있는 그 사이에서, 쏟아지는 대포알과 폭발하는 흑색 화약 속에서, 용오름이 휘몰아쳤다.
* * *
대륙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신성 제국과 베네토 공화국 사이에서, 칠왕국과 샤를마뉴 왕국 사이에서, 이제는 무슨 명분으로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린 전쟁이 곳곳에서 잇달아 펼쳐지고 있었다.
바다에서, 땅에서, 산맥에서, 빛이 들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그리고 수도 베네토에서도─.
“아, 볼 때마다 참으로 이 도시의 아름다움에는 경이를 금할 길이 없군요.”
모노클을 쓴 노신사가 까마귀 부리의 지팡이를 쥐고 미소 짓는다.
늙은 암살자를 죽이고 복수자를 사로잡은 쌍두까마귀의 가족.
나이트워커 가문의 가장 증오스러운 적이자, 마찬가지로 그들의 손에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빼앗기고 잃어버린 남자.
‘잭 할아범! 같이 놀자!’
‘또 레너드가 놀렸어! 할아범이 혼내줘!’
레나와 레너드, 그 아름답고 순수했던 어린아이들이 밤을 걷는 자들의 손에 찢겨 죽는 모습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 있는 법이다.
노신사의 모노클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뺨을 따라 미끄러질 즈음.
“음, 여기 있었구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잭 더 리퍼의 이름을 가진 노신사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돌려 그곳에 있는 ‘증오스러운 적’을 바라볼 따름이다.
남자의 입가에는 초승달처럼 시린 미소가 걸려 있다.
나이트워커 가문 최강의 하이마스터, 《웃는 남자》.
“설마 제 발로 호랑이굴에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미스터 요한.”
잭 더 리퍼가 말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 둘이었을 경우에는 어쩔 셈이었지?”
“유감스럽게도 이 도시, 이 나라는 넓지요.”
잭이 말했다.
“좁쌀처럼 작은 이 나라에는, 동시에 지켜야 할 것들이 바다처럼 넘쳐나고 있으니─ 여기에는 결코 ‘두 명’이 올 수 없을 거랍니다.”
정보망은 공화국과 나이트워커 가문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들 역시 눈과 귀가 있다. 이 세상 어디에나.
그렇게 서로의 눈과 귀가, 서로의 상황을 보고 듣고 나서 할 수 있다고 결정을 내린 것이다.
어느 하나는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는 결정을.